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복룡의 신 영웅전] 약육강식 설파한 재상 비스마르크

2024. 8. 8.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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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일본이 천황파와 막부파의 싸움에 휩쓸리고 있을 때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가 12세이던 1853년 매슈 페리 사령관이 이끈 미국 동인도함대의 내항과 그 앞에 힘없이 무너지는 일본의 모습을 보면서 섬에 갇힌 나라의 장래와 천황제의 모순에 깊이 절망하며 밖을 봤다. 나가사키에 설치된 네덜란드 상관(商館)에 드나들며 영어를 배워 정치인 가운데 가장 유창한 영어를 구사했다.

이토는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후 외무성에서 말직으로 일하면서 1870~1883년에 부지런히 유럽과 미국을 방문하며 신학문을 배웠다. 그는 누구보다 앞선 당대의 개명 지식인이었다. 특히 독일의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1815~1898·사진)를 주목하고 선망했다. 프로이센 왕국의 빌헬름 1세가 독일을 통일하기까지 비스마르크가 보여준 철혈 같은 의지가 이토의 관심을 끌었다.

이토는 1883년 두 차례 비스마르크를 찾아가 만났다. “프로이센이 왜 강한가” 하는 질문을 갖고 독일제국의 육군과 대(對)러시아 정책을 배웠고, 비스마르크의 카리스마를 배웠다. 당시 비스마르크는 “세계 각국은 표면적으로는 신의를 바탕으로 한 교제를 말하지만 사실은 약육강식(弱肉强食)”이라고 일러줬다.

비스마르크가 강대국들에 영향력을 주면서도 그들의 저항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었던 비결은 ‘티 나지 않는 강공’ 덕분이었다. 수상 재임 중에 늘 주머니에 사직서를 넣고 다녔는데, 이토는 그런 그에게서 정치인의 진퇴를 배웠다.

비스마르크의 말을 요약하면 ‘강대국이 약소국가에 늘 칼을 빼 드는 것은 좋지 않지만, 때때로 외투 밑에 숨겨진 장검의 끝을 넌지시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토는 그에게서 배운 바를 조선 강제 병합에 적용했다. 헌법을 비롯한 대부분의 법제를 프로이센식으로 채택했다. 비스마르크의 담배 피우는 모습까지 흉내 낼 정도로 그를 존경했다.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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