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재판 지연은 국민의 헌법상 기본권 침해다

2024. 8. 7. 00:22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상직 대한변호사협회·IT블록체인위원장

헌법 제27조 3항에 ‘국민은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신속한 재판은 국민의 권리이자 국가의 의무다. 오랫동안 재판에 시달린 사람이라면 소송 비용 증가, 생업 중단, 사업 기회 박탈 등으로 큰 어려움을 호소한다. 정신적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가족까지 힘들어진다.

중소기업 A사는 밀린 대금을 받으려고 거래 업체를 상대로 소송을 냈는데 재판 지연으로 자금난을 겪었다. 고금리로 빚을 내야 했고, 신용등급 강등과 사업기회 축소로 파산 위기에 처했다. B씨는 세금이 부당해 소송을 냈지만, 재판이 늦춰지는 사이에 사망했다. 피고인 C는 재판 지연 때문에 구속 기간 만료로 석방됐다가 다시 범죄를 저질렀다. 재판 지연을 ‘또 다른 이름의 패소 판결’이라 부르는 이유다.

「 재판 지연에 따른 비용·고통 막대
법관 증원하고, 자존감 키워주고
재판에 ‘리걸 테크’ 적극 활용하길

‘사법 연감’에 따르면 2022년 민사 본안사건 중 처리 기간 2년을 초과한 1심 합의 사건은 전체 3만7595건 중 5926건이었다. 상고심 사건은 2만3924건 중 4515건이었다. 형사 공판사건 중 처리 기간 2년을 초과한 1심 합의 사건은 1만9800건 중 712건이었고, 상고심 합의 사건은 3531건 중 49건이었다.

2022년 대한변호사협회의 설문조사에 응답한 변호사의 약 90%가 최근 5년간 재판 지연을 경험했다. 법원은 누가 무엇을 하는 곳인가. 법관이 재판을 통해 정의를 실현하고 인권을 구제하는 최후의 보루다. 재판이 늦어지면 어떻게 되겠나. 재판 지연은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불신을 키울 뿐 아니라 국가의 권위와 위상을 위협한다.

법원이 영상재판 활성화, 감정제도 개선, 법원장의 재판 투입, 재판부 교체주기 연장 등 신속한 재판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 성과가 크지 않다. 복잡한 사실관계에 쟁점이 많고 어려운 사건이 증가하는 와중에 법관 부족과 고령화, 기일 미지정과 잦은 기일변경 등이 오랜 원인이다. 젊은 법관에겐 ‘워라밸’을 무시하고 헌법적 소명만을 강요할 수 없는 실정이다.

1월 19일 대법원 법원행정처는 재판장의 최소 사무분담 기간 연장과 법원장의 법정재판 업무 담당 원칙에 관한 ‘법관 등의 사무분담 및 사건배당에 관한 예규’ 개정안을 행정예고했다. 뉴스1


그 외에도 법률 정보 대중화와 권리 의식이 높아지면서 당사자가 납득하는 재판 절차 진행이 중요해졌다. 판사들은 놓치는 주장이나 증거가 없는지 절차에 신중을 다해 살핀다. 판결문의 이해가 쉽도록 다듬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그러나 어떤 이유도 재판 지연의 변명이 될 수는 없다. 신속한 재판의 부재는 당사자에 대한 직접 피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건을 거리로 끌고 나가 정치적 사건으로 만들기도 한다. 불신에 더해 사회적 갈등과 분쟁을 키우고 진실과 정의를 왜곡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법과 양심에 따르면서 신속하게 재판하려면 법관의 자존감이 높아야 한다. 탁월한 실력에 투철한 사명감을 갖춘 법관이 많아야 한다. 21대 국회 임기만료로 폐기된 법관 증원을 위한 입법을 22대 국회가 다시 서둘러야 한다.

사법 시스템 총량을 확대하는 것만으로 신속한 재판이 당연히 담보되지는 않는다. 사법 시스템 자체를 정비해야 한다. 정당한 이유 없는 재판지연에 대해 경고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면 어떨까. 많은 노력에도 재판이 지연되고 당사자에게 피해가 생기면 보상해야 한다.

2021년 9월 29일 법무부는 정보통신 기술과 법률 서비스를 결합한 리걸테크(Legal-Tech) 산업의 원활한 정착을 위해 '리걸테크 태스크포스(TF)'의 출범 소식을 알렸다. 법무부는 리걸테크 TF 발족식을 열고 1차 회의를 통해 전반적인 TF 운영 방향과 계획을 논의했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유사 판례 추천 등 사건 검토에 인공지능(AI) 등 ‘리걸 테크(Legal tech)’를 이용하면 좋겠다. 민사재판에는 변론 준비기일 의무화를 도입하는 것도 생각해보자. 서면 제출 일정, 증인과 서증 등 입증 순서와 시간 계획을 미리 정하면서 재판이 시작된다. 영미법의 디스커버리 제도를 도입해 미리 증거를 서로 공개하고 쟁점을 정리하는 과정을 두는 것도 괜찮겠다.

형사재판은 피고인 신병과 피해자 인생이 걸린 만큼 신속한 재판이 매우 중요하다. 파급효과가 크고 관련 당사자가 많은 사건일수록 갈등의 사회화를 막기 위해 재판을 서둘러야 한다. 구속 기간 만료로 석방돼 또 다른 범죄를 저지르도록 하면 안 된다.

정당한 사유가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재판부에 재판 지연을 경고하고 구속 기간 안에 판결을 의무화하는 조치가 필요하다. 만성적 재판지연은 민주주의 마지노선인 사법부를 무너뜨리고 국가존립을 위협한다. 신속한 재판만이 국민의 정신적·경제적 피해를 줄이고 자유와 권리를 보장한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상직 대한변호사협회·IT블록체인위원장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