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위원 울린 '악몽 같은 경험'... 살아남은 두 사람의 이야기
두 명의 시설 수용 피해생존자가 국회 기자회견장에 등장했다. 폭행과 감금 등 인권침해가 만연했던 두 수용시설에서 살아남은 손석주(62)와 박경인(30)이 서로의 옆을 지켰다. 두 사람이 비행기를 타고 유엔 심의가 있는 스위스에 도착해 시설수용 피해를 증언하고, 얼마 뒤 나온 유엔 최종견해 이행을 한국 정부에 촉구하기까지의 한 달을 기사로 재구성했다. 지금도 정부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전한다. <기자말>
[복건우, 남소연 기자]
▲ 발달장애인 당사자인 피플퍼스트 서울센터 박경인 활동가(오른쪽)가 3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열린 UN고문방지협약 최종 견해 환영 기자회견에 참석하고 있다. 왼쪽이 손석주씨. |
ⓒ 남소연 |
지난 7월 31일 오전 국회 소통관이 국회의원과 활동가 수십 명으로 북적였다. 손석주(62)와 박경인(30)이 그들 사이에 나란히 섰다. 스무날 전(7월 10~11일) 유엔 고문방지위원회(스위스 제네바) 심의를 다녀와 한국 정부와 국회에 직접 목소리를 내는 자리였다. '수용자의 존엄성은 모두의 존엄성(Inmate's Dignity Is Our Dignity)', '국제법을 준수하라(Respect International Law)'고 적힌 영어 팻말이 곳곳에 눈에 띄었다. 기자회견이 시작되자 두 사람이 차례로 자기소개를 했다.
"영화숙·재생원 피해자를 대표해 제네바에 다녀온 손석주입니다."
"탈시설 당사자로 제네바에 다녀온 박경인입니다."
부산 집단수용시설인 영화숙·재생원 피해생존자협의회 대표 손석주와 전국탈시설장애인연대 공동대표 박경인. 어린 시절 부랑인 시설에 강제 수용돼 폭력과 감금에 방치된 손석주. 태어날 때부터 장애인 시설에 갇혀 지내다 20여 년 만에 탈시설한 발달장애인 박경인. '시설'에서 살아남아 다시는 시설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시설수용 피해생존자다.
두 사람이 시설에서 겪었던 고통과 시설에서 나와서 살아온 각자의 이야기가 유엔을 거쳐 국회에 도착했다. 다만 기자회견에서의 증언은 시간 관계상 5분 만에 끝났다. 제네바에서 보낸 일주일, 나아가 시설에 갇혀 살아야 했던 두 세월을 압축해 드러내긴 쉽지 않았다.
기자회견이 끝난 당일 두 사람으로부터 '제네바 이야기'를 들었다.
유엔 고문방지위원회는 유엔 고문방지협약 이행 상황을 감시하고 평가하는 기구다. 각 협약 체결국에서 제출하는 관련 국가보고서를 4년마다 심의한다. 1995년 협약에 가입한 한국에 대한 '제6차 한국 고문방지협약 국가보고서 심의'는 7월 10일부터 11일까지 이틀간 제네바에서 열렸다. 2017년에 이어 7년 만에 열린 이번 심의에서 그동안 한국 정부가 외면해 온 과거사와 시설수용 문제가 처음으로 수면 위로 올라왔다.
▲ 전국탈시설장애인연대 공동대표 박경인씨(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한국장애포럼(KDF) 등 동료들과 함께 지난 7월 6일 스위스 제네바로 출국하고 있다. |
ⓒ 피플퍼스트서울센터 |
저녁 6시가 되자 몸이 하늘을 날아 올랐다. 처음 타는 비행기였고 처음 가보는 스위스였다. 석주는 설렘보다 부담이 컸다. 나흘 뒤(7월 10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리는 유엔 고문방지위원회(제6차 한국 국가보고서 심의)를 앞두고 증언할 자신의 시설수용 경험을 정리하고 준비하느라 비행기를 탈 때부터 긴장했다.
'60년 만에 처음 나가는 해외인데 어떻게 해야 내 얘기를 잘 전달할 수 있을까.'
18시간 만에 도착한 제네바공항에서 석주는 속으로 다짐했다. 수십 년 전 수용시설에서 당한 폭력과 지금껏 해소되지 않는 아픔과 정부를 상대로 요구하는 바를 있는 그대로 알리겠다고 말이다. 스위스로 함께 날아간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활동가들이 그를 북돋웠다.
경인도 같은 비행기를 타고 생애 처음으로 스위스에 도착했다.
장애인 거주시설에서 나와 지역사회에 자립한 지 7년째였다. 탈시설 장애인인 경인은 발달장애인 인권단체 피플퍼스트서울센터에서 동료지원가로 일하고 있다. 다른 동료 장애인들이 지역사회에서 일자리를 가질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한다. 밤늦게 한국을 출발해 아침 일찍 도착한 제네바에서 경인은 걱정되고 떨렸다.
'그래도 멀리까지 왔으니 열심히 얘기해야지.'
▲ 부산 집단수용시설인 영화숙·재생원 피해생존자협의회 대표 손석주씨가 지난 7월 8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행사 '시설수용, 한국의 끝나지 않은 고문: 사과받지 못한 생존자들의 목소리'에서 시설 수용 당시 경험을 증언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
ⓒ 한국시민사회모임 |
"1940년부터 대한민국 시설에 수용된 사람들을 대표해..."
석주가 유엔 위원들에게 전할 이야기는 수십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1년 아홉 살이었던 그는 부산역에서 신문을 팔다 한 남성에게 붙잡혀 부산 재생원에 끌려갔다. 두세 달 동안 구타와 폭행에 시달리다 재생원과 담 하나를 사이에 둔 영화숙으로 옮겨가 열 달을 갇혀 지냈다. 열여섯 살까지 '시설 생활'을 벗어나지 못했다. 전국을 떠돌며 대전아동보호소, 서울시립아동보호소, 대구희망원 등 시설 7곳을 무수히 드나들었다.
영화숙·재생원은 부산시로부터 업무위탁을 받아 운영된 부산 지역의 대표적인 부랑아 수용시설이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10대 아동부터 60대 노인까지, 50명 넘는 인원이 5~10평 남짓한 방 안에서 함께 생활했다고 한다. 정확한 폐쇄 시기는 파악되지 않았으나, 1975년부터 1987년까지 국가폭력이 자행된 부산 형제복지원의 전신으로 불린다.
▲ 부산 집단수용시설인 영화숙·재생원 피해생존자협의회 대표 손석주씨가 지난 7월 31일 국회 기자회견 이후 여의도 인근 카페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영화숙·재생원 당시 촬영된 원생들의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
ⓒ 복건우 |
경인은 "빵살(0살)부터" 장애인 거주시설에 살았다. 열네 살 때 대규모 시설에서 소규모 그룹홈(공동생활가정)으로 보내져 직원들로부터 협박과 학대를 당했다. 처음 시설에 들어갈 때도, 시설을 옮겨 다닐 때도 경인에게 입소 의사를 물어보는 사람은 없었다. 한 번도 "시설에 원해서 들어간 적이 없었"다.
이제 지역사회에서 자립해 살아가는 경인에게 시설은 "인간의 존엄을 해치는 폭력"으로 기억된다. 경인은 "관리 대상으로만 존재하는 이들에게 남는 건 오로지 생존뿐"이라며 "시설에서 같이 살던 장애인이 죽었을 때 직원들이 슬퍼하기보다 힘들고 귀찮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죽음조차 존엄할 수 없는 그곳에 여전히 남아 있는 장애인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몹시 괴롭다"고 했다.
▲ 전국탈시설장애인연대 공동대표 박경인씨는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등 26개 인권시민단체로 구성된 '제6차 유엔 고문방지협약 심의 대응을 위한 한국시민사회모임'과 함께 스위스 제네바를 찾아 지난 7월 9일 유엔 고문방지위원회 대한민국 담당 국가보고관인 아나 라쿠(Ana Racu) 위원과 피터 베델 케싱(Peter Vedel Kessing) 위원을 만나 면담을 가졌다. |
ⓒ 한국시민사회모임 |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유엔 위원들은 눈물을 보였다.
석주와 경인은 심의 하루 전날 한국 담당 국가보고관들을 만났다. 아나 라쿠(Ana Racu)·피터 베델 케싱(Peter Vedel Kessing) 위원이었다. 이들과 비공개 면담에서 두 사람은 "시설에서의 삶은 매일매일 무너지는 자신을 견디는 일이며 이는 사람을 무너뜨리는 폭력"(경인)이라고, "내 삶이 끝나기 전 나와 동료 피해자들이 국가로부터 피해자로 인정받고 마땅한 사과와 보상을 받고 싶다"(석주)고 호소했다.
면담 도중 석주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시설에서 당한 고통의 기억들 때문이었다. 두 위원도 안경을 벗고 눈물을 닦으며 두 사람의 어깨를 토닥였다. 네 사람 사이에 별 다른 대화가 오가진 않았다. 다만 "두 위원이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 공감해 줬다"(석주)고, "우리가 말하는 게 맞다고 얘기해 주는 듯했다"(경인)고 느꼈다.
▲ 부산 집단수용시설인 영화숙·재생원 피해생존자협의회 대표 손석주씨(오른쪽)는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등 26개 인권시민단체로 구성된 '제6차 유엔 고문방지협약 심의 대응을 위한 한국시민사회모임'과 함께 스위스 제네바를 찾아 지난 7월 9일 유엔 고문방지위원회 대한민국 담당 국가보고관인 아나 라쿠(Ana Racu) 위원과 피터 베델 케싱(Peter Vedel Kessing) 위원을 만나 면담을 가졌다. |
ⓒ 한국시민사회모임 |
돌아온 한국 정부의 답변은 형식적이었다.
유엔 고문방지위원회 '제6차 한국 국가보고서 심의' 2일 차. 우리나라 시설수용 피해자들에 대한 구제가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 국제인권기구로는 처음으로 나왔다. 전날 석주와 경인을 만났던 케싱 위원은 이날 "생존자들 상당수가 아동 시절부터 수년간 구금됐고 직원이나 관리자로부터 극심한 가혹행위를 당했다"며 "당사국(한국)은 시설수용 생존자들에게 필요한 재활과 구제를 받을 수 있게 하느냐"고 한국에 질문했다.
한국 정부는 "법과 원칙에 따라 상응하는 처벌이 이뤄지도록 하겠다"고 말하며 지난 2022년 나온 진실화해위원회의 형제복지원 진실규명 결정문을 낭독하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러나 제네바를 방문한 서채완 민변 공익인권변론센터 변호사는 통화에서 "형제복지원 피해자 중에는 진화위 결정을 못 받은 사람도 있고, 최소한의 배상이라도 받으려면 소송에서 정부를 이겨야 하는 상황"이라며 "정부가 스스로 이행하지 않고 있는 형제복지원 사건 결정문을 답변이라고 읽은 것은 그저 면피용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또 "(케싱 위원이 언급한) 피해자 구제란 과거사와 시설수용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고, 가해자에게 책임을 묻고, 피해자 회복을 위해 모든 조치를 다하는 것을 의미한다. 정부는 피해자들에게 공식적이고 진심 어린 사과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부산 집단수용시설인 영화숙·재생원 피해생존자협의회 대표 손석주씨(왼쪽)가 지난 7월 9일 유엔 고문방지위원회 NGO(비영리기구) 브리핑에서 자신의 시설 수용 당시 경험을 증언하고 있다. |
ⓒ 한국시민사회모임 |
석주와 경인이 한국행 비행기에 다시 몸을 실었다.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7월 마지막 날 국회로 향했다. 유엔에 함께 간 동료들이 두 사람 곁을 지켰다. 정치인들도 힘을 보탰다. 7월 31일 오전 11시, 스무 명 가까운 이들이 줄을 지어 국회 소통관 기자회견장으로 들어갔다. 발언대 앞에 선 석주와 경인이 '유엔 고문방지협약 심의 최종견해' 이행을 정부에 거듭 촉구했다. 두 사람이 한국 사회에 던진 이야기가 스위스 제네바를 거쳐 마침내 국회로 소환됐다.
▲ 서미화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비롯한 야당 의원들이 3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UN 고문방지협약 최종 견해 환영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 남소연 |
서 의원은 기자회견에서 "이번 유엔 최종견해는 기존 권고에 포함되지 않은 과거사 및 시설수용 피해자 구제에 대한 권리를 명시했다.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는 물론 정신보건시설, 사회복지시설, 보육시설을 비롯한 모든 폐쇄형 시설수용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과 배상 등 효과적인 구제를 보장할 것을 권고했다"며 "정부는 과거사 및 시설수용에 대한 국가 책임을 인정하고, 피해자에게 진정성 있는 사과와 실효성 있는 구제를 제공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손석주는 "제네바에서 유엔 고문방지위원 두 분을 만나 악몽 같은 제 경험을 전했다. 죽기 전 피해자로 인정받고 싶다고, 먼저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아이들을 기억해 달라고 했다"며 "우리 피해자들에겐 시간이 없다. 정부와 국회가 지금도 세상을 떠나고 있는 피해자들을 구제하는 데 최선의 노력을 다해주길 부탁드린다"고 전했다.
박경인은 시설에 갇혀 있는 수많은 동료들을 떠올렸다.
"우리가 살아왔던 과정들을, 우리가 했던 말들을 한국 사회가 기억했으면 한다. 우리가 당했던 피해와 고통뿐만 아니라 우리가 낸 용기를 기억했으면 한다. 우리와 같은 피해자가 없는 사회로 바뀌어 가면 좋겠다. 그게 바로 유엔 고문방지위원회가 말하는 추모의 의미일 것이다."
국회 기자회견을 끝으로 한 달 가까운 증언의 일정에 마침표를 찍은 석주와 경인이, 한국 정부의 답변을 다시 한 번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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