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무' 창시자 김매자 "전통 뿌리 잃으면 K팝도 없다" [이지영의 문화난장]

이지영 2024. 8. 8.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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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매자는 여전한 현역 춤꾼이다. 지난달 4일 서울 국립극장에서 열린 여우락 페스티벌에서 공연하는 모습. [사진 국립극장]


팔순을 넘긴 춤꾼은 그저 “춤추는 게 재미있다”는 데서 70년 춤인생의 의미를 찾았다. 김매자(81) 창무예술원 이사장. 그가 집행위원장을 맡은 창무국제공연예술제가 올해로 30회를 맞았다. “한번 할 때마다 1억원씩 적자가 난다”면서도 30년을 포기 않고 이어온 축제다.

지난 6일 서울 중구 달개비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우리 춤을 해외에 많이 내보내는 것이 소망”이라고 말했다. “우리 춤을 봐 달라는 의미로 외국 기획자와 큐레이터들도 초청했다”면서다. 창무국제공연예술제는 오는 21~31일 세종시 세종예술의전당, 서울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서울 중구 남산국악당에서 열린다. 한국과 일본·중국·네덜란드·미국·뉴질랜드 등의 무용수들이 참여해 각기 자기 나라의 전통춤을 기반으로 한 창작무용을 선보인다. 그도 28일 남산국악당 무대에 직접 오른다.

「 30회 맞은 창무국제공연예술제
전통서 방법론 찾아 세계화 도모
"매번 1억 적자…극장 건물도 팔아
볼쇼이도 지원 없인 생존 어려워"


여전한 현역 "일주일에 사나흘 춤 연습"


간담회 후 따로 마련한 인터뷰 자리에서 그에게 일생을 ‘창무’에 바친 이유를 물었다. “요새도 1주일에 사나흘은 두세 시간씩 춤 연습을 한다”는 그는 “공부하는 마음”이라고 답했다.

그는 ‘창무’라는 춤 장르의 창시자다. ‘창작무용’을 요즘식 줄임말 ‘창무’로 이름 붙여 내놓은 게 1976년이다. 그해 12월 당시 이화여대 무용과 교수였던 그는 제자 5명과 함께 ‘창무회’를 결성했다. 고유명사 ‘창무’는 우리 전통무용에 바탕을 둔 창작무용을 뜻한다. 그때까지 한국무용은 옛 춤을 그대로 보존·재현하는 전통무용과 창작무용인 신무용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 중 신무용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왜곡되고 단절된 전통무용을 겉핥기식으로 차용했다는 비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화여대에서 무용을 전공한 그 역시 “대학교 때까지도 신무용 하면서 예쁘게 웃는 연습 하고 그랬다”고 돌아봤다.

그는 12살에 부산 김동민 민속무용연구소에 발을 들여놓으며 춤에 입문했다. 그의 배움은 대학생 시절에도 학교 울타리를 넘었다. 조선 왕조 마지막 무동 김천흥에게 궁중무용을, 세습무 김석출에게 동해안별신굿을 배웠고, 봉원사 송암스님을 찾아가 불교의식무용을 익혔다. 그는 국가무형문화재 제27호인 한영숙류 승무의 이수자이기도 하다. 이렇게 전통무용을 섭렵하면서도 그의 관심은 창작에 있었다. “이 시대 내 춤을 만들고 싶었다”면서 “내 춤의 방법론을 전통에서 가져오겠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국 춤의 본질은 호흡에서 나오는 기"


그렇게 내놓은 창작 무용 ‘춤본Ⅰ’(1987)과 ‘춤본Ⅱ’(1989)는 한국 창작춤 역사에서 전환점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그가 “우리 춤의 본질을 이야기하는 춤이자 몸으로 만든 논문”이라고 정의하는 ‘춤본’ 시리즈는 평단에서도 “우리춤의 정수를 추출해 현대화의 기본으로 삼아 세계무대에서 함께 나누기 위한 체계화 과정”(무용평론가 이지현)으로 평가받는다.

-우리 춤의 본질은 무엇인가.
“힘과 에너지, 호흡에서 나오는 기다. 한국 춤 호흡의 특징은 끊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단전과 중단전·상단전을 순환하며 흐른다. 그리고 한국무용은 자유롭다. 어떤 틀에 얽매이지 않는다.”

김매자 창무국제공연예술제 집행위원장(가운데)이 6일 서울 중구 달개비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제30회 창무국제공연예술제' 프로그램을 소개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의 무용 인생 2기는 1993년 서울 창전동에 객석 200석 규모의 무용전문 소극장 포스트극장을 지어 입주하면서 열린다. 창무국제공연예술제도 그 해부터 시작했다. “다른 나라 무용수들이 자기네 전통에 어떤 방법을 끌어들여 세계화했는지 배우고 싶어서”였다.

창무국제공연예술제는 이후 한국 창작춤 국제 교류의 중요한 장이 됐지만, 그로 인한 재정적인 어려움이 컸다. 급기야 2008년엔 예술제를 한해 쉬었고, 2009년부터는 정부 등 공공의 지원사업 도움을 일부 받고 있다. 하지만 매년 늘어나는 적자 폭은 사재를 털어 메우는 수밖에 없었다. 지상 7층, 지하 3층 규모의 극장 건물도 결국 팔았고, 이젠 지하 3개 층만 세 들어 사용한다. 지속가능성 측면에서 낙제점이다.

“나 죽으면 없어지겠죠.”
창무국제공연예술제의 미래에 대해 그는 달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서 “볼쇼이발레단도, 뉴욕시티발레단도 정부 지원이 없으면 못 살아남는다. 기초예술인 무용으로선 경제적 자급자족은 불가능한 일이다. 국가 지원이 지속적으로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부 지원을 통해 살려야 하는 이유는 뭔가.
“창무국제공연예술제는 단순히 외국 춤 데려와 공연시키는 행사가 아니다. 우리 것을 인식시키고 우리 안무자들에게 우리 것이 무엇인지, 자기 정체성이 무엇인지 연구시키는 페스티벌이다. 그 과정이 없으면 우리 것은 없어진다. 내 춤의 뿌리가 없어지면 K팝도 없다.”

이지영 논설위원

이지영 논설위원 jy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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