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이야말로 인간을 믿어주는 돈"
[김찬휘 기자]
*이전 기사에서 이어집니다.
4. 경기도 농촌기본소득 / 농어민기회소득
농민의 소득보장이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경기도에서는 두 가지 사업이 시행되고 있다. 하나는 2022년 4월부터 시작된 연천군 청산면의 농촌기본소득 시범사업이다. 외국인을 포함, 청산면에 주민등록을 두고 실거주하는 모든 주민에게 월 15만 원씩 지역화폐로 5년간 지급하는 사업이다. 예산은 첫해에 62억6200만 원이었고, 경기도가 70%, 연천군이 30%를 분담한다. 지역화폐는 청산면 내에서 3개월 내에 사용해야 했는데, 불만이 많아 사용 범위를 일부 확대하고 사용 기간도 180일로 늘렸다.
전국적 기본소득의 '파일럿' 성격의 사업이라 '농민'만이 아닌 '농촌' 기본소득 시범사업이 된 것인데, 소위 '소멸지역'이 파일럿으로 적절한지에 대해 처음부터 지적이 있었다. 또한 소멸지역 경제 활성화라는 목표를 달성하려면, 단지 소득지원만이 아니라 각종 투자와 사회⋅문화 서비스의 확충이 동반되어야 할 것인데 전혀 진행된 바가 없다. 오직 인구 유입만이 판단 지표로 남은 상황인데, 그것이 기본소득의 철학에 준하는 목표인지 의문시된다. 청산면 인구가 늘면 성공이고, 줄면 실패인가?
다른 하나는 경기도 농어민'기회'소득이다. 도지사가 바뀌면서 농민기본소득이 농어민기회소득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참여소득의 성격에 맞게 위치를 제대로 잡아나가는 것이라 볼 수도 있지만, 정치적 리브랜딩(rebranding)이라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참여소득과 기본소득은 서로를 배제하는 관계가 아닌데, 유력 정치인의 손에서는 서로 적대적인 것으로 변한다. 현재 경기도에는 농어민기회소득 외에도 예술인기회소득, 장애인기회소득, 체육인기회소득, 아동돌봄기회소득이 있고, 기후행동기회소득까지 생겼다. 바야흐로 '기회소득 만병통치약'인 격이다.
그리고 기회소득의 원조격인 앤서니 앳킨슨Anthony Atkinson의 참여소득은 기본소득의 '무조건성' 원칙에 약간의 변형을 가해 참여라는 '조건'을 추가한 것일뿐, 자산조사에 따른 배제는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데 예술인, 장애인, 체육인 모두에게 중위소득 120% 이하라는 자산조건이 걸려있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말이 떠오른다.
기본소득이 전환의 매개가 되기 위해서는 공유자의 적극적 실천이 결정적이다. 사회실험은 더욱더 그럴 것이다. 하지만 관료체제에서 하달되는 사업에는 공유자의 목소리도 몸짓도 실리지 않고, 공유자는 당국이 정한 기준에 따라 현금을 받는 수급자에 머문다. 정치인의 정치적 야망이 배후에 있다면 더 최악이 될 것이다.
5. 부산 청년기본소득 프로젝트
"누가 누구의 시간을 평가할 수 있을까. 기본소득은 각자가 나름의 기준으로 자기 시간을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기본소득이야말로 인간을 믿어주는 돈이라고 생각한다." (프로젝트 참여자)
대선을 1년 앞둔 2021년 6월, 부산에 거주하는 청년 14명(만 18세-35세)에게 월 100만 원을 7개월간 지급하는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결혼 여부, 소득 조건 등의 조건이 없고, 무작위 추첨으로 1차 100명을 뽑고, 자기소개서 등 서류 심사로 최종 14명을 선발했다. (재)부산형사회연대기금이 기본소득 지급액 1억 원을 마련하고, 부산MBC, BNK부산은행이 방송제작비 1억 원을 분담했다. 부산형사회연대기금은 2019년에 만들어진 전국 최초의 노사협력 민간 공익재단으로서, 부산은행, SK해운, 부산항만공사, 부산항운 등의 노조와 기업이 기금을 조성했다. 부산MBC는 6부작의 다큐로 청년과 기본소득의 만남을 그려냈다.
'노인과 바다'라는 자조적 유머가 있을 정도로 부산에는 청년이 없다. 2018년 기준 부산 청년 인구 비중은 20.8%로서 6개 특별⋅광역시 중 최하위. 지역사회가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 배경이다. 기본소득 운동의 관점에서는 기본소득의 '충분성' 원칙을 충족한 최초의 실험이란 점이 주목받았다. 100만 원은 최저임금 개념으로 환산하면 '100시간이 지급된 것'과 같다. 이것을 참가자들은 "100시간의 선물"이라 말했다. 100시간의 '시간주권'을 참여자들은 어떻게 활용하게 될 것인가? 연구자들은 기본소득과 노동(근로유인)에 대해서 중심적으로 연구했다.
보통 기본소득을 반대하는 우파는 충분한 기본소득이 근로유인을 없앤다고 우려한다. 쉽게 말해 일을 안 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이라고 추상적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 '어떤 일'을 안 하게 되는지가 중요하다. 프로젝트 참여자들은 '해야 하는 일' 대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주권이 증대된다는 점을 확인하였다. 기본소득은 평소에 하고 싶었던 일에 시간을 '투자'할 수 있는 실질적 권한으로 작용했다. 에릭 올린 라이트가 말했던 "퇴장의 자유", 즉 노동자의 '협상력'이 증대되었기 때문이다. 격투기 선수를 꿈꾸던 한 청년은 원래 맥도날드에서 일했는데, 기본소득을 받게 되면서 재활치료를 하면서 PT샵에서 일하게 되었다.
부산 청년기본소득 프로젝트가 주는 교훈은, 기본소득이 노동에 미치는 영향력을 보기 위해서는 '노동시간'의 변화만이 아니라 '노동의 질'에 대해서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용률' '실업률' '노동생산성' 등의 수치에만 얽매일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삶의 질, 행복감, 돌봄의 관계 등을 들여다 보아야 한다. 기본소득은 값어치로 따질 수 없는 기억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 금액이 충분히 클수록 그 추억은 다채롭고 새로운 향기를 풍겼다. 사회과학적으로 표현하면 '충분한 기본소득이 큰 전환효과를 가진다.'
부산 청년기본소득 프로젝트는 동일한 금액과 기간으로 10명이 선정되어 2022년 9월부터 2023년 3월까지 2차 실험이 진행되었다.
6. 주민참여형 재생에너지 이익공유 - 신안군 '햇빛연금'
기후위기가 재난으로 닥치고 있는 지금, 주요 산업국 중 대한민국의 재생에너지 비율은 최하위 수준에 머물러 있다. 재생에너지 전환이 시급하지만, 정부와 국회가 손 놓고 있는 사이에 해상풍력은 외국 에너지기업들의 독무대가 되었고 액티스, 맥쿼리, 블랙록 등 해외 유명 사모펀드들은 태양광플랫폼 각축을 벌이고 있다.
이런 현실을 기화로 국내 대자본들의 재생에너지 투자를 지원해야 한다는 위험한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재벌과 외국기업, 사모펀드의 에너지 산업 장악을 막기 위해서는 일단 한전 자회사인 발전공기업이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 재무상태가 열악한 발전공기업 현실에서는 정부의 과감한 재정투자가 필요하고, 그를 위해서는 현실적인 에너지 전환 기금 계획을 세워야 한다.
동시에 에너지 소비를 줄이려는 노력도 함께 해야 한다. 이것은 도덕적 호소로 이루어질 수 없다. 리모델링, 전기요금 현실화, 탄소세 도입 등 복합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탄소세에 대해서 논란이 계속 있는데 이미 결론이 난 얘기다. 저소득층에 불리한 탄소세의 '역진성'은 반드시 해결방법을 장착하고 있어야 하고 그것은 시민배당이다. 배당이 있는 나라는 탄소세가 성공했고, 없는 나라들은 실패했다. 스위스는 탄소세로 난방용 에너지 소비를 28.1%나 줄였다. 10년만에 탄소세를 8배나 올렸는데도 노란조끼 시위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았다. 배당 덕분이다.
"탄소세 상승의 공정성과 정치적 지속 가능성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재정 수입 전액을 동일한 액수로 모든 미국 시민에게 직접 되돌려 주어야 한다. 가장 취약한 사람들을 포함하여 미국 가계의 대다수는 에너지 가격 상승으로 지불하는 것보다 '탄소 배당'을 더 많이 받게 됨으로써 재정적으로 이익을 얻게 될 것이다."('탄소배당에 대한 경제학자들의 성명', 2019.1.16.)
이것이 에너지 과소비자에게 탄소세 부담을 얹는 진정한 방법이다. 소득세, 법인세의 누진제 강화로 에너지 전환 기금도 조성해야 하지만, '수요관리'도 함께 해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주민들의 지역 분권적 에너지 생산이 필요하다. 시행 과정에서의 절차적 정의, 발전사업의 수익이 주민들에게 돌아가는 분배적 정의가 결여된 상태에서는, 지역 태양광⋅육상풍력 사업은 좌초하거나 외부 자본만 이익을 챙기고 주민들에게는 생태훼손, 소음, 주민 갈등만을 남기게 된다. 그런 점에서 신안군 햇빛연금 사례는 검토할 가치가 있다.
신안군은 2018년 10월 지역주민과 태양광 사업자가 신재생에너지 개발이익을 공유하는 '신안군 신재생에너지 개발이익 공유 등에 관한 조례'를 전국 처음으로 제정했다. 주민들은 1인당 1만 원을 내고 '신재생에너지 협동조합' 조합원으로 가입하면 발전소 이익의 30%를 1년에 4차례 분기별로 받는다.
현재 안좌면, 지도읍, 임자면의 다섯 섬에 600MW 규모의 태양광 시설을 갖추었고, 2023년 말 현재까지 100억 원이 넘는 햇빛연금을 지급했다. 햇빛연금 혜택을 못 보는 11개 읍면의 18세 미만 아동에게는 1인당 연간 40만 원의 '햇빛아동수당'도 지급했다. 2025년 비금면, 증도면, 신의면에 태양광발전소를 추가로 설치하면 발전량은 1.1GW에 달하는데, 이것은 핵발전소 1기 규모에 해당한다.
우리 모두의 '공동의 부'인 햇빛과 바람, 땅을 활용해 발전을 하고 그 수익을 기본소득 배당 형태로 똑같이 나누는 신안군의 '햇빛연금'은 공유자의 공유화 운동의 새로운 사례이다. 특히 조세가 아닌 공유지에 기초한 재원 마련은 조세저항이 없고 주민 수용성이 높아서 의지만 있다면 신속하게 넓혀 나갈 수 있다. 신안군은 '햇빛연금'의 성공을 바탕으로 이제 '바람연금'을 준비하고 있다. 2030년까지 원전 8기 규모의 8.2GW 해상 풍력발전 단지를 만들어 전 군민에게 1인당 월 50만 원, 연간 600만 원을 줄 계획을 세우고 있다.
다만 고민은 남아있다. 태양과 바람, 토지와 바다는 모두의 공동의 부인데, 투자한 사람들만 이익 배분에 참여한다는 것은 소유권만을 인식하고 공유지에 대한 기본권을 인정하지 않는 문제가 있다.
햇빛연금, 바람연금 수혜의 대상이 전 국민인지, 군민인지, 시설지 읍면 주민이 되어야 할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육상풍력이 설치되는 산은 지자체 소유가 아니라 국유지인데, 국유지 훼손에 대한 수익을 지역 주민에게만 귀속시킬 수 있을까? 해상풍력을 설치하면 그 바다의 모든 생명, 그 바다를 활용하는 어민들 전부가 영향을 받는다. 앞바다 주민만이 그 바다의 공유자는 아닌 것이다. 신안군의 햇빛연금은 새로운 성과와 함께 오래된 숙제 또한 남기고 있다.
7. 마치며
지난 몇 년간 진행된 모든 기본소득 실험과 사업을 소개하기는 어렵다. 전주 화평교회 기본소득, 지리산 청년활력기금 청년기본소득, 충북 옥천 청소년 기본소득 실험, 전남 교육기본소득, 그리고 마을의 공유자산 혹은 공동사업의 수익을 마을 노인들에게 지급하고 있는 보령시 장고도, 태안군 만수동, 포천시 장독대, 정읍시 송죽마을, 익산시 성당포구마을의 마을자치연금도 기억하자.
많은 이들이 알고 있듯이 기본소득만으로는 기후위기를 해결할 수는 없다. 기본소득은 애초에 기후위기 대응의 방책으로 고안된 것이 아니다. 하지만 기본소득은 커먼스, 소득불평등 해소, 탈상품화된 돌봄 활동, 협동조합 등 사회적 경제, 노동과 소득의 단절, 노동시간 단축 등 '탈성장' 혹은 '자본주의 잠식하기'(에릭 올린 라이트)로 나아가는 여러 요건들을 갖추고 있다.
물론 기본소득이 현재의 생산/소비양식을 가속화하지 않을까 하는 것에 대한 우려는 남아있다. 기본소득이 어떠한 사회를 위한 지렛대로 기능할 것인지 세심하게 고려해야 한다. 그래서 탈성장을 최초로 제시한 앙드레 고르츠가 '자율적 영역'에서의 다양한 생태적 활동이 병행되어야 기본소득이 '해방적'이 될 수 있고 '존재적 평정'을 줄 수 있다고 지적한 부분을 명심해야 한다.
미증유의 기후 위기는 모든 고정관념과 편견을 내려놓고 겸허하게 열린 자세로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홍세화 선생님이 마지막에 유언처럼 남겼듯이 "겸손"이야말로 새로운 세상을 원하는 사람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일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김찬휘씨는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운영위원, 농어민기본소득전국운동본부 교육홍보위원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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