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방 장수의 건곤일척 승부수 은행을 살리다 [내 인생의 오브제]

2024. 8. 6.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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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박종복 SC제일은행장의 <필사즉생> 휘호
박종복 SC제일은행장이 고객에게 받은 필사즉생 휘호.
한때 대한민국 기업 중 법인세 납부 1위였던 제일은행은 1997년 외환위기를 맞으면서 휘청댔다. 4000여명에 달하는 대규모 해고. 아직도 전 국민의 뇌리에서 남아 있는 ‘눈물의 비디오’. 애통함이 은행을 살리진 못했다. 속절없이 외국인에게 팔려 나갔다. 2000년에 뉴브리지캐피털을 잠시 거쳐 2005년에 17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영국의 스탠다드차타드은행에 인수된다.

외국인의 손에 맡겨진 토종 은행. 길을 잃고 방황한다. 방황 정도가 아니었다. 거의 ‘폭망’ 수준이었다. 2011년 금융권에서는 유례없이 장장 60일간의 파업이 발생한다. 외국인 은행장과 직원들과의 문화적 갈등. 현 박종복 은행장이 정든 제일은행을 떠난 것도 이때였다.

정말 망하기 직전 자존심 강한 영국 은행이 영업에서 잔뼈가 굵은 토종 은행원 박종복을 다시 부른다. 고객은 거의 다 이탈한 상태. 정부로부터 면허증 받고 돈 장사하는 곳에서 1000억원이 넘는 적자가 났다. 그야말로 너덜너덜했다. 전무로 들어왔는데 얼마 안 가 은행장 제안을 했다. 한국 사람에게 경영권을 맡기겠다는 건데 설거지하고 은행 정리하고 직원 내보내는 악역을 하라는 얘기였다. 야구로 치면 9회 말 패전처리 투수.

박 행장은 구렁텅이로 들어갈 결심을 한다. “독이 잔뜩 묻은 성배다. 그러나 피할 수 없다. 서예를 하는 한 고객이 애정과 충정을 담아 휘호를 써줬다. 필사즉생(必死卽生)이라고. 그래 죽기로 덤비면 살길이 있을 것이다. 그 액자를 은행장실과 전국 400개 지점에 모두 걸었다.” 박 행장은 필사즉생의 각오로 영국 스탠다드차타드와 건곤일척의 승부수를 던진다.

첫 번째, 취임 첫해 박 행장은 그룹 회장과 런던에서 새벽 담판을 벌인다. “당신이 한국에 와야겠다. 한국에서 철수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라.” 심사숙고를 거듭한 회장은 다음 달 반나절의 일정으로 한국을 찾는다. 공항에 도착해 바로 청와대로 들어가 경제수석을 만나고 다시 런던으로 돌아가는 일정이었다.

두 번째,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직원을 내보내는 방법밖엔 없었다. 계산해보니 5000명 직원 중 1000명을 감원해야 했다. 안 그러면 문 닫을 판이었다. 박 행장은 5000억원을 달라고 요구한다. 본사에선 미쳤다고 했다. 5000억원 벌어야 하는데 5000억원을 달라니. 박 행장이 받아쳤다. 이 지경까지 온 데는 너희들 책임도 있다. 현지화하지 못한 잘못이 크다. 지금 5000억원을 붓지만 그건 5조원짜리 회사를 살리는 길이다.

박 행장의 뇌리엔 외환위기 때 악몽이 스쳐갔다. 두 눈 질끈 감았다. 전 직원을 대상으로 눈물겨운 호소를 한다. “염치없지만 연말까지 1000명이 회사를 떠나야 한다. 누구 나가라고 강요하지 않겠다. 그러나 모두가 살자고 하면 모두가 죽는다. 은행은 문 닫는다.” 11월 넷째 주가 되자 자진 퇴직하겠다는 직원 수가 1000명에 달한다. 특별퇴직은 그렇게 해서 마무리됐다.

마지막 세 번째 담판. 다음 해 3월 중국 베이징에서 그룹 이사회가 열렸다. 이때 박 행장은 ‘제일’이란 은행명 복원을 요구한다. “스탠다드차타드로는 장사가 안 된다. 우리는 우리의 고객을 찾아야겠다. 그러지 않고는 생존이 안 된다”고 주장했다. 본사가 코웃음 쳤다. “변방의 망한 은행의 브랜드를 어디다 갖다 붙이냐”는 반응. 박 행장은 끝까지 버텼다. 저녁 8시에 시작된 회의는 새벽 2시까지 이어졌다. 박종복 승(勝). 그렇게 해서 SC그룹 내 현지 은행 이름이 들어가는 첫 사례가 만들어졌다.

박종복 행장의 ‘필사즉생’ 정신이 오늘날의 SC제일은행을 있게 했다.

[손현덕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71호 (2024.08.07~2024.08.13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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