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로봇 '심멎' 로맨스, 美브로드웨이 간다…창작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

나원정 2024. 8. 6.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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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
올가을 브로드웨이 본공연 데뷔
‘위대한 개츠비’ ‘마리 퀴리’ 이어
뮤지컬 본고장 넘보는 한국 뮤지컬
버려진 헬퍼봇들의 설레이는 사랑
올해 5시즌째 중소극장 대표작 꼽혀
올가을 브로드웨이 데뷔를 앞둔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이 지난 6월 18일부터 9월 8일까지 서울 대학로 예스24스테이지에서 5번째 시즌 공연중이다. 사진은 배우 정욱진이 올리버(왼쪽), 홍지희가 클레어 역할을 맡은 장면이다. 사진 CJ ENM

“착한 우리 올리버/ 말 잘 듣는 올리버”라는 옛 주인 제임스의 칭찬이 세상 전부처럼 좋았던 가사도우미 ‘헬퍼봇5’ 올리버. 인간에 더 가깝게 업그레이드된 대신 내구성이 떨어진 ‘헬퍼봇6’ 클레어.
은퇴한 고물 로봇들의 아파트에서 “끝까지 끝은 아니”라며 애써 버텨온 클레어는 충전기가 고장난 날, 이웃의 올리버를 만나면서 낯선 감정에 눈 뜬다. 인간들의 전유물인 줄만 알았던, 사랑의 설렘 말이다.

지난 6월 다섯 번째 시즌 무대를 개막해 공연 중인 한국 창작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의 내용이다. 세 명의 배우가 그려낸 근미래 안드로이드 로봇들의 러브 스토리로 한국뮤지컬어워즈 6관왕(2018)을 차지하는 등 중소극장 창작 뮤지컬의 성공 신화로 자리매김한 이 뮤지컬이 올 가을 미국 브로드웨이에 상륙한다. 뉴욕 1000석 규모 대극장 ‘벨라스코씨어터’에서 10월 16일부터 프리뷰를 거쳐 11월 본 공연을 개막한다.


브로드웨이 상륙 잇따르는 K뮤지컬


지난 4월 미국 브로드웨이에 진출해 토니상 의상디자인상을 수상한 '위대한 개츠비', 지난 6~7월 영국 웨스트엔드에서 장기 공연한 '마리 퀴리'에 이어, 세계 뮤지컬 본고장에서 또 한번 한국 뮤지컬의 날개를 펴게 됐다.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에서 은퇴한 로봇들의 아파트에 혼자 살며 옛 주인 제임스가 남긴 LP 플레이어로 재즈음악을 듣고, 음악잡지를 받아보는 낙으로 살아가던 올리버(오른쪽)는 이웃의 클레어를 알게 되며 복잡한 감정에 눈뜬다. 사진 CJ ENM
특히 ‘어쩌면 해피엔딩’은 순수 창작 이야기로 해외 공연계에서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동명 영화 원작의 판타지 로맨스 ‘번지점프를 하다’, 일제강점기 조선 최초 테너의 탄생기를 그린 ‘일 테노레’ 등 창작 뮤지컬을 잇따라 성공시키며 ‘윌휴 콤비’ 팬덤을 확보해온 작곡가 윌 애런슨, 박천휴 작가가 재즈‧클래식을 녹여낸 어쿠스틱 사운드에 특유의 서정적 감성을 실어냈다.
영국 록밴드 ‘블러’ 멤버 데이먼 알반의 솔로곡 '에브리데이 로봇(Everyday Robots)'에서 모티브를 얻은 이 작품은 2015년 트라이아웃(시험 공연)부터 전회 매진을 기록했다. 이듬해 한국 초연과 함께 영어 대본을 완성해 2020년 미국 애틀랜타에서 영어 버전 트라이아웃을 올렸다. 영어 버전도 안드로이드 로봇이 일상화한 21세기 후반, 서울 외곽 고물 로봇들의 아파트가 배경이다.

AI로봇의 종이컵 전화·재즈LP·반닷불이 사랑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에서 “순간 온 세상이 고요해졌던 것 같아/내 심장 소리만 들렸던 것 같아” 하는 올리버의 노래에 클레어는 “심장도 없으면서!” 하고 로봇다운 추임새를 넣는다. 올리버의 주인 제임스를 찾아 제주도로 떠난 두 주인공이 인간 커플인 척하기 위해 첫 만남 순간을 꾸며내는 넘버 ‘My Favorite Love Story’다. 사진은 시즌5에서 배우 윤은오(왼쪽), 박진주 공연 모습이다. 사진 CJ ENM
한국판 공연을 기획‧제작한 CJ ENM에 따르면 다음달 8일까지 서울 대학로 예스24스테이지에서 공연하는 다섯 번째 시즌도 94.1%의 높은 유료 객석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다. 전 시즌을 함께한 정욱진‧홍지희를 비롯해 윤은오‧신재범‧박진주‧장민제가 올리버와 클레어 역에 각각 트리플 캐스팅됐다.
부품 단종으로 남은 수명이 정해진 로봇들의 애틋한 설렘이 사춘기 풋사랑 같다가도, 예고된 이별이란 점에서 치매 부부의 황혼 로맨스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피아노‧바이올린‧비올라‧첼로‧드럼으로 구성한 6인조 밴드의 선율에 맞춰 제임스‧재즈싱어‧모텔 주인 등 1인 다역을 맡는 멀티맨 이시안‧최호중도 이런 사랑의 감흥을 거든다. “대리 설렘을 느꼈다” “인생의 매 시기마다 보고 싶은 작품” 등 인터파크 예매관객 평점이 9.9점(10점 만점)에 달한다.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엔 낡고 오래된 추억의 소품이 가득하다. 낯가림이 심한 올리버가 클레어와 처음 소통을 시도하는 종이컵 전화기가 한 예다. 사진 CJ ENM
올리버가 제임스에게 물려받은 재즈 LP 음반 취향, 클레어가 좋아하는 제주도의 반딧불이, 추억의 종이컵 전화기 등 아날로그한 설정들이 사랑의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 초로의 사랑을 닮았지만, 나이를 먹지 않는 로봇들이 최첨단 근미래 풍경을 여행하는 SF적 상상이 신선하다.

박천휴 "암으로 동년배 친구 잃고 쓴 작품"


극본 및 작사를 맡은 박천휴 작가는 전화 인터뷰에서 “친한 친구가 암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을 계기로 '삶은 유한하고, 상실은 나이의 문제가 아니'란 생각을 하며 이 작품을 쓰게 됐다”면서 “이 작품 이후 한국에는 안드로이드 소재 공연이 늘었지만, 브로드웨이에선 아직 못 본 것 같다”고 말했다.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 작가 박천휴(오른쪽), 작곡가 윌 애런슨. 연합뉴스
그는 또 “예전에는 공연 스태프, 배우들에게 딱딱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AI(인공지능) 연기에 대해 설명해야 했는데, 요즘엔 (다들 AI에 익숙해진 덕분에) 그런 과정이 필요 없다”며 “로봇을 주인공으로 삼은 건 점점 시니컬해지는 사람들이 잊고 사는 단순하고 순수한 감정을 일깨우기 위해서”라고 덧붙였다.

미국판은 대극장…"문화차로 각색, 정서는 같아"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에서 올리버의 옛 주인 제임스를 찾아 제주도로 떠난 두 주인공. 망가진 데가 없어도 구식이라고 버림받는 헬퍼봇의 모습은 전자제품 교체 시기가 갈수록 빨라지는 요즘 세태에 십분 공감된다. 사진은 배우 신재범(왼쪽), 장민제 공연 모습. 사진 CJ ENM
브로드웨이 공연은 한국보다 스케일을 키운 대극장 규모다. 실화 토대 시대극 ‘퍼레이드’로 지난해 토니상 베스트 리바이벌 뮤지컬상을 받은 연출가 마이클 아덴과 ‘윌휴’ 콤비가 8년간 개발‧제작해왔다. 한국에선 멀티맨 배우 한 명이 맡은 역할들을 분리해 제임스 역할은 동양계 배우가 맡게 된다. 한국 공연에 없던 제임스의 아들, 클레어의 주인도 등장시켜 주인공들의 전사를 보강했다.
박 작가는 “현지 관객의 이해를 돕기 위한 각색을 가미했다. 한국어판에서 일상적 표현보다 미학성을 고려한 가사를 썼다면, 영어 가사는 라임이나 언어유희, 직접적인 설명이 도드라진다”면서 “메시지나 정서는 똑같이 유지하려고 애썼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어쩌면 해피엔딩’의 넘버는 조곤조곤 섬세하게 노래하는 게 특징인데, 뮤지컬 예술의 전달 방식이 다양하다는 걸 브로드웨이에 전할 수 있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美저널리스트 "한국말 모르는데 '어쩌면…' 나를 울려"


지난 6월 문화체육관광부‧예술경영지원센터가 주최한 ‘2024 K-뮤지컬 국제마켓’에 강연자로 참석한 미국의 공연 저널리스트 고든 콕스는 “한국어를 거의 모르지만 ‘어쩌면 해피엔딩’(한국판)을 보고 울었다”면서 “사랑에 빠진 젊은 로봇의 이야기라는 ‘하이 콘셉트’ 화제작이 될 수 있다. ‘위대한 개츠비’가 한국 공연 산업의 위상을 많이 올려놨는데, ‘어쩌면 해피엔딩’까지 성공하면 한국 작품, 아티스트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올가을 브로드웨이 데뷔를 앞둔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이 9월 8일까지 서울 대학로 예스24스테이지에서 5번째 시즌 공연에 이어 올 10월 브로드웨이에 데뷔한다. 사진 CJ E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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