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개 같(고 싶)은 내 인생

2024. 8. 8. 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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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개는 오랫동안 하대받은 동물이다.

'개 같은'이란 표현은 인간다움에 못 미치거나 비루한 처지에 놓였거나 상황이 무척 안 좋을 때 사용했다.

'개 같은 내 인생'의 소년 잉마르는 자신의 처지를 우주선에 태워진 라이카에 비유한다.

'개 같은 인생'에서 '개 같고 싶은 인생'으로의 전환은 말장난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더 나은 감정적 연대와 이해를 갈망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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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개는 오랫동안 하대받은 동물이다. ‘개 같은’이란 표현은 인간다움에 못 미치거나 비루한 처지에 놓였거나 상황이 무척 안 좋을 때 사용했다. ‘개 같은’의 욕 같은 느낌을 활용한 영화나 노래, 책 제목도 적잖았다. 일례로 1995년 개봉한 영화 ‘개 같은 날의 오후’는 가부장제와 공권력, 사회적 편견에 저항하고자 한여름 타오르는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간 여인들 이야기다. 하지만 ‘개 같은’의 어감이 타 문화권에서는 그다지 부정적이지 않아서인지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은 단순하게 ‘A Hot Roof’(뜨거운 옥상)로 지었다.

‘개 같은’이 제목에 들어간 유명한 영화가 또 있다. 1987년 작 스웨덴 영화 ‘개 같은 내 인생’은 장난기 많은 12살 소년 잉마르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유년기는 지나도 어른은 아닌, 그래서 모든 것을 모호하고 새롭게 경험하는 소년이 배워가는 삶의 슬픔과 기쁨을 아름답게 그린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개는 실존했던 강아지를 지칭한다. 냉전 시대 미·소 양국이 무한 경쟁을 펼치며 광활한 우주마저 선점하려 할 때 소련은 우주로 동물을 보내는 실험을 먼저 시도했다. 이를 위해 길거리를 돌아다니던 개 한 마리가 지구 생명체 대표로 선택받는다. 이후 ‘라이카’로 알려진 이 강아지는 1957년 11월 3일 스푸트니크 2호에 실려 우주로 보내진다. 당시 기술력은 우주선을 지구로 귀환시킬 정도가 아니었기에 라이카는 우주에서 죽음을 맞는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한 채 홀로 우주를 떠도는 개 한 마리의 두려움과 고독 서린 두 눈. 라이카 이야기를 접한 이들의 뇌리에 박혀버린 이미지다. ‘개 같은 내 인생’의 소년 잉마르는 자신의 처지를 우주선에 태워진 라이카에 비유한다. 삶이 수치스럽기보단 사춘기 시절 겪는 내적 혼란과 고독함, 불안을 표현한 것이었다. 하지만 1957년 당시 만들어진 우주선은 그 안에 탄 생명체를 고온과 소음, 충격에서 보호할 정도가 아니었다. 우주선 내에서의 고독과 불안 등을 떠올린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라이카는 7시간 만에 죽었다고 한다.

21세기 현재 세계 각지에서 개의 위상은 사뭇 다르다. 반려문화 발달로 개와 동거하는 사람이 늘었고 동물권에 관한 논의도 활발하다. 한국사회에서도 ‘개 같은’이 부정적인 의미만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오히려 개는 개 같은 표정과 몸짓, 소리로 자신을 드러내 인간의 사랑을 쟁취한다. ‘개 팔자가 상팔자’가 된 세상이 도래하며 개와 인간의 상황이 역전됐다는 푸념도 들려온다.

동네에 청년들이 꽤 들르는 작은 책방이 있다. 책방 주인에게 최근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다. 요즘 MZ세대 중 반려동물을 기르지 않아도 반려견용 케이블 TV를 보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강아지와 다정히 교감하는 TV 속 견주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위로를 받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 그런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이야기가 있다는 것 자체가 감정과 위로에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하는 세태를 반영한다.

‘개 같은 인생’에서 ‘개 같고 싶은 인생’으로의 전환은 말장난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더 나은 감정적 연대와 이해를 갈망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러니 현대인이 정신적으로 나약해졌다고 지레 판단하지 말자. 과거는 이것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고 비교하지도 말자. 하나님이 참 위로라는 것이 진리일지라도 상대의 처지에 공감하지 않은 채 값싼 종교적 위로를 남발하지도 말자. 위로는 가르침이나 교훈보단 ‘타인에 대한 경청’과 ‘감정의 진솔한 교류’, ‘과하지 않은 유머’로 더 잘 전달된다. 현대사회에서 연대와 연민의 가치를 회복하려면 상대 곁에서 한결같이 신뢰를 보여주는 ‘개 같은 사람’이 필요함을 인정부터 하자.

김진혁 교수(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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