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진 영화만사] 천만 신화, 이제 한국영화 역사에서 지워야 할 때

전형화 2024. 8. 8. 0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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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탈주' 포스터

이제 ‘천만 신화’ 따위는 잊어야 한다. 천만 관객 시대는 끝났으며, 다시는 오지 않거나, 다소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다시는 오지도 말아야 한다. 일본의 버블경제처럼 천만 관객 판타지는 한국 영화계의 거품 현상이었다. 기이하게도 천만이 넘은 영화들은 대체로 스크린을 독점한 결과였다. 전체 3500개 스크린에서 최소 2900개까지 가져 가서는 ‘날개를 최대한 펼치고’ 배급 공세를 펼쳤다. 특정 영화가 천만을 모으기 전까지 스크린 독과점에 대해 그렇게나 비판을 하던 언론, 평론가, 영화 단체들도 일단 천만 영화 앞에서는 고개를 숙였다. 그 이율배반의 역사도 이제 끝났다.

한국 영화계에서 더 이상 천만 영화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산업 환경이 변했다. 관객들이 OTT로 급격하게 넘어 간 지 오래며 극장이라는 공간을 다르게 인식하고 접근하기 시작했다. 특정 영화를 보기 위해 한꺼번에 몰리기 보다는 다른 플랫폼에 해당 작품이 나오기까지 그 ‘홀드 백’을 기다리기까지 한다. 천만 관객은 아주 빠른 속도로 한번에 관객을 모을 때만이 가능한 수치이다. 

관객의 변화는 플랫폼의 변화에 따른 것만은 아니다. 관객들은 이제 극장을 자신들의 진정한 문화공간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고급스러운 문화 취향을 즐길 수 있거나 자신만의 마니아적 취향을 느낄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상업영화도 블록버스터급이 아니라 장르별로 다양하게 포진되기를 바란다. 역시 대중의 힘이 중요하다. 일반 관객들이 극장의 종(種)다양성을 요구하고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관객들의 이런 변화에 극장들의 대응 태세는 명약관화하다. 영화 한 편으로 장외 홈런이라는 한 방을 기대하면 안된다. 번트, 도루, 내야 안타, 중견수 2루타 등등 할 건 다 해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그럴 조짐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희망이 보인다. 한국영화가 위기라지만 아주 절망스러운 상황만은 아닌 것은 역시 대중의 힘, 이들이 갖고 있는 집단 지성이 놀랍기 때문이다. ‘핸섬 가이즈’가 지난 6일 기준 176만명을 모았다. BEP가 110만명 수준이었다. 작은 돈을 벌었다. 그 작은 돈을 잘 나누면 된다. 이제 영화로 떼돈을 벌 생각을 버려야 한다. 작은 돈을 비교적 균형 있게 잘 나누어서 생계를 이어 가고 다음 영화를 또 찍을 수 있으면 된다. 영화 ‘탈주’도 250만명을 모았다. 300만명을 넘을 태세다. BEP는 200만 수준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역시 예전의 수준으로 볼 때 아주 큰 돈을 벌지는 못했다. 수십 억원의 수익금으로 극장과 배급사가 나누고, 배급사가 제작사가 나누고, 제작사의 수익금은 또 제작자와 감독이 나누면 그 절대 액수가 많이 줄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정상이다. 영화 한편으로 수십, 수백 억원을 벌겠다는 욕망을 이제 내려 놓아야 한다. 영화가 공적 산물이며 공적인 무엇이라고 그렇게나 주장들을 해 온 만큼 그걸 이제 실천적으로 보여 주어야 한다. 그 첫 번째 단추는 사적 욕망, 개인 수익의 극대화를 자제하는 모습을 갖춰 나가는 것이다. 스크린을 독점하고 작품성 보다는 상업성과 대중성, 스타캐스팅으로 중무장한 채, 막대한 제작비를 때려 붓고, 돈 놓고 돈 먹기 식의 머니 게임으로 크게 성공하겠다는 욕심을 줄여야 한다. 그건 메이저급 대기업 영화사나 일개 한 명의 감독이나 제작자나, 그 모두에게 공히 얘기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이 신기루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1990년대 후반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가 나오기를 전후해서는 소위 대박 영화가 400만 수준이었다. 모두들 150만에서 200만 관객이 넘으면 희희낙락했다. 강제규 감독이 이름을 얻은 것은 ‘쉬리’가 200만을 넘기면서부터였다. 그러니 이제 ‘답정너’다. 관객 수 손익분기점 150만~250만명의 영화들을 만들어야 한다. 전체 제작비(순제작비 플러스 마케팅비)가 최소 50억원에서 최대 100억원 대의 영화들을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다. 50억원대로 성공한 영화가 바로 ‘잠’이었다. 100억짜리 영화가 이번 ‘탈주’다. CG와 특수효과에 돈을 너무 많이 써서 무려 200억원까지 들여 만든 후 처참하게 실패한 영화가 바로 ‘탈출 : 프로젝트 사일런스’이다. 이 영화는 400만명을 모아야 했지만 60만명대에서 그쳤다. 이제 이렇게 판을 짜서는 안된다. 작품의 디자인 자체를 ‘다운그레이드’ 시켜야 한다. 

‘핸섬 가이즈’와 ‘탈주’의 선전이 반갑다. 한편으로 ‘존 오브 인터레스트’나 ‘퍼펙트 데이즈’ ‘프렌치 수프’ 등 해외 예술영화의 성공도 기특하다. 아직 희망은 있다. 대중은 어려운 경제환경을 버텨내며 살아가고 있다. 영화도 긴축해서 만들어야 한다. 큰 영화를 작은 구조로 짜야 한다. 방법은 그 길 뿐이다. 천만 신화를 잊어야 한다. 천만이라는 단어 자체를 ‘영화 사전’에서 삭제해야 한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오동진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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