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방 장수의 건곤일척 승부수 은행을 살리다 [내 인생의 오브제]
외국인의 손에 맡겨진 토종 은행. 길을 잃고 방황한다. 방황 정도가 아니었다. 거의 ‘폭망’ 수준이었다. 2011년 금융권에서는 유례없이 장장 60일간의 파업이 발생한다. 외국인 은행장과 직원들과의 문화적 갈등. 현 박종복 은행장이 정든 제일은행을 떠난 것도 이때였다.
정말 망하기 직전 자존심 강한 영국 은행이 영업에서 잔뼈가 굵은 토종 은행원 박종복을 다시 부른다. 고객은 거의 다 이탈한 상태. 정부로부터 면허증 받고 돈 장사하는 곳에서 1000억원이 넘는 적자가 났다. 그야말로 너덜너덜했다. 전무로 들어왔는데 얼마 안 가 은행장 제안을 했다. 한국 사람에게 경영권을 맡기겠다는 건데 설거지하고 은행 정리하고 직원 내보내는 악역을 하라는 얘기였다. 야구로 치면 9회 말 패전처리 투수.
박 행장은 구렁텅이로 들어갈 결심을 한다. “독이 잔뜩 묻은 성배다. 그러나 피할 수 없다. 서예를 하는 한 고객이 애정과 충정을 담아 휘호를 써줬다. 필사즉생(必死卽生)이라고. 그래 죽기로 덤비면 살길이 있을 것이다. 그 액자를 은행장실과 전국 400개 지점에 모두 걸었다.” 박 행장은 필사즉생의 각오로 영국 스탠다드차타드와 건곤일척의 승부수를 던진다.
첫 번째, 취임 첫해 박 행장은 그룹 회장과 런던에서 새벽 담판을 벌인다. “당신이 한국에 와야겠다. 한국에서 철수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라.” 심사숙고를 거듭한 회장은 다음 달 반나절의 일정으로 한국을 찾는다. 공항에 도착해 바로 청와대로 들어가 경제수석을 만나고 다시 런던으로 돌아가는 일정이었다.
두 번째,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직원을 내보내는 방법밖엔 없었다. 계산해보니 5000명 직원 중 1000명을 감원해야 했다. 안 그러면 문 닫을 판이었다. 박 행장은 5000억원을 달라고 요구한다. 본사에선 미쳤다고 했다. 5000억원 벌어야 하는데 5000억원을 달라니. 박 행장이 받아쳤다. 이 지경까지 온 데는 너희들 책임도 있다. 현지화하지 못한 잘못이 크다. 지금 5000억원을 붓지만 그건 5조원짜리 회사를 살리는 길이다.
박 행장의 뇌리엔 외환위기 때 악몽이 스쳐갔다. 두 눈 질끈 감았다. 전 직원을 대상으로 눈물겨운 호소를 한다. “염치없지만 연말까지 1000명이 회사를 떠나야 한다. 누구 나가라고 강요하지 않겠다. 그러나 모두가 살자고 하면 모두가 죽는다. 은행은 문 닫는다.” 11월 넷째 주가 되자 자진 퇴직하겠다는 직원 수가 1000명에 달한다. 특별퇴직은 그렇게 해서 마무리됐다.
마지막 세 번째 담판. 다음 해 3월 중국 베이징에서 그룹 이사회가 열렸다. 이때 박 행장은 ‘제일’이란 은행명 복원을 요구한다. “스탠다드차타드로는 장사가 안 된다. 우리는 우리의 고객을 찾아야겠다. 그러지 않고는 생존이 안 된다”고 주장했다. 본사가 코웃음 쳤다. “변방의 망한 은행의 브랜드를 어디다 갖다 붙이냐”는 반응. 박 행장은 끝까지 버텼다. 저녁 8시에 시작된 회의는 새벽 2시까지 이어졌다. 박종복 승(勝). 그렇게 해서 SC그룹 내 현지 은행 이름이 들어가는 첫 사례가 만들어졌다.
박종복 행장의 ‘필사즉생’ 정신이 오늘날의 SC제일은행을 있게 했다.
[손현덕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71호 (2024.08.07~2024.08.13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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