덧붙이는 말

김삼웅 2024. 8. 6.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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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의 인물열전 - 면암 최익현 평전 31] 면암은 비판자의 생애였다

[김삼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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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암은 비판자의 생애였다. 절대권력자 대원군의 탄핵, 고종에게 계속해서 쏘아댄 불화살의 상소, 러일전쟁과 청일전쟁에 승리한 일제에 맞선 의병전쟁은 하나같이 계란으로 바위치는 격의 힘겨운 싸움이었다.

 
특히 70고령으로 의병전은 힘의 균형이 맞지 않는 전쟁이었다. 매천 황현은 이를 두고 "그는 군사훈련을 해보지 않은 데다가 나이도 많아 기발한 책략과 일정한 계산이 없었으며, 수백명의 오합지중이 아무 기율도 없이 유생의 종군한 사람들은 큰 관(冠)과 소매가 넓은 옷을 입고 다녀 흡사 과거시험을 보러 간 것 같았으며 총과 탄환이 무엇인줄도 모르고 있었고…" (주석 1)

 
이기고 진 것에는 상관없이 그 길이 바른 길이었기에 사대부로서, 선비로서 망설이지 않고 싸웠다. 선생은 승패와 이해타산은 계산에 두지 않았다. 그 길이 옳으냐 그르냐, 정도냐 사도냐가 선택의 기준일 뿐이었다.

 
일제의 면암에 대한 증오심은 극렬했다. 1907년 1월 대마도에서 숨지자 일본군의 조선주차군 사령부는 <전라도에서 봉기한 폭도토벌>에서 이렇게 썼다.

 
폭도의 우두머리 최익현은 지난날 참정(내각 총리대신에 상당한 관직) 또는 경기도관찰사 등을 지낸 관력을 가진, 유생 사이에 대단히 명망 높은 유학자로서, 수천의 제자를 거느리고 있다.

 
명치 38년(1905) 일·한 차관 계약 체결에 즈음하여 맹렬히 반대론을 주장하였고, 또 배일에 관한 상소문을 올렸으며, 경성(서울)에 유약소를 설치하고는 통문을 13도(전국)에 돌리어 심히 유생들을 선동했었기 때문에, 치안을 방해한 죄로 경성 시외로 추방된 열렬한 배일주의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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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은 39년(1906) 5월 전 낙안(현재 순천군과 합병된 순천의 약 3.5리 지점) 군수였던 정삼품 임병찬과 공모하여 민중석과 같은 목적 아래 서로 기미를 통한 후 도당 백 수십 명을 모아 6월 초순 전라북도 태안군에서 의병을 일으켜, 동월 8일 전라북도 순창과 전라남도 담양을 점령하였고, 이에 응한 자의 수는 약 450명에 이르렀다.

 
그리고는 전라남도 동복과 곡성 지방을 횡행하면서 군아를 습격하고 세금을 빼앗았고, 총기를 탈취하는가 하면 관헌에 구치된 자를 석방하는 등 횡포를 하였다.

 
폭도가 태인군에서 봉기하자 전주 경무고문 지부에서는 경찰관을 파견하여, 이들의 우두머리를 사로잡으려 했으나 그 목적을 이루지 못 하였다. 다시금 일·한 경찰과 일행 9명은 순창에 파견하여 이들을 쫓게 하였으나 오히려 폭도들에게 포위 당하는 지경에 빠졌다.

 
이에 폭도가 동복·곡성 방면에서 순창으로 온 때를 이용하여 전주·남원·광주의 세 방면에서 요로를 차단하고 순창을 포위한 결과, 교전 반나절 만에 폭도들을 드디어 굴복하고, 최와 임 두 우두머리 이하 전원이 항복하였다.

 
16일 우리 헌병은 최 이하 모두를 경성(서울)으로 압송했으며, 5월 4일 최익현을 감금 3년, 임병찬은 감금 2년에 처하였고, 그 밖의 자들도 각각 처벌하였다. 그리하여 최는 대마도에서 형이 집행되었는데, 40년(1907) 1월 귀양살이 하다가 병사했다. (주석 2)

 
그는 민족 구제의 급선무는 '시야를 넓혀 천하의 대세를 통찰하고 반드시 죽어야 할 원인을 알 뿐이라(在於察天下大勢) 지필사지고이기(知必死之故而己)'고 말하고 있다. 즉, 그는 '혹생지도(或生之道)'를 버리고 '필사지고(必死之故)'를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반드시 죽어야 하는 것을 알면 살 수 있는 길은 그 가운데 있다.' '지기필사 측생지도 급재기중(知基必死 側生之道 及在基中)'라고 강조하였다.

 
최익현이 의병 활동을 할 단계의 그의 사상은 이러한 구국의 도를 추구하였고, 이러한 그의 사상이 그로 하여금 항일의 총칼을 들게 하였던 것이다. (주석 3)

 
선비인 동시에 면암은 독립운동의 연원으로서 그 전도를 제시한 최고 원로이기도 하였다. 면암이 조선조 5백 년 역사와 전통이 자신을 배양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이 곧 우리의 고귀한 역사·문화의 적통을 승계한 상징적 인물임을 자부한 결과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일반 인민의 절대적 지지와 위망(威望)은 결코 사인(私人)이 아닌 역사적 인물로서의 면암을 향한 것이었다. 면암의 역사적 위상이 그러하였기에, 순국으로 귀결된 그의 항일전선 투신은 전 민족에게 장차 항일독립투쟁에 매진할 것을 선도하고 호소하는 역사의 한 장면이었다. (주석 4)

 
면암의 시에 <천하의 비수검을 한데 모아>가 있다.

 
천하의 비수검(匕首劍)을 한 데 모아 비를 매어

남만북적(南蠻北狄)을 다 쓸어버린 후에

그 쇠로 호미를 만들어 강상전(江上田)을 매리라. (주석 5)

 
지금까지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말씀 드립니다.

주석

1> 황현, 김준 역 <매천야록>, 제5권, 673쪽.

2> <전라도에서 봉기한 폭도>, 일제 조선주차군 사령부, <조선폭도 토벌지>, 1907.

3> 김의환, 앞의 책, 67쪽.

4> 박민영, 앞의 책, 220쪽.

5> 임중빈 편, <한말저항시집>, 41쪽, 정음사, 1979.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면암 최익현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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