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정기 <군산신문>에서 발견한 '복민의원' 이야기
기자는 지난 2011년 '군산의 서양 의료사'를 <오마이뉴스>에 다섯 번 연재한 적이 있다. (관련 기사: <군산의 첫 서양병원, '구암병원'에 얽힌 사연>). 그 후에도 숨겨진 자료를 발굴, 7~8회 기사화하였고, 그 과정에서 군산 최초 개업의(정순문 씨)도 밝혀냈다. 오늘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시기(1948) 신문 광고란에서 찾은 ‘복민의원’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기자말>
[조종안 기자]
▲ 1950년대 군산 시민병원(복민의원 이후 같은 건물에 개원한 병원으로 추정됨) |
ⓒ 군옥대관 |
거리는 혼란과 무질서가 난무했고, 잡곡과 의복을 배급받아 의식주를 해결했던 1947년, 그해 4월 나운동에 80명 수용 규모의 군산애육원이 개원한다. 5월에는 국립조선해양대학이 인천에서 신영동(째보선창 부근)으로 이전한다. 9월에는 사설학원 군산동지숙(群山同志塾: 이듬해 군산대학관으로 개편)이 설립된다. 10월 15일에는 <群山新聞(군산신문)>이 창간된다.
▲ 1948년 3월 7일 치 <群山新聞(군산신문)> 광고 |
ⓒ 조종안 |
그 시기(1948년 3월~9월) <군산신문>에 실린 병의원은 중앙로 1가 '복민의원(福民醫院)', 장미동 경신소아과의원(敬信小兒科醫院), 미원동 영생의원(永生醫院), 명산동 구암병원(龜岩病院), 평화동 평화의원(平和醫院), 신창동 송이비인후과의원(宋耳鼻咽喉科醫院) 등. 군산의사회, 군산치과의사회, 군산도립의원 등은 정부수립 축하 광고를 실어 눈길을 끌었다.
그중 '복민의원'은 입원실 8개와 안채가 딸린 2층 목조건물로, 일제강점기 일본인 의사가 운영하던 병원이었다. 광복 후 군산에 정착한 옥풍빈(玉豊彬) 원장이 미 군정청 군산지구 사령부 군정관 로저 백(Roser Beg) 대위 알선으로 1946년 7월 1일 개원한 것으로 기록에 나타난다. 위치는 군산부 중앙로 부청 앞(현 중앙로 1가 구 시청 앞)이다.
전언에 따르면 병원과 안집 건물은 약간 경사진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향나무 등이 심어진 일본식 정원도 있었다. 옥인영(1946년생, 옥풍빈 원장 장남) 가톨릭의대 명예교수는 "아버지는 군산에서 6년쯤 병원을 운영하다 부산으로 이사하셨다"며 "군산 해양대학교 학생들이 새카만 인디언 복장 차림으로 가장행렬 하던 모습이 어렸을 때 기억으로 남아있다"고 덧붙였다.
▲ 복민의원 광고(왼쪽)와 옥풍빈 원장 의사면허증(오른쪽). |
ⓒ 조종안 |
복민의원 광고는 원장이 의학박사임을 내세우며, 내과, 소아과, 늑막폐장내과(肋膜肺臟肺腸內科)임을 소개하고 있다. 특히 '입원하면 편한 생활을 누릴 수 있음(入院隨意: 번역기 참고)'을 홍보하고 있어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 시절은 가족이 병원에 입원하면 병실이나 마당에 풍로(곤로) 켜놓고 밥을 해먹었을 정도로 시설이 열악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옥풍빈1899~1971) 원장은 평안남도 중화군(지금의 평양) 출신으로 알려진다. 명문가의 외아들로 태어난 그는 1919년 경성의전 졸업하고, 잠시 개업했다가 1931년 3월 경성제대 대삼원(大杉原) 약리학교실과 암정전(岩井田) 내과 교실에서 연구를 거듭, 1935년 경도제국대학에서 박사학위 받는다. 당시 옥 원장은 <염산(鹽酸), 몰핀(모르핀) 과혈당(過血糖)의 전귀(轉歸)에 관하야>라는 논문과 부논문 6편을 제출하여 통과된 것으로 전해진다.
의학박사 학위 취득 등 경력이 화려했던 옥풍빈 원장, 당시 그는 '죽어가는 사람도 살릴 만큼 의술이 뛰어난 의사'로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지역 의료계에서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그의 아내 이상운(李祥云: 1917년생 중국인)은 산부인과 의사였으나 군정청이 중국 의사면허증을 인정해 주지 않아 남편을 돕기만 했단다. 환자 진료는 못 하고 간호사 역할만 했던 것.
▲ 베이징 병원 정원에서 옥풍빈, 이상운 부부와 중국 간호사들(이상운 여사 자서전 표지) |
ⓒ 조종안 |
지루한 항해 끝에 부산항에 정박했으나 콜레라 창궐로 하선조차 못 하였다. 스피커에서 군산으로 회항한다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선실은 아비규환이었고, 옥 원장은 아편중독자 3~4명에게 폭행을 당한다. 진통제 놔달라는 요구에 불응하자 폭행을 가했던 것. 군산항 정박 후에도 몸을 가누지 못하자 군정관이 도립병원에 입원시켰고, 20여 일 후 퇴원하게 된다. 이후 고향(평양)에 가려 했으나 삼팔선이 그어져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절박했던 시기, 부청(시청) 앞 도로 건너편에 일본인이 운영하던 병원이 있는데 그곳에 개원하면 어떻겠느냐는 군정청 대위 제안은 행운이자 경이로운 사건이었다. 다음날 개원 허락 서류를 넘겨받고 개원하게 된다. '군산의원', '지성의원' 등의 간판도 후보로 올랐으나 '주민 복지를 위한 병원'이라는 뜻으로 '복민의원'으로 정했단다.
"국적차별로 인한 분노와 절망, 믿음 하나로 견뎌내"
▲ 인터뷰하는 옥인영 가톨릭의대 명예교수(2023년 5월) |
ⓒ 조종안 |
"전쟁이 터지자, 아버지는 친구와 부산으로 먼저 떠나고 어머니와 동생, 나는 북한군에게 끌려갔지요. 어찌나 두렵고 무서웠는지, 어깨에 따발총 걸친 북한군을 따라가던 기억이 생생한데요. 그때 북한군(중공군) 사령관이 마침 중국인이었죠. 어머니 국적을 확인한 사령관이 '중국 사람이, 그것도 여의사가 왜 여기서 고생하느냐'며 부산까지 통행증 끊어줘 겨우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아마 어머니가 중국인 아니었으면 우리는 그때 죽었을 겁니다."
옥인영 교수는 "어머니는 중국 의사면허를 인정받지 못한 데다, 부모·형제와 연락마저 끊겨 마음고생을 많이 하셨다. 그렇게 만리타국에서 고향을 그리다 1980년대 중반 미국에 사는 딸(옥 교수 여동생) 도움으로 중국을 처음 다녀오셨다. 어머니는 국적 차별로 인한 절망과 분노, 고충 등을 믿음(신앙심) 하나로 견뎌내셨다"라며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참고문헌
<군산시사>(2000), 이상운 자서전 <어머니의 노래>(2011년 이유진 지음), <동아일보>, <조선일보>(1920~1930년대), <群山新聞(군산신문)>(1947~1948),
옥인영 가톨릭의대 명예교수(옥풍빈 원장 아들)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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