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 호빗과 훌리건의 민주주의

천지우 2024. 8. 7.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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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알은 다행히 빗나간 듯 보인다. 민주주의 시스템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공화당 내부에서 도널드 트럼프의 장악력이 시험대에 오르면서 이제 민주주의 운명에 대한 그동안의 많은 걱정은 내려놔도 될 것 같다."

"1992~2020년 동안 치러진 모든 대선에서 공화당은 2004년을 제외하고 보통선거(전국 득표)에서 패했다. 다시 말해 3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공화당이 더 많이 득표한 것은 '단 한 번'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공화당 대선 후보들은 그동안 '세 번'이나 대통령이 됐다." 같은 시기 공화당은 상원의원 선거에서 민주당보다 적은 표를 얻고도 상원에서 더 오래 과반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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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우 국제부장


“총알은 다행히 빗나간 듯 보인다. 민주주의 시스템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공화당 내부에서 도널드 트럼프의 장악력이 시험대에 오르면서 이제 민주주의 운명에 대한 그동안의 많은 걱정은 내려놔도 될 것 같다.”

민주주의 위기에 관한 필독서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를 쓴 미국 정치학자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의 새 책 서문 중 일부인데, 책이 집필된 지난해와 번역본이 출간된 올해 5월 사이 시간차가 몹시 크게 느껴진다. 여기서 총알은 트럼프 귀를 스치고 지나간 진짜 총알이 아니라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을 뜻한다. 진짜 총알이 빗나간 것은 맞지만 서문 속 총알은 아직 빗나가지 않았다. 트럼프는 공화당을 완벽하게 장악했다. 레비츠키와 지블랫은 잠시 내려놨던 걱정을 다시 끌어올렸을 것이 분명하다.

급격한 상황 변화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총을 맞고도 살아난 트럼프가 노쇠한 조 바이든을 손쉽게 꺾을 것처럼 보이더니 ‘대타’로 긴급 투입된 카멀라 해리스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트럼프 대세론을 위협하고 있다. 지난 4일 CNN은 “몇 달 동안 트럼프 주변 사람들은 트럼프가 절대 질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2주 만에 상황이 바뀌었다”고 전했다. 레비츠키와 지블랫의 신간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는 미국 헌법과 정치 제도에 대한 솔직하고 신랄한 비판이다. 저자들이 주장하는 바는 간명하다. 미국이 낡고 오래된 헌법·제도에 얽매여 있어 민주주의가 취약해졌다는 것이다. 미국 대선은 근소한 차이로 결정 나고 상원은 균등하게 분할돼 있는데, 이런 당파적 동등함은 실제로 유권자 분포가 동등해서가 아니라 문제 있는 제도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게 저자들의 주장이다.

“1992~2020년 동안 치러진 모든 대선에서 공화당은 2004년을 제외하고 보통선거(전국 득표)에서 패했다. 다시 말해 3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공화당이 더 많이 득표한 것은 ‘단 한 번’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공화당 대선 후보들은 그동안 ‘세 번’이나 대통령이 됐다.” 같은 시기 공화당은 상원의원 선거에서 민주당보다 적은 표를 얻고도 상원에서 더 오래 과반을 차지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유권자가 아닌 선거인단이 간접적인 방식으로 대통령을 선출하고, 상원이 ‘불평등한 주를 평등하게 대표’하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다. 공화당이 ‘전국 선거에서 다수를 확보하지 않고서도’ 권력을 차지할 수 있게 되면서 그들이 사회 변화에 적응해야 할 동기를 상실해버린 것도 문제다. 공화당은 지지 기반을 넓히려 노력할 필요가 없는 여건 속에서 트럼프식 반민주적 극단주의로 빠져들고만 있다.

다만 40%가 넘는 트럼프 지지층을 ‘소수’라고 하기엔 숫자가 너무 많지 않나 싶다. 또 실제로 이번 선거에서 트럼프가 더 많이 득표한다면 제도의 문제가 아닌 것이 돼버린다. 사람의 문제라는 얘기다. 정치철학자 제이슨 브레넌은 “대부분의 미국 시민과 유권자는 무지하고 비합리적이며 잘못된 정보를 가진 민족주의자들”이라며 “일반적으로 유권자들은 현재 대통령이 누구라는 것 이상은 잘 모른다”고 지적했다. 브레넌은 유권자를 정치에 무관심·무지한 호빗, 정치에 편향적으로 열광하는 훌리건, 지극히 이성적인 벌컨으로 분류했다. 많은 이들은 자신이 벌컨이라고 착각하겠지만 벌컨은 극히 드물다. 대부분은 호빗 또는 훌리건이거나 그 사이 어딘가에 속한다. 호빗과 훌리건의 민주주의 속에서 정치는 사람들을 갈라놓고 모욕하고 서로를 적으로 만든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민주주의는 참으로 어렵다.

천지우 국제부장 mogu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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