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 칼럼] 마지막 기회
개원한 지 두 달. 그동안 여야가 합의처리한 민생법안은 한 건도 없었다. 8개 상임위에선 아예 법안심사 자체를 하지 못했다. ‘개점휴업’ 상태에서도 정쟁을 향한 열정은 충만하다. 그새 7건의 탄핵안, 9건의 특검법이 발의됐다. 지금 시도되는 국정조사만 무려 4건이라 한다.
그동안 국회를 통과한 법안은 6건. 민주당에서 일방처리한 것들로, 모두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폐기될 예정이다. 발의→거부권→폐기→재발의→거부권→폐기→재재발의→거부권→재재재발의→거부권→폐기. 쓰레기통 속 법안을 재활용해 다시 쓰레기통으로 되돌리는 무한루프.
■
「 일방처리→거부권→폐기 무한루프
개원 두 달 넘도록 민생법안 ‘0건’
특검·탄핵 등 이젠 무감해질 지경
여당 새 지도부 ‘정치 복원’ 나서야
」
결과가 빤히 보이는데 지치지 않는 그 열정이 부럽다. 야당의 192석은 ‘전능’하다. 실제로 그 힘으로 사법부를 위협하고, 행정부를 넘보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들이 그 ‘전능’으로 증명한 것은 철저한 ‘무능’이다. 요란하기만 했지 192석 갖고 두 달 동안 뭘 했는가?
국정운영의 책임을 진 정부·여당도 느긋해 보인다. 낮은 지지율은 상수가 됐다. 거부권 행사에 따른 정치적 부담도 한두 번. 자꾸 반복되면 국민도 둔감해진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635건의 거부권을 행사했지만 탄핵이 거론되지 않았다.” 아직 615회 정도 여유가 있다는 얘기다.
야당은 뉴턴의 1법칙에 따라 특검, 탄핵을 관성적으로 시도한다. 야당의 독주는 3법칙에 따라 거부권 행사라는 반작용을 낳는다. 그 싸움은 뉴턴의 제2법칙을 따른다. 두 달 만에 벌써 9건의 특검, 7건의 탄핵이 시도되고, 그에 맞춰 거부권 행사의 속도도 점점 빨라지고 있다.
과거에는 예외로 여겨졌던 극단적 현상들이 이제는 나라의 정상적 상태가 되었다. 하도 남발하다 보니 ‘특검’조차도 이젠 별로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탄핵의 근거는 갈수록 억지스러워지고, 그 사유 또한 점점 사소해지고 있다. 자기들 스스로 그 시도가 성공하리라 믿는 것 같지도 않다.
여당은 필리버스터를 한다. 그걸로 야당의 입법 독주를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걸로 야당의 부당함을 알리려는 것 같지도 않다. 그들의 얘기에 아무도 관심이 없지 않은가. 국민의 눈에 그것은 그저 방광에 가해지는 압력을 누가 오래 견디는지 겨루는 이상한 게임으로 비칠 지경이다.
통신 조회를 놓고 벌이는 공방도 해괴하기 짝이 없다. 2021년 공수처가 통신 조회를 했을 때 윤석열 후보는 “미친 사람들”이라 비난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게 “적법한 절차”란다. 반면, 2021년 통신 조회는 “사찰이라 할 수 없다”고 했던 이재명 전 대표가 지금은 “윤석열식 블랙리스트”를 운운한다.
다들 실없어졌다. 왜 그럴까? 이유가 있다. 한 사회가 유지되려면 상식(common sense), 즉 사회 성원 대다수가 공유하는 공통의 양식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에 그 공통의 지반이 무너져 버렸다. 그 결과 국가 전체가 통약 불가능한 두 극단으로 쪼개져 버린 것이다. 이 양극화는 유튜브 정치의 필연적 결과다. 민주당은 당 전체가 유튜브 정치에 잡아먹혀 이상한 전체주의 정당에 가까워졌다. 대통령실과 집권 여당 역시 극우 유튜브 정치에 함몰되어 수구꼴통의 정당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민심에서 떨어져 스스로 고립되니 총선에 참패할 수밖에.
그나마 국민의힘은 이번 전당대회를 통해 극우 유튜버들을 주변화하는 데에 성공했다. 대통령실과 당의 주류에서 반대하는 데에도 불구하고 한동훈 후보를 대표로 선출한 것은, 그 보수적인 지지층의 3분의 2가 이번에 전략적 선택을 했다는 것을 뜻한다. 당원들이 준 이 마지막 기회를 살려야 한다.
중요한 것은 실종된 정치를 복원하는 것이다. 그게 국정을 책임진 집권 여당의 책무다. 그 일은 물론 극과 극으로 대립하고 두 당 사이에서 조금씩 공통의 분모를 찾아 나가는 것으로 시작하는 수밖에 없다. 다행히 두 당의 원내대표가 비쟁점 민생법안은 합의처리하기로 했다고 한다.
다음은 쟁점 법안이다. 그동안 여당은 민주당에서 발의하는 법안을 거부하기만 했다. 민주당의 입법에 설사 문제가 있더라도, 그 취지가 타당하다면 새 대표의 말대로 ‘대안’을 가지고 야당과 협상을 해야 한다. 언제까지 대통령에게 정치적 부담을 안기며 거부권 행사해 달라고 조를 것인가.
마지막은 정쟁용 법안이다. 민주당에서 추진하는 특검이나 탄핵은 대부분 말도 안 되는 것들이나, ‘채 상병 특검’처럼 널리 국민적 공감이 존재하는 사안을 그냥 피해갈 수는 없는 일이다. 정쟁에 악용될 독소조항을 빼고 오직 진상규명에 도움되는 형태의 대안 입법으로 야당을 설득해야 한다.
여당의 마지막 기회, 어쩌면 한국정당의 마지막 기회인지도 모른다. 여당은 여당다워야 한다. 승리는 야당을 말싸움으로 누르는 데가 아니라, 여당으로서 책임의식을 가지고 ‘정치의 복원’을 주도하는 데에 있다.
진중권 광운대 교수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이 숫자 읽을 수 있나요? 치매 걸리기 전 충격 증상 | 중앙일보
- "최연소 금메달, 우리 직원 딸이래"…소식에 들썩인 이 회사, 어디? | 중앙일보
- MB 단골 압구정 신사시장…앙드레김 흰옷 ‘변색 참사’도 | 중앙일보
- 외상도 유서도 없었다…혼자 살던 30대 여성, 집에서 숨진 원인 | 중앙일보
- "밤마다 몸부림"…세계 최악 불면공화국, 80만명 치료받았다 | 중앙일보
- 오은영 만난 '1200억대 수퍼리치'…싱가포르서 기소, 무슨 일 | 중앙일보
- 80대에 40대 뇌 가졌다…간단한 습관 3가지 뭐길래 | 중앙일보
- “줄넘기 대회 상품이 사기였다니” 해피머니 상품권 뿌린 학교도 비상 | 중앙일보
- 이재명 왜 말 아낄까…"DJ 사저 이렇게 팔릴 순 없다" 野 소란 | 중앙일보
- 왜 '전동 킥보드'라 했나…BTS 슈가 측 "성급했다, 킥보드 아니다" |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