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가지 말고...' 미군 붙잡으려 정부가 했던 끔찍한 일

김종성 2024. 8. 6.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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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시대별곡] 정권의 기지촌 확장 정책...여성들 성매매로 내몬 '국가폭력'

[김종성 기자]

 경기도 동두천시 외국인관광특구의 모습 (자료사진)
ⓒ 연합뉴스
 
1950년대 초중반에는 주말에 도쿄 여행을 다녀오는 주한미군 군인들이 많았다. 홍콩도 그들의 여행 코스 중 하나였다. 주한미군의 외국 휴가는 이들의 여행 중에 발생한 불상사와 함께 이따금 한국 언론에 보도됐다.

중복이 7월 28일이고 말복이 8월 17일인 1955년 이맘때였다. 미 24사단 군인 21명이 도쿄에 가서 삼복더위를 피하겠다며 8월 6일 오전에 트럭을 타고 김포공항으로 출발했다가 10시 30분에 한강 다리에서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틀 뒤 <동아일보> 3면 하단은 "이들은 주말여행차 일본으로 향발하기 위하여 전기(前記) 시간에 서울-김포공항 간에 소재한 교량을 통과 중 동(同) 추럭 운전수의 과실로 추럭이 교량 란간을 부시고 추락·발화하여 8명이 즉사"했다고 보도했다. 2명이 더 사망하고, 나머지는 부상을 입었다.

1956년에는 일본에 휴가 다녀온 미군 중사가 악기와 비단 등을 밀반입해 판매한 혐의로 강릉경찰서에 적발됐다가 미군 헌병대에 이첩됐다. 그해 10월 20일자 <조선일보> 3면 우중단은 "사무엘 중사는 지난 9월 초순경 휴가차 일본에 갔다 귀대할 때 하모니카와 비로드 등 미화로 5백 불에 해당하는 물품을 항공기 편으로 밀수입하여 한국인 상인에게 47만 5천 환에 매각"했다고 보도했다.

그해 5월 30일자 <조선일보> 1면 좌상단에 따르면, 1955년 11월에 가마니당 8천 환 정도이던 쌀값은 1956년 5월에 1만 8000환을 넘었다. 11월 27일자 <동아일보> 1면 좌상단을 보면 이 가격대가 연말까지 유지됐다. 사무엘 중사가 밀수로 번 돈은 쌀 25가마니 정도에 해당했다. 2024년 현재의 1가마니가 20만 원 이상이니, 사무엘의 부수입은 꽤 괜찮은 편이었다.

1957년에는 주한미군의 일본 여행이 일본뇌염을 전파시킬 수 있다는 우려를 낳았다. 한국 보건당국이 감염 우려를 이유로 주한미군의 여행 제한을 요청했으며 미 8군 대변인이 '주한미군에는 유행성 감기에 감염된 자가 아직 없다'고 발언했다는 AP통신 보도가 6월 6일자 <조선일보> 3면 중간에 실렸다. 그달 18일자 <동아일보> 3면 상단은 경기도 포천에서도 테일러중대를 중심으로 유행성 감기가 퍼지고 있다며 "테일러부대 군인이 일본을 자주 내왕함으로써 만연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이승만 정권의 '미군 묶어두기' 정책
 
 한국전쟁 당시 부산에 상륙한 미군. 부산시 서구 부민동의 임시수도기념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한국 정부가 일본뇌염을 이유로 주한미군의 일본행에 제동을 거는 장면은 이 시점에 한국 정부가 추진하고 있던 정책과 연관시켜 볼만한 사안이다. 이 시기의 이승만 정부는 주한미군의 근무 외 시간을 가급적 한국에 묶어두려 했다. 국민보건상 이유뿐만이 아니었다.

이승만 정부는 주한미군을 안보를 위한 수단뿐 아니라 돈벌이를 위한 수단으로도 바라봤다. 이들을 부대 밖으로 이끌어내 돈을 쓰게 하자는 것이 이승만 정권의 발상이었다.

5·16 쿠데타 1년 뒤에 교통부가 발간한 <한국 교통연감 1962>는 이승만 집권기와 이 시점의 한국 관광산업과 관련해 "주한UN군의 관광객화를 위한 입지적 호조건을 구비한 현실에 적응해야 할 것이 무엇보다도 앞선 과제"라고 평가했다. 잠재적 관광객인 주한미군을 대거 확보하고 있는 한국의 유리한 조건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 군사정권 초기뿐 아니라 이승만 집권기에도 국가적 과제였다는 언급이다.

그런데 위 신문 기사들에 나타나는 것처럼, 미군 군인들은 틈만 나면 한국 밖으로 휴가를 나갔다. 위 교통연감은 "종래 일본·홍콩 등지로 휴가를 즐기던 UN군"이라는 말로써 그들의 주된 여행지를 소개한다.

미군들이 일본 등을 선호한 것은 주한미군 당국이 한국의 관광 여건을 낮게 평가했기 때문이다. 2014년에 <한국사회학> 제48집 제1호에 실린 박정미 한양대 연구교수의 논문 '발전과 섹스 – 한국 정부의 성매매관광정책, 1955~1988년'은 한국관광협회의 <한국관광발전사>를 근거로 "미군 당국은 관광시설 미비와 보안 등의 이유로 한국에 미군을 위한 휴식과 오락시설의 설치를 보류했기 때문에, 미군 병사들은 주로 일본이나 홍콩으로 휴가여행을 떠났다"라고 설명한다.

이승만 정권은 한국전쟁 휴전 직후인 1950년대 중반부터 미군을 묶어두기 위한 적극적 행동에 나섰다. 정의기억연대 이사장인 이나영 중앙대 교수가 2007년에 <한국여성학> 제23권 제4호에 기고한 '기지촌의 공고화 과정에 관한 연구(1950~60)'는 "1950년대 초반 당시 주한미군들은 5일간의 휴가기간 중 일본으로 날아가 성매매업소를 전전하곤 하였다"고 한 뒤 이들을 사실상 국내 관광객으로 유치하기 위한 이승만 정권의 방침을 이렇게 설명한다.

"정부는 미군부대 주변의 댄스홀과 바 등을 내국인 출입금지구역으로 지정하고 미 헌병대에 구역통제권을 부여함으로써 미군이 한국 국민의 간섭을 받지 않는 안전한 곳에서 성적 위안을 받도록 배려하기 시작했다. 또한 포주들은 창녀들을 등록시키고 미군 지휘부와 직접 교섭하기 위하여 위안부자치대를 조직하였다."

일본뇌염을 옮겨올 수 있으니 미군의 일본 여행을 제한해달라는 이승만 정부의 요청은 이런 시기에 나왔다. 이승만 정권의 집요한 노력은 다음과 같은 결과로 이어졌다. 위 논문의 기술이다.

"1957년 이후 일련의 정부 정책으로 인해 양공주들의 구획화와 격리, 효율적 감시 체계가 가능해지고 성병 진료소가 미군기지 주변으로 집중되게 되면서 상대적으로 자국 병사들의 '안전'이 확보되었다고 판단한 미국 당국은 같은 해 미군의 외출과 외박을 허용한다."

"한국 정부는 미군의 일본행 성매매 수요를 보다 효과적으로 국내로 돌리기 위한 방안으로, 위안부들을 상대로 계몽 강연회를 열었다. 각 지역의 경찰 간부들이 직접 개입하여 조직하고 관리·실행하는 형태였는데, 주 내용은 성병 예방 및 미군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의 고양과 관련된 것이었다."

여성들 기지촌으로 내몰아... 이승만에게 책임 있다
 
 지난 2022년 9월 29일 국내 주둔 미군을 상대로 한 기지촌에서 성매매에 종사한 여성들에게 국가가 배상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2부는 이아무개씨 등이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정부가 원고들에게 각 300만원∼700만원씩 지급하라"고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이날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기지촌 성매매 여성들의 국가배상소송 상고심 선고 판결 기자회견에서 원고인 김아무개씨가 눈물을 닦고 있다.
ⓒ 연합뉴스
 
양공주·유엔마담·미군위안부 등으로 불린 사람들에 대한 한국 사회의 오랜 인식 중 하나는 이들이 가난을 못 이겨 그 길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이들의 절박한 처지와 이들을 찾는 미군의 상호관계를 토대로 기지촌 현상을 이해하는 인식이 한국 사회에 오랫동안 만연했다.

물론 본인이나 가족의 선택, 미군의 태도 역시 그런 작용을 했다. 그렇지만 경제성장과 조세 수입을 위해 자국민과 미군을 제도적·조직적으로 연결시킨 이승만 정권의 책임이 매우 크다는 점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

이승만 정부의 정책적 지원으로 인해 확산되고 공고해진 기지촌은 그 시절 미군부대 주변을 특징짓는 풍경이 됐고, 동일한 정책을 추진한 박정희 정권에 의해 공고해졌다. 위 논문은 "미군 당국의 이해관계와 결부된 한국 정부의 제도적·조직적 개입이 없었다면 기지촌의 형성은 불가능했다"고 평한다.

이승만 집권기의 기지촌 확장은 국가 공권력이 개입한 현상이라는 점에서 일제강점기의 위안부 강제동원과 유사한 측면을 띤다. 다른 점은, 일제강점기 위안부제도는 약소국들을 강대국 자본가들에게 종속시키기 위한 제국주의 세계침략의 수단인 데 비해, 이승만 시기의 기지촌 현상은 그런 측면을 띠지 않는다는 점이다.

국가권력 자신이 윤리적으로 옳지 않다고 규정한 산업 쪽으로 자국민 여성들을 정책적으로 내몬 일은 이승만 정권의 부조리와 자기모순을 보여준다. 도쿄로 가기 위해 김포공항을 찾던 미군들의 발길이 현저히 뜸해진 1950년대 중후반의 현상은 국가권력의 목적에 의해 그 시절 개인들의 삶이 어떻게 굴절됐는지를 잘 보여준다. 1950년대 기지촌 현상의 최대 책임자는 다름아닌 이승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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