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재의 전쟁과 평화] “지금은 참지만, 반드시 따진다”…이스라엘 국민이 분노하는 법
이스라엘의 시계는 2023년 10월 7일 토요일 오전 6시 29분 멈춰 섰다. 휴일(이스라엘은 매주 토요일에 쉰다) 새벽 단잠을 깨우는 사이렌과 휴대폰 알람 소리가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인 하마스가 3000개가 넘는 로켓을 이스라엘로 쏴 보냈다는 사실을 알린 순간부터다.
이스라엘 국민은 늘 하던 대로 방공호로 들어갔다. 툭하면 주변과 무력 분쟁을 벌인 터라 공습경보는 일상이다. 이스라엘에선 공공·상업 건물은 물론 개인 주택에도 방공호를 설치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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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습경보 후 방공호 대피 주민
지상 침투한 하마스에 큰 피해
정부 책임 규명 목소리는 약해
“전시라 미룰 뿐 넘어가진 않아”
」
그런데 법적으로 방공호는 안에서 잠글 수 없게 돼 있어 문에 잠금장치가 없다. 위급한 상황에 누구나 가장 가까운 방공호로 피신할 수 있도록 한 조처다. 이게 비극을 불러왔다.
곧이어 들이닥친 하마스 테러리스트들은 집집이 돌아다니며 방공호를 뒤졌다. 이스라엘 국민은 살려면 안간힘을 다해 문손잡이를 붙들고 공포 속에서 군과 경찰이 구출해주기만을 기다려야만 했다. 힘이 부쳐 손잡이를 놓는 순간 바로 죽음이었다. 문이 아예 없는 버스 정류장의 방공호는 덫처럼 돼 버려 많은 희생자를 낳았다.
텅 빈 마을 지키며 참상 알리는 주민
국경과 가까운 이스라엘 마을은 자체 자경단을 꾸린다. 테러리스트가 마을에 침입한다면 자경단이 즉각 대응하고, 군과 경찰이 출동해 이를 제압하는 게 매뉴얼이었다.
그러나 지난해 10월 7일 가자 지구에서 하마스를 비롯한 수천 명의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이 쏟아져 나왔다. 군·경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공격이었다. 병력이 다음 날에서야 피해 현장에 진입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그날 이스라엘은 없었다. 우리가 알던, 일당백의 군대와 귀신 같은 정보기관을 보유하고, 로켓 공격을 막아낸 아이언돔을 개발한, 그런 이스라엘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스라엘 국민은 지침을 따랐지만, 정부는 그들을 구하는 데 실패했다.
이스라엘은 인구가 적어서(2022년 956만명) 전 국민이 몇 다리만 거치면 서로 다 안다고 한다. 가족이나 친구가 피해를 보지 않았더라도 거의 모든 국민이 충격과 슬픔에 빠진 이유다.
초기 혼란이 가신 뒤 이스라엘은 분노로 가득 찼다. 가해자인 하마스뿐만 아니라 무능했던 정부가 그 대상이었다. 그런데 기자가 지난달 방문했던 이스라엘은 정작 차분했다.
이스라엘 남부의 니르 오즈 키부츠는 전체 주민 416명 중 117명이 10·7 사태 때 숨지거나 납치됐다. 키부츠 곳곳엔 불에 탄 집과 총탄 자국이 남았다. 이릿 라하브 대표는 그날의 참상을 지켜봤다. 그런데도 그는 텅 빈 키부츠를 지키며 방문객을 거의 매일 맞고 있었다. 끔찍한 현장을 같이 돌아 다니며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을 더듬어 당시 상황을 전했다. 때론 힘들어 보였지만, 멈추지 않았다.
노바 EDM 축제가 열렸던 레임 휴양지에선 364명이 죽고 40명이 끌려갔다. 하마스는 당초 이곳을 목표로 삼진 않았는데, 침투 도중 우연히 축제를 발견했다. 춤과 음악을 즐기던 이들이 영문도 모른 채 당했다.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그들을 추모하고 있었다.
당시 아들 마탄을 잃은 리오 부부는 “그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세상에 얘기해줘야 한다”며 일주일에 2~3번 휴양지를 찾는다. 마탄의 아버지 오퍼 리오는 차분하고 담담한 목소리로 “휴양지는 처참했다. 아들 시신의 일부라도 찾으러 친구와 함께 손으로 땅을 뒤졌다”고 말했다.
예술 작품으로 인질 신속 귀환 촉구
이스라엘 수도 텔아비브 중심가의 예술박물관 광장은 ‘인질과 실종자 광장’으로 바뀌었다. 하마스는 이스라엘인 251명을 인질로 데려갔다. 이 중 116명을 구출했고, 20명이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다. 아직 115명이 어딘가에 갇혀있는 셈이다.
인질 가족이 정부 건물 앞에서 시위하다 올 1월 현재 장소로 옮겼다고 한다. 이후 이스라엘 예술가들이 재능 기부한 작품으로 광장이 꾸며졌다. 전광판에선 10·7 사태 후 흘러간 시간을 보여주고 있었고, 긴 식탁엔 인질 수만큼의 빈 의자가 놓였다. 인질들을 숨겼을 것으로 추정하는 지하 터널도 그대로 재현했다.
조카가 하마스에 붙잡혀 있다는 메이어 피시바인은 광장에서 공식 해설사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기자에게 작품이 어떤 의미인지 설명해줬다.
인질 가족 모임의 헤루트 님로디는 “정기적으로 정부로부터 현황 브리핑을 듣는다”며 “하마스에게 끌려간 아들 타미르는 건강이 안 좋다. 숨졌을 가능성이 크지만,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희생자 가족들은 트라우마를 참아가면서 10·7사태의 진상을 널리 알리는 데 힘쓰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러면서 인질들이 빨리 무사히 돌아와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었다.
물론 인질 가족들이 고속도로를 점거하고, 정부 당국자가 공식 행사에서 발언할 때 야유를 보내며 단상을 점거하기도 했다. 매주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의 하야를 촉구하는 시위가 총리 관저 근처에서 열린다. 그러나 책임자를 당장 처벌하라는 목소리는 이스라엘에서 작은 편이다.
이스라엘 국민이 체념하거나 순응적인 것은 아니다. ‘왜 가만히 있냐’고 물으니 모샤브 야히니의 모란 해지 대표는 “지금은 전쟁 중이잖나. 일단 전쟁을 끝내고 진상 조사가 나온 뒤 철저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10·7 사태 당시 모샤브 야히니 주민 7명이 죽었다. 그는 “이스라엘은 민주주의 국가라 책임자를 공개 교수형에 처하지 못한다”고 덧붙였다. 분함이 배어난 말투였다.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는 “이스라엘은 허투루 넘어간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1973년 제4차 중동 전쟁에서 이집트에게 한 방 먹은 이스라엘에선 전후 국민이 들고일어나 대법원장을 중심으로 하는 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위원회는 총참모장 등 장성 6명의 사임을 요구했다. 총리와 국방장관은 면죄부를 받았지만, 스스로 물러났다.
어떻게 분노해야만 하는지 아는 게 거대한 아랍권 틈 속에서 이스라엘의 생존법 중 하나가 아닐까.
이철재 군사안보연구소장·국방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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