[단독] 사도광산 유족 "끝까지 등재 반대, 도리는 아냐…추도식엔 참석하고 싶어"
"(사도광산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끝까지 반대하는 게 도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일본과) 웬수(원수)로 살 순 없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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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우릴 다시 억압 못 해"
김 씨는 "우리도 이제 베풀 수 있는 위치의 나라가 됐으니 인정할 건 인정해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윤석열 대통령이 일본에 가서 화합을 하자고 하면서 (관계 개선) 여건이 조성되지 않았냐"며 "일본이 다시 우리를 억압할 수 있는 위치도 아니고, 이제 어느 누구도 대한민국을 깔볼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앞서 정부는 "사도광산의 '전체 역사'를 현장에 반영하라는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의 권고와 세계유산위원회의 결정을 일본이 성실히 이행하고 이를 위한 선제적 조치를 취할 것을 전제로 등재 결정에 동의했다"고 밝혔다. 일본은 등재 결정 전 사도광산 인근에 있는 ‘아이카와 향토박물관’에 조선인 노동자 관련 전시공간을 마련했고, 매해 추도식을 열기로 했다.
그러나 일본은 사도광산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면서 노역의 강제성을 명시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일본 정부 대표가 "그동안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채택된 모든 관련 결정과 이에 관한 일본의 약속들을 명심할 것(bearing in mind)"이라고 밝혔을 뿐이다. 다만 주한 일본 대사관 측은 지난달 31일 중앙일보에 "일본이 '명심하겠다'고 밝힌 '모든 결정과 약속'에는 2015년 군함도 등재 당시 한국인들이 '강제로 노역'(forced to work)한 사실을 인정했던 것도 포함된다"고 밝혔다. 군함도 등재 당시 밝혔던 강제성 인정 입장을 사실상 계승한다는 뜻이다.
"강제성 따져 무엇하나" 생각마저
그럼에도 일본의 강제성 누락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일본이 사도광산 등재 당시 '강제 노역'에 대한 발언을 하지 않아 갈등의 불씨를 남겼고, 새로 설치한 전시관 전시물에도 명시적 강제성 시인은 없다.
이와 관련해 김 씨는 "지나간 세월 속에 강제든 아니든 굳이 따져봐야 무엇을 하겠느냐는 생각까지 든다"고 말했다.
누구보다도 동원과 노역의 강제성에 대한 일본의 명시적인 인정과 사과를 절실하게 바라는 건 유족일 테지만, 어렵게 마련된 한·일 관계 개선의 발판 역시 중시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다. 한편으로는 사도광산을 비롯, 강제동원 역사 전반을 꾸준히 부정하며 역사 왜곡 행태를 보여온 일본을 향해 이제는 자포자기하는 듯한 심경도 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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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폐 망가져…평생 어렵게 살아"
어린 나이였지만, 김 씨는 부친이 사도광산에서 강제로 노역하며 겪어야 했던 고통을 생생히 기억했다. 김 씨의 부친 고(故) 김종원씨는 1912년생으로,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1940년 충남 논산에서 사도 광산으로 징용됐다. 부친은 당시 김 씨의 모친까지 사도광산으로 데려왔다. 이후 김 씨는 1942년 사도광산에서 태어났다.
김 씨는 "아버지는 사도광산에서 다이너마이트를 폭발시켜 돌을 뚫는 작업을 했는데, 돌가루를 워낙 많이 먹어 폐가 완전히 망가졌다"며 "거기서 돈 몇 푼은 벌어왔지만, 폐에 돌가루가 박히는 바람에 병원에 (돈을) 다 갖다 주고 우리는 어렵게 살았다"고 회상했다. 실제 전시관에는 바위 뚫기 등 위험한 작업에 한국인 노동자가 일본인보다 더 많이 투입됐다는 내용이 전시됐고, 일본 정부 역시 등재 직후 공개 발언에서 이를 시인했다.
그런데 아버지의 몸과 마음을 망가뜨린 사도광산이 세계유산에 등재된다는 사실을 김 씨는 최근에야 뒤늦게 알았다고 한다. 김 씨는 "아무도 이야기를 해주지 않는데 어떻게 알겠느냐"고 반문했다.
등재 소식조차 제때 몰랐던 그는 추도식과 조선인 노동자 관련 전시관에 대한 정보도 정부로부터 공유 받은 적이 없다고 했다. 김 씨는 "매년 추도식을 연다면 한 번쯤은 참석하고 싶고, 사도광산 현장도 직접 가서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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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족 포용력 보여도…'행동' 삐걱대는 日
앞서 정부는 사도광산 등재와 관련해 일본으로부터 '말보다 행동'을 챙겼다는 입장을 줄곧 강조했다. 강제성 표현에선 다소 미진한 부분이 있더라도 추도식과 전시관 운영이라는 '확실한 후속 조치'를 챙겼다는 취지다. 전시물에 명시적 강제성 표현은 없지만 한국인 노동자들이 조선총독부 관여로 징용됐고, 인신 구속 상태에서 일했다는 점을 보여주는 증거 자료들도 포함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일본은 이런 양국 간 합의의 정신을 존중하지 않는 듯 한 태도를 벌써 보이고 있다. 이르면 다음 달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추도식이 열릴 예정이지만, 그 대상이 되는 노동자 명부 관련 추가 자료를 한국 정부와 시민단체가 1년 넘게 요청하는데도 공개하지 않는 게 대표적인 예다. 일본이 진정성 있는 조치를 이행하지 않는다면 미래지향적 양국 관계를 지지하며 대승적 입장을 보인 김 씨 등 징용 피해 유족들에 또다른 상처를 남길 것이란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박현주 기자 park.hyunj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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