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돼지들' 멸시 받은 여공들은 이렇게 버텼다

김상목 2024. 8. 6.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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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다큐멘터리 <조선인 여공의 노래>

[김상목 기자]

누군가는 '과거를 잊고 미래를 봐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납득하지 못하는 쪽에서는 '미래의 장애물처럼 치부되는 과거가 제대로 인정된 적 있는지'를 따져 묻는다. 일제강점기 역사에 관한 이야기다. 피해자가 통 크게 용서하는 게 건설적 미래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과 제대로 된 과거사 사과와 반성이 있어야 올바른 미래 방향 설정이 가능하다는 측의 대립은 끝나지 않고 반복되고 있다. 정작 상대편에선 '과거를 묻지 마세요'로 일관하는데 말이다.

하지만 옆 나라 일본이 제국주의 정책을 취하면서 인접한 조선을 강제로 식민지화한 것과 수탈을 자행하고 전쟁에 동원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일본은 이를 억지로 합리화하려고 온갖 이유와 핑계를 갖다 붙인다. 조선은 망할 수밖에 없는 나라였기에 서민들은 얼른 망하라며 저주를 했다거나, 일본 군경이 치안을 안정시켰는데 독립군이라 자처하는 무장 폭도들 때문에 민중은 고달팠다는 등의 주장이다. 일제강점기에 강제 수탈을 목적으로 이뤄진 경제성장을 '근대화'의 근거로 내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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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시네마달
 
일제강점기 역사의 수난

이런 혼란 가운데 광복절을 앞두고 한 편의 영상 교재가 도착했다. 다큐멘터리 <조선인 여공의 노래>는 우리가 막연하게 인식하는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인의 노동 착취 문제를 여러 각도로 조명한다.

다큐멘터리는 1910~1950년대에 걸쳐 오사카에서 노동 착취에 시달리던 22명의 조선인 여성 노동자, 관계자 증언을 기반으로 재연한다. 그래서 초반에는 다큐멘터리의 전형성과는 다소 거리감이 들 수 있다. 하지만 곧 이 작품이 역사 고증 자체에 집요하리만큼 철저하게 초점을 두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9개의 단락으로 구분되는데, 길게는 100여 년, 짧게는 70년 전까지 이어진 오사카의 조선인 여공들을 현재형으로 되살리려는 시도로 이어진다.

Part.1 일본 인기 요리 '호루몬'의 기원

카메라는 도쿄와 함께 일본을 양분하는 대도시 오사카로 향한다. 오사카 행정구역 중 하나인 이쿠노구에는 코리아타운이 있다. 엔저 현상으로 근래 앞다투어 일본 여행이 유행이지만, 그중에도 가장 많은 이들이 들르는 동네 중 하나다. '조선 시장'이라 불리는 식당가의 인기 메뉴에는 원래 일본인들이 잘 먹지 않던 부위인 내장이나 껍데기 등 부속을 취급하는 '호루몬'이 있다. 이 '호루몬'이 실은 '쓰레기'를 지칭한다는 것, 그리고 이 영화에서 복원할 조선인 여공들이 굶주림을 겪으며 버려진 부위를 얻어서 요리해 먹었다는 기원을 복기하며 이야기가 출발한다.

오사카의 조선인 여공들이 공식적으로 처음 확인된 건 1913년 12월 26일, 오사카 아사히 신문의 기사에서다. 기사에 따르면, 경남 진주에 파견된 모집인이 14~27살의 여성들을 데려와 방적 공장에서 일을 시키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사업장이 키시와다 방적인데, 현재까지 이어지는 대기업 집단의 모태가 된 곳이다. 1933년 한 장의 사업주와 여공들의 소풍 사진이 등장한다. 양 갈래 댕기 머리를 한 앳된 여성 노동자들로 가득하다.

놀랍게도 당시 여공 중 생존자들이 인터뷰로 등장한다. 신남숙. 99세. 1936~1941년 5년 동안 방적 공장에서 여공으로 일했다. 강제성이 없이 합리적 계약으로 일본에 노동자로 왔다는 수정주의 주장을 경험담으로 가볍게 논파한다. 허위 과장 광고를 한 것은 물론, 행정기관의 협조를 얻어 사실상 징용에 준하는 강제모집을 공공연히 행했다고 밝힌다. 초반에는 일본에 가서 일하면 돈도 모으고 작업장 환경도 나쁘지 않다길래 가난한 식민지 여성들이 응모하기도 했지만, 점차 열악한 실상이 알려지자 강권으로 변해갔다고 전했다. 그렇게 다양한 이유로 10대 소녀부터 20대 주부까지 현해탄을 건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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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시네마달
 
Part.2 '소녀들' 각자의 사연

생존 당사자들은 속속 화면에 등장한다. 김상남. 98세. 1937~1942년 방적 공장 근무 경력의 인터뷰 상대는 어릴 적에 '밥통'으로 불렸다. 부모는 오빠만 공부시켰고, 그녀는 8살부터 생계를 위해 일했다. 너무 어린 나이라 공장에서 채용하지 않을까 겁이 나서 나이를 속였고, 키가 커 보이려 굽이 높은 나막신을 신었다. 그렇게 꿈 많은 나이에 공장에서 주·야간 맞교대로 저녁 6시부터 다음 날 아침 6시까지 12시간 일했다. 졸음은 쏟아졌고, 그때마다 사탕을 아껴가며 겨우 일했다.

이번엔 앞의 두 재일동포 1세대가 아니라 2세대가 등장한다. 2세대라 하지만 80대다. 김순자. 84세. 1952~1959년 방적 공장에서 일했다. 해방 이후에도 여러 사정으로 기반을 포기하지 못한 이들은 계속 공장에서 일했다. 그 역시 12살부터 가난한 집안 살림 때문에 아동 노동에 뛰어들어야 했다. 7~8년 정도 공장에서 일한 후 19살에 결혼했다. 그에게 청춘은 오로지 공장에 바친 것에 불과했다. 전쟁이 끝나고 경제성장이 시작되던 때지만, 최하층 노동자이던 그가 머물던 공장 기숙사는 함석지붕에 그 흔한 다다미 한 장 깔려 있지 않은 맨바닥, 그저 거적 몇 장 깔린 수용소 같은 곳이었다.

Part.3 '조선의 돼지들'이란 멸시와 가혹한 처우

22명의 증언은 대부분 전후 생존 여공들의 것이지만, 그중에선 공장의 일본인 관리자 및 노동운동가의 증언도 있다. 1920년대 활동하던 일본인 노동운동가는 이전 세기에 초창기 산업혁명 시절 영국과 프랑스 등에서 벌어지던 초장시간 노동과 열악한 환경이 20세기 전반 일본에서 대물림 됐다는 걸 증명한다. 노동자들은 공통적으로 주·야간 맞교대로 근무했고, 퇴근 후에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대개 8명이 다다미 8개 깔린 방에서 공동으로 기거했다. 일본 사회에서 현재도 열악한 주거현실을 상징하는 '다다미 넉 장 반'이 고작 2.25평에 불과하니, 8장이라면 4평이에 불과하다. 이 방에서 주간 조 4명과 야간 조 4명이 같은 이불과 침구를 공유하며 생활해야 했다. 지금 세대라면 그게 가능한지 반문할 테다.

환경도 환경이지만 사업주는 개선할 의지도 없었다는 게 더 심각한 문제였다. 비위생적 환경 탓에 이나 벼룩, 빈대가 들끓었지만 방재와 검역을 요청하는 노동자들에게 관리자는 '빈대에게 물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는 게 약을 뿌리는 것보다는 더 빠를' 거라며 멸시할 뿐이었다.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면서 먹는 것도 형편 없었다. 일본제국이 전쟁으로 치달으면서 식량 사정은 한층 더 열악해진다. 배급제가 시행되자 보리밥이라도 밥을 먹던 게 고구마죽으로 바뀐다. 죽을 먹고 일할 힘이 없다는 항변은 무시된다. 굶주림이 공장 전체에 퍼진다. 배고픔 때문에 약해진 몸에 질병이 엄습해 사망자가 늘어난다.

기이한 건 조선인 여공이 일본인 여공에 비해 건강 상태가 상대적으로 나았다는 기록이다. 이들은 앞서 소개된 '호루몬'처럼 버리는 내장이라도 먹으면서 몸을 돌본 것이다. 그야말로 생존본능이 발동한 셈이다. 1919년부터 1941년까지 운영된 키시와다 방적 공장에는 3만 명의 여공이 일했고 그중에 조선인이 워낙 많아 '조선 방적'으로 불릴 정도였다. 이들은 배고픔은 물론 육아와 가사까지 도맡아 담당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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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4 사실상 수용소였던 '붉은 벽돌 담장'

키시와다 방적 공장은 오사카 도시를 관통하는 강 하구를 따라 길게 형성된 대규모 공업단지의 형상을 취한다. 거듭 확장되면서 끝도 없이 이어지는 것 같은 공장의 외부와의 경계는 빨간 벽돌로 높이 세워진 담벼락이다. 담장에는 철조망까지 입혀 있었다. 조선인 여공들에겐 곧 '빨간 벽돌 감옥'이던 셈이다. 그들은 자유시간에도 공장 밖으로 외출하지 못했다. 관리자의 몇 단계 거친 도장을 겨우 받아낸 다음에야 문지기의 허락을 받고 바깥 공기를 느낄 수 있었다.

일본인 역사학자는 이 대기업의 창업주가 종교인, 그것도 크리스천이라고 밝힌다. (역사학자는 전직 목회자 출신이다) 그런 연유로 이 공장 담을 구성하는 빨간 벽돌마다 십자가 표식이 찍혀 있다. 하지만 정작 십자가의 원래 의미와 정반대로 그 벽돌은 가난하고 고립된 여공들을 가두는 용도에 활용됐다.

공장은 당시 일본제국의 번영과 함께 확장을 거듭한다. 그 결과 기숙사 일부는 공장 외곽에 세워져야 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기거하던 여공들도 외부 출입은 불가능했다. 공장과 기숙사가 지하 터널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눈대중을 해봐도 4차선도 안 될 것 같은 짧은 도로도 그들에겐 건너는 게 허락되지 않았다. 당시 일본제국이 얼마나 기득권과 대자본에 친화적이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Part.5 '상애회'... 매국노와 기생충은 어디에나 있었다

'상애회', 조선인 노동자들에게 직업 알선과 숙소 제공을 주로 맡는 상호부조 단체라는 뜻이다. 그냥 보면 조선인 여공들에게 그나마 기댈 구석이자 비빌 언덕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그 실체는 전혀 달랐다. 회사는 기본적인 근무 지시나 공장 내 생활 일반은 관리했지만, 흔히 '노무관리'라 불리는 분야는 이 상애회라는 단체에 전담시켰다. 강제로 가입한 어용노동조합의 행태다. 얼마 안 되는 급여에서 상애회 회비가 강제공제되었고, 이들은 참담한 근무환경 때문에 빈번하게 발생하던 노동쟁의 탄압의 선봉이 되었다. 사실상 용역깡패에 가까운 존재였던 것이다.

이들은 남성 노동자들에게 돈을 받고 조선인 여공을 강제 결혼 상대로 제공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조선인 동포에 대한 성폭력은 다반사였다. 공장에서 일하다 갑자기 불려 가고 며칠 후 돌아온 여공은 댕기 머리로 머리 모양이 바뀌어 있었다. 강제 결혼의 표식이다. 사실상 인신매매단 활동도 병행한 셈이다. 이런 상애회의 폭력과 함께 공장 내 조선인 순찰 등 말단 관리자들 역시 동포를 탄압하고 군림하기 일쑤였다. 차라리 사정을 잘 모르고 말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일본인 관리자보다 조선인들이 더 악독했다는 증언이 수두룩하게 쏟아진다.

일본인 역사학자는 상애회의 상징적인 인사 이름을 거론한다. '박춘금'이란 이름이 낯설지 않다. 기억을 되짚어 본다. 순간적으로 소환된 기억에 '아' 하고 이마를 치게 된다. 추억의 대하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서 일제 말, 정보요원으로 파견된 '장하림'과 동지들이 친일 궐기대회를 열던 부민관 폭파를 시도할 때 응징하려던 핵심 거두가 바로 박춘금이었다. 악랄한 정치깡패로 일본 야쿠자의 일원이자 상애회라는 단체를 통해 동포 노동자들을 악랄하게 착취하던 자다. 그는 일제강점기 시대 일본 본토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유일한 조선인일 만큼, 친일 부역자 중에도 최정점에 있던 존재다.

그런 부역자의 지휘 아래 상애회는 지구 반대편 유럽에서 벌어지던 나치독일의 홀로코스트 당시 강제수용소에서 실행을 담당하던 유대인 경찰이나 악질 간수 '카포'와 별반 다를 게 없는 행태를 자행했다. 더욱 끔찍한 건 일본제국 패망 이후에도 응징은 고사하고, 재일조선인민단(이하 '민단') 간부로 군림하며 잘 먹고, 잘 살았다는 것이다. 재일조선인 사회에서 조총련과 대립하며 대한민국 편에 선 민단의 초창기 수뇌부에 박춘금 같은 모리배가 득세했으니 재일동포 사회에서 '민단'의 인식이 어땠을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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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6 '보내고 싶은 편지'를 위해 꾸린 우리말 야학

만리타향에서 고단한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조선인 여공들은 빈궁한 고향에 약간씩 돈을 부치곤 했다. 물론 자신은 잘 있으니 안심하라는 편지도 동봉했다. 하지만 10대 초반에 공장으로 온 이들은 대개 글을 쓸 줄 몰랐다. 그래서 평소에 자신들을 학대하는 조선인 (남성) 순찰에게 담배 몇 갑 쥐여주고 대필을 부탁해야 했다. 하지만 그저 형식적인 안부 몇 줄 외에 기대할 게 없었다. 그런 파행을 해소하기 위해 여공들은 편지를 직접 쓰고 읽을 수 있도록 한글 야학 모임을 결성하고, 고단한 일과 후에 자투리 시간을 쪼개 공부했다.

이런 열성에도 불구하고 일본인 여공들의 밀고로 야학은 강제 해산당하기 다반사였다. 조선인 여공들이 우리 말과 글을 공부하는 건 곧 제국주의 정책에 거역하는 행위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같은 노동자임에도 선민의식에 빠져 식민지 조선인을 멸시하던 일본인 노동자들의 편견과 차별의식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하지만 그런 탄압 속에서도 끈질기게 이어진 야학은 해방 이후 재일조선인연맹이 시도한 '민족교육'의 맹아이자 선례로 자리를 잡는다.

Part.7 그들의 애환이 압축된 노동요 '조선인 여공의 노래'

열악한 현실에서도 삶을 이어갔지만, 기본적으로 그들이 처한 조건은 가혹하다는 표현이 상투적으로 들릴 만큼 끔찍한 수준이었다. 방적 공장에서 하루 종일 실을 만지는 여공들은 그 실이 끊어지는 순간을 몸서리치게 겁냈다. 실이 툭 끊어지면 공정이 중단되기 때문이다. 이유를 막론하고 관리자의 가혹한 폭행과 학대가 곧이어 벌어지기에 본능적 공포로 다가오는 일상이었다.

이윤에 혈안이 된 공장은 사람의 건강보다 실과 기계의 안위가 더 중요했다. 그래서 안전장치와 보건위생 설비에는 관심이 없었다. 실의 원료가 되는 목화솜은 흰 눈처럼 작업장 어딜 가나 쌓였지만, 그 먼지는 여공들을 당시로선 불치병인 폐결핵으로 내몰았다. 근현대 문학에서 피를 토하며 시름시름 앓다 죽는 병이던 '폐병'이 바로 결핵이다. 그리고 키시와다 방적 환경은 결핵에 안 걸리는 게 이상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병에 걸려도 병원에 보내줄 턱이 없다. 공장 기숙사 구석방에 방치하는 게 전부다. 천천히 그렇게 골방에서 죽어가는 와중에도 아파서 일을 하지 못하니 급여는 안주지만 식대나 기숙사비는 꼬박꼬박 공제했다. 아등바등 살아보려 병원에 다녀오면 몇 달치 빚이 쌓인다.

그런 상황인데도 화장실은 불결하고 전염병은 쉽게 창궐했다. 이질이나 티푸스 같은 치명적 질병이 퍼졌고, 조선인 여공의 희생률이 일본인보다 더 높았다. 개중에도 더 열악한 조건과 작업에 투입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희생은 방관하면서도 기이하게 회사는 반드시 장례식만은 약식으로라도 치러줬다고 한다. 노동자의 봉기나 이탈을 방지하기 위한 정책적 고려였다. 형식적으로 승려를 불러 염불과 독경을 같은 방 동료들이 밤새도록 지키게 한 다음, 조선 마을 주민의 도움으로 동네 묘지로 향한다.

여기에서 또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일본은 화장이 익숙했지만, 조선과 오키나와 등 식민지에선 매장이 당연시됐다. 살아서도 복지에서 배제 당한 이들이 죽어서라도 누릴 리가 없다. 경비 절감을 위해 이들은 강제로 화장당하고 간이 묘역에 합장된다. 죽기 직전에도 화장하지 말라고 절규하다 죽어갔다는 사연에 모골이 송연해진다. 유가족이 조선에서 시신이라도 보고자 오려면 10일이 걸린다. 학자들은 조사 과정에서 확인한 당시 기록에서 고인의 어머니가 절규하던 '아이고 팔자야!' 문구에 지그시 눈을 감고야 만다. 그렇게 한 줌 재만 남은 이들의 묘지는 현재 위치도 그저 추정될 뿐이다.

그런 애환을 지켜보며 조선인 여공들은 한이 깃든 노동요를 창작한다. 바로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조선인 여공의 노래'다. 가사는 전해지지만, 멜로디는 소실되었기에 노래의 원래 제창은 누구도 알지 못한다. 가사를 듣고 있자니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대표곡 <사계>가 저절로 떠올랐다. 가사에 담긴 참담한 내용도, 서글픈 정조와 따라 부르기 쉬운 간명한 리듬감도 너무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시대를 초월해 악랄한 일제와 그로부터 억압의 기술을 습득한 이 땅의 독재자들과 기득권들의 양상이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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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8 계란으로 바위치기일지언정, 우리는 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참혹한 상황에서도 조선인 여공들은 그저 비극의 잊힌 주인공으로 머물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조선인에 대한 차별에 그저 침묵하지 않고, 일상에선 자신들을 천대하고 헐뜯는 일본인 여공들과 대치하고, 수시로 차별폐지를 요구하는 노동쟁의에 나섰다. 1923년 관동대지진에 이은 조선인 학살 참극처럼 범죄자와 도둑으로 몰아붙이는 데에는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들곤 했다. 대개 일본인 여공과 대립하곤 했지만, 그중에는 우정도 발생했다. 평소 친하던 일본인 노동자의 부당해고에 대항해 조선인 여공들이 항거했다는 쟁의 기록이 발견된다. 그런 사례의 최고 정점은 1930년에 41일 동안 키시와다 방적의 사카이 공장에서 일어난 대규모 쟁의다.

조선인이 중심이지만 일본인 여공도 가세한 투쟁은 공장의 역사 기록에는 누락되어 있지만, 당시에 워낙 큰 사건이라 여기저기 기록이 남아 있던 덕분에 알려질 수 있었다. 일왕이 공장에 잠깐 방문한 기념비는 오늘날도 큼직하게 자리를 차지한 것과 대비되는 지점이다. 이는 현대 일본 사회 역시 일본제국 시절의 체제와 시스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는 제작진의 시각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체 노동자들의 요구조건은 무엇이었을까? 알아보니 대충 이런 내용이다.

*조선인 여공의 요구
- 임금 삭감을 철회할 것
- 통근 수당, 주택 수당, 식비를 줄 것
- 점심, 저녁 때 30분간 휴식을 줄 것
- 목욕 시설, 세탁실을 마련해 줄 것
- 식당 위생 설비를 마련해 줄 것
- 기숙사의 침구는 여름용, 겨울용 두 가지를 지급해 줄 것
- (기숙사의) 전기 코드를 길게 해주고, 겨울에는 화로를 설치해 줄 것
- 업무 시간을 연장하지 말 것
- 외출, 편지, 면회 자유
- 퇴직 수당 지급

물론 이들의 소박한 요구는 용역깡패 상애회와 경찰 공권력의 가혹한 진압에 직면한다. 여공들은 이들과 육탄전을 불사하며 항거했지만 끝내 패배하고 만다. 하지만 몇몇 문헌에선 이들이 패배 후 해산되는 와중에도 모두 빨간 댕기를 통일적으로 한 채 승리자처럼 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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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9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안부 인사, 잘 있습니까?

일본인 사회학자와 역사학자들은 40여 년 동안 오사카 키시와다 방적을 중심으로 형성된 조선인 여공의 감춰진 역사는 여러 복합적 요소를 통합적으로 조명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이들은 일본제국 vs 식민지 조선이라는 '민족 차별'의 당사자이기도 하지만, 식민지인 중에도 여성이라는 '젠더 차별'에 처한 더 열악한 존재였다. 아들은 공부시키고 딸은 학교 대신 10대 초반에 바다 건너 공장으로 보내던 남녀 차별 악습이 횡행하던 부끄러운 악습은 상기되어야만 한다는 환기다. 게다가 조선인 (남성) 관리자나 동포의 고혈을 착취하던 조직 폭력배 집단의 존재 역시 단순히 한일 관계를 넘어 세계 각지에서 발견되는 양상이다.

여기에 일본인 여성 vs. 조선인 여성, 전후에는 일본 내 소수민족 차별로 이어지는 구도까지 인지해야 한다. 그렇게 조선인 여공의 40여 년 시간은 여러 개의 복합적 차별에 수난을 겪으면서도 그저 비참함에 머물지 않고 다양한 방식으로 저항한 것은 물론, 새로운 삶을 개척하고 지역에 뿌리내리는 모험으로 종결된다는 영화적 해석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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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의식의 전달과 현재적 효용을 위한 고심

시사 다큐멘터리의 전형적 전개와 <조선인 여공의 노래>는 제법 다른 면모를 보이지만, 영화의 극적 흥미 대신에 역사를 피상적으로 접해온 현재 세대에 친절한 가이드로 잊힌 역사를 복원하고자 하는 제작진의 의도와 고심이 누수 없이 전달되는 데엔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

그저 통상적인 일제강점기 해석, 민족 감정으로 가해자와 피해자를 뭉뚱그려 추상화하는 대신에, 다양한 단면과 결들을 충실한 고증을 덧붙여 소개해 관객이 실제 당대 현실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처럼 기회를 제공한다. 울컥할 만한 장면에서도 신파적/최루성 연출 대신에 담담하게 역사 체험과 재현에 집중하는 형식은 이 영화를 만든 이들이 무엇을 목표로 하는지 이심전심으로 깨닫게 해준다.

영화는 최소 규모 자원과 예산으로도 주어진 조건을 최대한 살려내려는 분투의 흔적이 가득하다. 거기에는 미니멀리즘을 제대로 구현한 당대 공장과 여공들의 일상 재연 노력과 함께, 재연 연기자들의 활약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재일동포 1~2세대, 오사카 한인사회의 시조가 되었던 조선인 여공들의 후예라 할 동포 4세대 연기자들의 비중은 영화의 화룡점정 아이콘이다.

엔딩크레디트를 보면 이들이 재일동포 극단 소속임을 알 수 있다. 이들의 얼굴은 시간을 초월해 어떤 기시감을 관객에게 전달한다. 그리고 현실에서 양심적인 진보 지식인들이 약방 감초처럼 배경 해설을 구사해 이 영화에 수록된 내용이 일방적이지 않음을 증빙한다. 그리고 영화에 참여한 현지 스태프들이 과거 일본인 증언자 역할까지 병행해 검소하지만 조악함과는 거리가 먼 구성을 보강한다.

그중에도 무척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차별> 등의 개봉작에서 낯익은 강하나 배우다. 그는 4세대 동포 배우라는 이점을 살려 주요 배역은 물론, 영화 전체를 해설하는 포지션까지 복합적인 역할을 소화하며 종횡무진한다.

조선인 여공 역할과 생존자들을 만나고 인터뷰하는 역할, 그리고 주요 배경을 답사하며 관객을 대리해 영화의 전개를 풀어가는 역할까지 오롯이 소화한다. 특히 강하나 배우가 1인 2역으로 나서는 장면이 영화 전체의 주제를 압축하듯 관객에게 전한다. 여공의 현신이 빨간 벽돌로 높다랗게 세워진 장벽에 손을 대는 순간, 현재 세대를 상징하는 청년의 형상이 동시에 동일한 동작을 취한다. 그렇게 과거와 현재가 만난다. 과격한 선동과 사실관계 안중에도 없는 일방적 주장이 난무하는 가운데, 오랜만에 청량하게 볼 수 있는 영상 교재가 등장하니 그저 반갑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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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시네마달
 
<작품정보>
조선인 여공의 노래
A Song of Korean Factory Girls
2024 | 한국 | 다큐멘터리
2024.08.07. 개봉 | 83분 | 전체관람가
감독 이원식
출연 강하나, 조청향, 조사랑
프리젠터 강하나
제작 영화제작소 정감, 정감스토리
배급 (주)시네마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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