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현의 시시각각] ‘갈등 금메달’, 보수 vs 진보
‘갈등 공화국’ 한국에서 그 정도가 가장 심한 집단 갈등은 무엇일까. 다음 중 당신의 선택은? ①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 ②경영자와 노동자 ③주택 소유자와 비소유자 ④정규직과 비정규직 ⑤여성과 남성 ⑥고령자와 젊은이 ⑦진보와 보수 ⑧수도권과 지방 ⑨기존 주민과 이주민 ⑩대기업과 중소기업.
딱 하나를 고르기 어렵지만, 10개의 선택지 중 1위는 ⑦번이었다. 시민들은 ‘진보와 보수의 갈등’을 한국 사회의 가장 심각한 갈등으로 보는 것으로 조사됐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지난해 국민 3950명(19~75세)을 면접 조사해 최근 발간한 ‘사회 통합 실태 진단 및 대응방안’ 보고서에 담긴 내용이다. 2위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갈등, 3위는 경영자와 노동자의 노사 갈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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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수와 진보,집단 갈등 심각도 1위
10연패 여자 양궁처럼 ‘난공불락’
내 편 판단 맹종하는 악순환 위험
」
‘갈등 금메달’의 위세는 압도적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보수와 진보(또는 여당과 야당)의 갈등은 30년 넘게 1위를 지키고 있다. 1987년부터 수년 주기로 실시된 비슷한 조사에서 한국 사회 최악의 갈등으로 꼽혔다. 이번 조사에서는 10년 뒤 ‘더 심각해질 갈등’에서도 1위를 차지했다. 이쯤 되면 1988년 서울 올림픽부터 2024 파리 올림픽까지 10연패를 기록한 한국 여자 양궁 단체팀을 능가하는 ‘난공불락(難攻不落)’ 아닌가.
올림픽 승전보를 심기 불편해지는 조사 결과에 빗대는 게 어불성설인 걸 안다. 하지만 파리의 태극전사들이 전하는 메달 소식에 국민이 열광하는 와중에도 극한 갈등을 멈추지 못하는 여야 정치권에 혀를 내두르는 심정으로 불경(不敬)한 비유를 감행했다.
보고서가 분석한 갈등의 실상은 들여다볼수록 심각하다. 시민들의 답변은 공감을 넘어 노파심을 불러일으킨다. 정치 성향이 다른 친구 및 지인과는 “술자리를 함께할 의향이 없다”(응답자의 3분의 1)고 했다. 정치 성향이 다른 이와는 “연애 및 결혼할 의향이 없다”(응답자 10명 중 6명), “시민·사회단체 활동을 할 의향이 없다”(응답자 10명 중 7명)는 답변이 과반이다. 다른 진영의 사람에게 집단결벽증 같은 반감을 갖는 걸 당연하게 여긴다는 얘기다.
최근 정치권의 상황은 한국 사회 갈등의 ‘알파와 오메가’를 보여준다. 노란봉투법은 여당의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에도 아랑곳없이 예정대로 본회의를 통과했다. 방송 4법, 25만원 지원법도 여야의 갈등이 첨예하다. 윤석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면 클라이맥스로 치달을 것이다.
여야가 표출하는 목소리에선 타협의 신호는 포착되지 않는다. 방송의 지배구조를 개방·확대하는 방송법안에 여야 모두 “공영방송 장악 음모”라고 상대를 비난한다. 노란봉투법에 대해선 “불법 파업 조장법”(여)과 “노동삼권 보장법”(야)이라는 입장이 평행선을 달린다. 25만원 지원법은 “현금살포법”(여)인가, “민생회복법”(야)인가.
극단 갈등은 확대재생산을 거듭할 것이다. 정치 성향이 다른 친구와는 술자리조차 싫다는 사람이 33%가 넘고, 절반 넘는 이들이 공론의 장에 참여해 함께 고민하거나 상대편 의견에 귀 기울일 여유가 없다. 많은 이가 내 편의 생각을 내 판단으로 삼을 공산이 큰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판단력을 잃어가고 있다. 결정의 논리와 기준이 오로지 ‘내 편(便) 목소리’니, 판단(判斷)력이 아니라 ‘편단(便斷)력’으로 부르는 게 맞다. 대통령과 정부의 정책, 국회 입법은 물론 검찰 수사와 법원 판결도 내 편의 판단을 최우선에 두고 바라본다. 방송통신위원장을 근무 시작 하루 만에 탄핵하고도 야당은 덤덤하고, 대통령실은 그걸 북한 오물 풍선에 빗대 “오물 탄핵”이라 혹평하는 싸움이 반복된다.
갈등과 ‘편단’의 악순환에서 과연 벗어날 수 있을까. 문득 편(便)이라는 한자가 똥·오줌을 의미하는 ‘변(便)’으로도 쓰인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합리적인 시민사회의 판단을 도출해내지 못하고 내 편만 좇다가는 매우 지저분한 미래에 도달할 것이라는 복선 같아서다.
김승현 사회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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