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테이너 타고 망망대해 떠도는 만삭의 임산부 사연
[김성호 기자]
"스릴러는 역시 스페인이 잘 만들죠."
얼마 전 만난 어느 콘텐츠 제작사 대표의 말이다. 넷플릭스를 위시한 다국적 OTT(Over-the-top) 콘텐츠 플랫폼이 특별히 한국에서 찾는 콘텐츠가 있는가를 묻는 질문의 답변 가운데 이런 말이 나온 것이다. OTT 배급망을 타고 전 세계에서 제작된 작품이 다시 전 세계로 팔려나가는 지금, 특별히 한국이 어떤 장르에 경쟁력이 있는가를 따지는 건 글과 영상 등 모든 콘텐츠 제작자에게 중요한 일일 밖에 없다.
▲ 노웨어 포스터 |
ⓒ 넷플릭스 |
스릴러 강자 스페인이 내놓은 재난 스릴러
스릴러는 어느 나라에서도 인기가 높은 장르다. 그도 그럴 것이 한 편의 영화를 오락적으로 소비하는 것이 현대 영상 콘텐츠 시장의 주된 소비심리이기 때문일 테다. 스릴러는 러닝타임 동안 보는 이를 옥죄어 극적 긴장을 불어넣는 것이 핵심인 장르다. 극적 긴장을 유지하기 위해 희대의 살인마를 등장시키고 건물에 불을 지르며 비행기를 추락시키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 장르에서 미국 못지 않은 경쟁력을 확보한 나라가 하나 있으니, 첫머리에 언급한 스페인이 되겠다.
전통적으로 스페인을 영화강국으로 꼽기엔 민망한 구석이 있다. 그건 이 나라 영화산업의 규모가 프랑스나 영국, 이탈리아 등 다른 영화강국에 미치지 못하고,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도 그만한 취급을 받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나라엔 끊이지 않고 주목할 만한 인재가 배출됐으니, 그 대표가 페드로 알모도바르와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같은 명감독이다.
특히 아메나바르는 이후 할리우드로 진출해 <바닐라 스카이> <디 아더스> 같은 명작을 연출했고, 모국인 스페인으로 돌아와 저를 주목받게 한 스릴러 영화를 기획, 제작하고 직접 감독하는 스페인 영화계의 기둥으로 활약하고 있다. 아메나바르 뿐 아니라 일군의 젊은 스페인 감독들은 넷플릭스와 같은 다국적 OTT서비스 업체를 매개로 수준급 스릴러를 제작해 발표하고 있다. 그중 한 편이 바로 <노웨어>가 되겠다.
▲ 노웨어 스틸컷 |
ⓒ 넷플릭스 |
컨테이너 타고 탈출한 난민 여성 생존기
시놉시스는 단 두 줄. '폐허가 된 전체주의 국가에서 임신한 몸으로 도망친 여인. 살아남겠다는 일념으로 화물선 컨테이너에 갇힌 채 바다를 표류한다'는 것이었다. 화물선과 바다, 그에 대해서라면 나와 벌써 5년 쯤의 경력이 있는 이 항해사 녀석은 밤을 꼬박 새워 대화를 할 수 있을 터였다.
영화는 스페인을 포함해 지중해 일대 국가들에게 당면한 현실인 난민 문제로부터 출발한다. 넷플릭스 스릴러가 흔히 그러하듯 <노웨어> 또한 정확한 배경은 밝히지 않고 있는데, 탈출하려는 난민들과 이를 중개하며 돈을 뜯어내는 브로커, 이들을 막으려는 정부군, 난민에게 발포까지 서슴지 않는 군인들의 모습이 지난 수십 년 간 비슷한 상황에 놓였던 리비아 등 북아프리카 일대 국가들을 떠올리게 한다.
▲ 노웨어 스틸컷 |
ⓒ 넷플릭스 |
망망대해 위에서도 어머니는 강하다
미아는 만삭의 몸이다. 출산을 코앞에 둔 그녀가 무리한 밀항을 감행하는 데는 모국이 임산부를 대상으로 무리한 정책을 실시하는 영향이 있다. 구체적인 사정이 등장하진 않지만, 태어날 아기를 위해 그녀는 남편과 큰 위험을 감수한 여정에 오르게 된 것이다. 남편 니코(타마르 노바스 분)가 그녀와 함께 컨테이너에 오르지만 상황은 둘을 갈라놓는다. 군인들의 검문검색이 엄격하기에 너무 많은 난민을 함께 둘 수 없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영화는 미아가 홀로 컨테이너와 함께 큰 바다를 떠돌기까지의 이야기로 흘러간다. 남편은 다른 컨테이너로 옮겨지고, 함께 있던 난민들은 죄다 총을 맞고 사망하기에 이른다. 어찌어찌 몸을 숨겨 출항에 성공하지만 격랑 가운데 배가 난파하여 미아가 탄 컨테이너가 표류하게 된 것이다. 미아는 말 그대로 국제 해상 미아가 된다.
▲ 노웨어 스틸컷 |
ⓒ 넷플릭스 |
현실과 극적 상상의 경계에서... <노웨어> 감상법
주인공을 위기에 빠뜨리고 다시 그를 극복하게 하는 건 과거의 B급 재난 스릴러, 또 근래의 OTT서비스 용 스릴러들의 공식이라 해도 좋다. 그 과정에서 참신함과 개연성을 기하는 것이 성패를 가르는 가늠자가 된다. <노웨어>는 여러 면에서 주어진 과제를 충실히 극복해내려는 모범적 작품에 가깝다. 이제껏 없었던 형식을 시도하고 한층 깊어지는 담론을 끌어내진 못하지만, 안정적으로 주어진 기대를 충족시켜 나가기 때문이다.
영화를 함께 감상한 지인 항해사는 작품의 장단이 극명하게 엇갈렸다 평한다. 그는 "선박에서 일하는 입장에서 밀항이란 것이 영화 속에 그려지는 것처럼 허술하지도 또 극적이지도 않다"며 "때마침 필요한 물건을 싣고 있지도, 연안처럼 전파가 계속 잡히지도 않을 것이고, 가급적이면 육로를 선택하는 것이 현명했을 것이란 생각이 계속 들었다"고 불평했다.
그러면서도 지인은 "극한상황의 연출은 영화의 메시지를 위함인데, 바로 어머니의 사랑"이라며 "임신한 여성은 혼자가 아니라고 했는데, 마침내 도입부의 의존적인 아내가 아이를 낳고 강한 어머니가 되는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고 떠올렸다.
이어 "좁디좁은 공간에서 힘겹게 낳은 딸은 불필요한 짐덩이가 아니라 생존의 원동력이었고, 태반과 날 생선을 뜯어먹으며 몸부림을 치는 모습을 관객은 진지하게 바라보게 된다"며 "갈등과 이기로 넘쳐나는 시대에 가족과 사랑을 느끼게 되는 시간이 되었음에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고 전했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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