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석운 칼럼] 제2부속실을 복원한다고, 이제 와서?
선진국 중 미국이 유일
미국의 퍼스트레이디들도
대부분 ‘조용한 내조’ 머물러
김건희 여사 위한 제2부속실
복원 전에 검찰처분 지켜봐야
대국민 사과와 해명 후에
특별감찰관도 함께 임명하길
미국 백악관 동관(이스트 윙)에 퍼스트레이디 전용 사무실이 생긴 건 지미 카터 대통령 시절이다. 카터 대통령의 부인 로잘린 여사는 자신을 보좌하는 비서실장을 임명하고 산하에 언론 담당 등 4개 팀을 뒀다. 그녀는 대통령에게 정치적 조언을 한다는 명분으로 국무회의도 참석했다. 대통령의 인터뷰를 꼼꼼히 챙기고 연설문 작성에도 관여했다. 대통령의 개인 대표 자격으로 남미 순방을 다녀오기도 했다.
로잘린 여사의 행보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많았으나 카터 대통령은 ‘다른 사람들의 비판은 무시하라’며 아내를 감쌌다고 한다. 로잘린 여사는 이란에서 발생한 미국인 인질 사건이 남편의 재선에 걸림돌이 될 기미가 보이자 CBS 방송에 출연해 행정부의 인질 석방 노력을 널리 알리기도 했다. 부인의 헌신적인 참모 역할에도 카터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낮은 지지율을 벗어나지 못했고 재선에도 실패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의 부인 힐러리 여사의 영향력은 로잘린 여사를 능가했다. 힐러리 여사는 의료보험개혁위원장이라는 공직을 맡으면서 정부 정책에 깊숙이 관여했다. 남편이 퇴임한 뒤에는 상원의원과 국무장관을 거쳐 민주당 대선 후보직까지 거머쥐었다. 다만 빌 클린턴은 유세 때마다 “나를 찍으면 여러분은 ‘1+1’을 얻을 것”이라고 말해 아내의 중용을 유권자들에게 예고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퍼스트레이디들은 21세기에도 전통적인 내조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부인 미셸 여사는 남편보다 먼저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했고, 상원의원 시절의 오바마보다 더 많은 연봉을 받을 정도로 변호사로서 입지를 다졌지만 백악관 입성 후 정치적 목소리를 낸 적이 없었다. 어린이 비만 퇴치 캠페인을 벌이면서도 정치적 구설수에 오른 적이 없었다. 뛰어난 언변과 소탈한 성격, 품위를 잃지 않은 행동으로 여전히 대중적 인기가 높다. 바이든 대통령 대신 트럼프를 꺾을 적임자로 꼽혔지만 끝내 정치에 뛰어들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 재임 중 부인 멜라니아 여사는 초등학생 막내아들 배런을 돌보기 위해 남편의 취임 초 5개월 동안 뉴욕에 머물 정도로 백악관과 거리를 두는 태도를 보였다. 트럼프의 딸 이방카가 선임보좌관의 직책으로 백악관에서 활약했지만 멜라니아 여사는 ‘은둔형’으로 일관했다. 바이든 대통령의 부인 질 여사는 남편 취임 후에도 노던 버지니아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했다.
다른 선진국에서 퍼스트레이디를 보좌하는 기구를 둔 사례를 찾기는 어렵다. 영국과 독일, 일본에는 총리의 배우자를 위한 비서실을 두지 않고 있다. 프랑스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은 배우자의 법률적 지위를 공식화하려다가 포기했다. 선출되지 않은 배우자에게 공식 지위와 국가 예산을 배정하는 것에 대한 국민적 반대가 컸기 때문이다.
윤석열 대통령의 부인 김건희 여사를 보좌하는 ‘제2부속실’ 복원을 놓고 갑론을박이 끊이지 않는다. 대통령실은 이달 중 제2부속실을 복원하겠다고 밝혔는데 조금 뜬금없다. 복원 자체에 반대하지는 않지만 ‘굳이 이 시기에?’라는 생각에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지난해 김 여사의 명품백 논란이 불거진 이후 여야를 막론하고 ‘제2부속실을 복원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많았지만 용산은 이런 목소리를 외면했다.
제2부속실은 윤 대통령의 대선 공약으로 폐지됐다. 윤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대통령 배우자에게 법 바깥의 지위를 관행화시키는 것이 맞지 않는다”며 “영부인이라는 말도 쓰지 말자”고 했다. 그렇다면 대선 공약을 번복하고 제2부속실을 복원해야 하는 이유를 윤 대통령이 직접 국민들에게 설명할 필요가 있다.
김 여사는 명품백 수수와 주가조작 관여 의혹으로 최근 검찰 조사를 받았다. 검찰은 아직 김 여사에게 어떤 처분을 할지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검찰의 처분을 지켜본 뒤 대국민 사과와 해명을 먼저 하는 게 올바른 수순이지 않을까. 만일 김 여사에 대한 보좌가 미흡한 것이 사태의 원인 중 하나였다는 판단이 내려지면 그때 제2부속실을 추진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제2부속실을 복원한다면 특별감찰관도 함께 임명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감시와 통제는 외면하고 특권과 특혜만 누리려는 시도로 받아들여지게 될 것이다.
전석운 논설위원 swchu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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