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태준의 마음 읽기] 여름날의 세 가지 장면
무더운 여름이 지나가고 있다. 요 며칠 내 손에는 책이 한 권 쥐어져 있다.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라는 제목의 책이다. 동네 서점에 가서 책을 사서 읽고 있다.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아주 우연한 일 때문이었다. 어느 날 한 가게에 들렀는데 그 집 주인이 이 책을 막 읽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연세가 예순 중반쯤으로 보이는 주인은 손님을 맞이하는 중간 중간에 잠깐씩 여유가 생길 때 읽으려고, 내 짐작엔, 집에 있던 책을 갖고 온 듯했다. 표지나 책의 색이 바랜, 낡은 책이었는데, 주인은 책의 첫 페이지를 펼쳐 그 한가운데를 오른손 손바닥으로 꾹 눌러놓고는 읽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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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권의 책 완독하는 시간 가져
바닷가 아이들은 자연을 직감해
나무 아래 비 피하는 초록 여름
」
나는 가게 주인이 책을 펼치는 순간의 그 설레는 얼굴 표정을 지나는 결에 잠깐 보았는데 그 모습이 너무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조금은 느닷없이 동네 서점에 들러 주인이 읽기 시작한 책인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를 나도 읽기 시작했다. 등받이 의자에 앉아서 책을 읽거나 혹은 방에 반듯이 누워 책을 두 팔로 높이 들어서 읽는 시간이 신선한 기쁨을 주었다.
무더운 여름을 의미 있게 보내는 방법 가운데 하나로 책을 한 권 한권씩 완독하는 것도 권할 만한 일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고 보니 작년엔가 한 시인을 만났을 때 여름 내내 대하소설 ‘화산도’를 읽었다는 얘기를 들었던 기억도 났다. 어쨌든 나는 이 무더운 여름이 다 가기 전에 몇 차례 더 책을 사러 동네 서점에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그 가게 주인이 또 어떤 책을 읽고 있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요즘에 흥미롭게 본 것 가운데 또 하나는 여름 바닷가 풍경이다. 어딘가 오갈 때 일부러 해안도로를 이용해서 다니고 있는데, 그럴 때 대체로 예닐곱 명씩 무리를 지어 걸어가는 아이들을 여기저기의 동네에서 만나게 된다. 그 아이들은 웃통을 벗은 채로 서로 어울려 왁자지껄 아주 유쾌하기만 하다. 팔이며 등이 땡볕에 까맣게 탔다. 그 아이들은 포구에서 다이빙과 수영을 즐긴다. 바다가 전부 자신들의 소유인 듯 행복해보인다.
소설가 이태준은 우리 인간은 자연이라는 신성한 존재 앞에 ‘경건한 직감’이 있을 뿐이라고 썼다. 이태준은 “자연은 왜 존재해 있나? 모른다. 그것은 영원한 신비다. 자연은 왜 아름다운가? 모른다. 그것도 영원한 불가사의다. 자연은 왜 말이 없는가? 그것도 모른다. 그것도 영원한 그의 침묵, 그의 성격이다. 우리는 자연의 모든 것을 모른다. 우리는 영원히 그의 신원도, 이력도 캐어낼 수 없을 것이다”라고 적었다. 그러면서 자연을 고완품(古玩品) 보듯이 대하지 말고 생명의 덩어리인 자연에 대해 솔직한 감각을 느껴보라고 했다. 이러할진대 바닷가의 그 아이들이야말로 바다에 뛰어들고 바다의 파도를 타고 바다의 수심을 재면서 바다를 직감하고 또 바다를 솔직하게 감각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었다.
이태준은 바다라는 자연에 대해 표현하길 “우리의 육안이 가장 먼 데를 감각하는 데도 바다다. 구름은 뭉게뭉게 이상향의 성곽처럼 피어오르고 물결은 번질번질 살찐 말처럼 달리는” 곳이라고도 썼다.
시를 짓는 사람으로 살고 있으니 이 무더운 여름에도 시를 읽는 일은 게을리할 수 없는 일이다. 시인 김용택 선생의 신작 시집을 읽고 있다. 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진메 마을과 진메 사람들을 다룬, 선생의 표현대로라면 “자연이 하는 말을 알아들으며 같이 먹고 일하면서 노는, 마을 사람들의 일상이 일러주는 말”을 적은 시편을 읽고 있다.
시집에 실려 있는 시 ‘소나기’는 이러하다. “우골 골짜기 비 묻어온다./ 뛰어라./ 장독 덮어라./ 빨래 걷어라./ 보리 담아라./ 발에서 불이 나도/ 집에 닿기 전에/ 동네 다 젖는다.” 소나기가 오는 때의 동네 풍경을 시에 담고 있다. 골짜기에서 몰려오는 소나기가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하면 동네는 순식간에 소란에 휩싸인다. 열어놓거나 널어놓은 것이 소나기에 젖지 않도록 애써보지만, 소나기가 쏟아지는 속도를 감당할 재간은 없다.
내게도 올해 여름의 소나기는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소나기를 만나 나무 아래로 뛰어들어가 비를 피한 적이 여러 번 있는데, 이 일은 어렸을 때 이후로 참 오랜만에 다시 경험했다. 물론 나무 아래로 들어가더라도 비를 다 피할 수는 없지만, 그 잠깐의 시간은 내게 이른바 초록의 자연을 온몸으로 느끼게 했다. 약해지는 빗줄기의 기세를 바라보면서 나의 엉킨 숨을 천천히 풀기도 했다. 소나기가 지나가는 동안 가만히 기다리는 시간을 내게 선물했다.
더워도 너무 무더운 여름을 살고 있다. 금방 땀에 젖고 금방 지치지만, 산뜻한 순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닐 테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누구에게나 올해 여름을 각별하게 하는 세 가지의 장면이 떠오를 것이다.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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