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신의 꿈, '김치 냄새 나는 조선기독교 만들자' 였다"

정병진 2024. 8. 6.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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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기독교 사상가로 옥고 치른 김교신 선생... 93세 넷째 딸 김정옥을 만나다

[정병진 기자]

"봄비 쏟아지던 날 새벽, 이 바위틈의 얼음 덩어리도 드디어 풀리는 날이 왔다. … 동사한 개구리 시체를 모아 매장하여 주고 보니, 깊은 물 아래에 아직 두어 마리 기어다닌다. 아, 전멸은 면했나 보다."

1942년 3월 30일, 당시 조선 유일의 성서 잡지 <성서조선>(제158호)에 실린 권두문 '조와(弔蛙, 죽은 개구리를 조문함)' 마지막 대목이다. 이 글은 혹한의 겨울에 얼어 죽은 개구리들을 슬퍼하면서도, 여전히 아직 살아남아 기어코 봄을 맞은 두어 마리 개구리가 있음을 알린다.

일제는 이 글을 문제 삼아 잡지 <성서조선>를 폐간하고 필진과 독자를 모두 검거, 구속하였다. 일제의 가혹한 탄압을 '혹한의 겨울'로, 그 가운데 무수히 죽었으나 끝내 살아남은 조선 민중을 '개구리'에 빗댄 글이라는 것. 이른바 '성서조선 사건'이다.
 
 1927년 2월, <성서조선> 창간멤버들. 함석헌, 류달영, 송두용, 김교신(아래 왼쪽에서 세 번째) 등이 있다.(사진출처: 함석헌기념사업회)
ⓒ wiki commons
 
'조와(弔蛙)'는 김교신 선생(1901-1945)이 쓴 글이다. 그는 일제 강점기 3.1운동에 참여하였고 일본에 유학해 지리박물학을 공부하였다. 유학 8년 중 7년 간을 일본의 대표적 기독교 사상가 중 한 사람인 우치무라 간조(内村鑑三, 3861-1930)에게 성서와 애국 신앙을 배웠다.

우치무라 간조는 일본의 조선 식민 지배와 제국주의 침략 전쟁을 반대한 인물이다. 김교신은 귀국 후 동지들과 <성서조선>을 펴내기 시작하여 중등교사(당시 '고등보통학교')로 일하며 주필로 활동하였다.

그러다 '성서조선 사건'으로 당시 동료 필진인 류달영, 함석헌, 송두용 등 12명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이후에는 흥남용흥비료공장에서 조선인 노무자 주택과 생활 관리를 맡아 일하다가 발진티푸스에 감염돼, 조선의 독립과 해방은 보지 못하고 별세하였다.

광주의 한 선배는 내게 "김교신 선생의 넷째 따님이 광주에 사시는데, (이미) 연로하시니 돌아가시기 전 인터뷰해서 아버지 기억을 기록으로 남기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교신 선생의 자녀 중에 현재 생존해 계신 분은 딸 네 분이다. 그 중에 세 분(정혜,정복, 정애)은 미국에서 살고 있다. 국내에 계신 분은 넷째 따님 김정옥 님(93세)이 유일하다.

기자는 김교신 선생의 넷째 딸 김정옥님을 지난 달 30일 전남 광주 한 자택에서 만나 인터뷰하였다. 그동안 김교신 선생의 생애는 주로 유고와 평전 등으로 알려졌다. 이번 인터뷰는 친딸의 생생한 증언이라 남다른 의미가 있다.

김정옥님은 바깥 출입은 지팡이 두 개를 짚고 해야 하였으나 연세에 비해 기억력이 매우 또렷한 편이었고, 대화를 주고받기에도 별 어려움이 없었다. 그는 니이호리 구니지(도쿄 YMCA 학원 원장)가 2004년에 일본어로 출간한 <김교신의 신앙과 저항-한국 무교회주의자의 전투적 생애>를 지난 2012년 직접 번역해 국내에 소개하였다(한편, 국내에선 지난 6월 <김교신 평전(서로북스)>이 출간되기도 했다).

김정옥은 부친은 교사 생활을 할 때 "조선 지도를 색칠까지 해가며 익히게 하였고 시골 인물까지 조명해 아이들 기를 살려 주려 힘썼다"고 증언하였다. 또한 "성서를 배워 삶의 기초를 단단히 하고, 김치 냄새 나는 기독교를 만들자"고 강조했다고 말한다. 다음은 그와 나눈 인터뷰를 일문일답으로 정리한 것이다.

"아버지는 한국 지도 색칠하는 걸 중요시 여겼다"
 
 김교신 선생의 넷째 딸 김정옥 님
ⓒ 정병진
 
- 지금 전남 광주에 살고 계신다. 원래 고향은 함흥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전남 광주에 내려와 사시게 됐나?

"아버지 고향이 함흥이고 우리는 서울에서 다 태어났다. 서울 공릉리에서 내 밑 남동생까지 태어났다. 가난해서 배고프니까 밥 안 굶기려고 (어머니가) 열일 곱에 이곳으로 시집 보냈다."

- 17세 때인 1948년 10월 10월 20일 기차로 광주에 처음으로 오셨다. 근데 그때 송정리역에서 마중 나올 사람을 기다렸는데, 나온 사람이 없었다고 들었다. 어찌된 일인가?

"당시 여순사건 때문에 통행금지가 돼 아무도 못 다녔다. 거기서 종사하는 사람(역무원)도 몰랐다. (기자: 그래서 어떻게 하셨나? 굉장히 당황하셨을 것 같은데.) 당시 신랑 집으로 바로 왔다. 서울에서 함석헌 선생 주례로 간단히 혼례를 치른 뒤 신랑과 함께 내려오는 길이었다. 신랑이 있으니까 길은 알았다. 몰래 도둑 시집을 온 거나 다름없다."

- 14살 때에 아버지를 잃으셨다. 아버님 김교신 선생님은 주로 학교 선생님으로 일하셨다. 학생들한테 무척 엄하셨고 별명도 '면도날'로 알려졌다. 자녀 교육도 매우 엄하셨나?

"무척 엄하게 하셨다. 그러면서도 셋째 언니(정혜)는 이뻐했다. (그 셋째 언니는) 얼굴도 훤하게 이쁜 데다가 말을 잘해서 이뻐한 거 같다."
 
▲ 김교신 선생의 가족 사진 1930년 3월(당시 김교신은 29세), 맨 뒤 왼쪽이 장녀 김진술, 오른쪽이 김교신, 중간 왼쪽이 심부름하는 아이 순선, 그 옆이 모친 양신, 부인 한매, 앞열 죄부터 차녀 김정혜, 삼녀 ㄱ;김시혜이다.
ⓒ 김교신 전집 제4권(1975년)에 실린 사진
 
- 김교신 선생보다 사모님(한매) 연세가 4살 많다. 게다가 김교신 선생님이 열두 살 때 결혼했던데 왜 이렇게 일찍 한 건가? 일제 강점기 정신대로 끌려갈까 봐 처녀들은 일찍 시집 보내곤 했다지만 사내를 열두 살에 장가보냈다는 게 특이하다.

"정신대는 우리 나이 때 그랬고 아버지 시대 때는 안 그랬다. (그땐) 12살에 한 것도 오히려 좀 늦은 거였다. 처음에는 8살에 하려고 마음먹었다(고 들었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할아버지 3년 상을 치르고 결혼했다. 나이 많은 여자를 데려온 까닭은 집안일 시키려는 거였다. 우리 집뿐 아니라, 부자일수록 어린 아들을 (일찍) 결혼시켰다."

- 보니까 어머님(한매)께서 굉장히 고생을 많이 하셨을 것 같다.

"고생도 많이 한 것 같지만, 당시 우리 할머니 덕분에 (어머니께서) 글도 배우고 그랬다. 신랑한테서 편지 오면 누구한테 가서 읽어 달라고 하기 힘드니, 할머니가 독선생(과외선생)을 데려다가 며느리들을 가르쳤다."
 
▲ 김교신 선생의 정릉 자택 북한산 자락 정릉에 위치했던 김교신 선생의 자택. 오른쪽 돌로지은 건물은 선생이 손수 지은 서재이고 그 옆 건물은 가족과 하숙생들이 살던 주택이다.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 유족 제공
 
- 남은 사진을 보면 당시 살던 정릉의 집이 아주 넓고 멋져 보인다. 그 집에서 대가족이 살았고, 친척과 제자들도 들어와서 살기도 하고 그랬다던데 불편하지 않았나?

"그 집에서 하숙도 하고 그랬다. 겨울 방학이면 (성서조선) 잡지 독자들 일주일씩 있다가 자고 가기도 했다. 여럿이 살려다 보니 집 뒤에 방을 달아냈다. 그땐 다 그렇게 살았다."

- 정릉에 살았을 때 큰 텃밭도 있었다고 들었다. 어릴 적 아버지의 농사도 거들어 드리곤 했나?

"당연하다. 깨나 콩은 가을이면 다 거둬야 하는데, 바빠서 시간이 없어서 거두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러면 온 밭에 콩이 그냥 다 하얗게 튄다. 그러면은 그것을 아버지 고무신에다 한가득 주워 담아 오면 그거 하나에 아버지가 1원씩 줬다."

- 김교신 선생의 신앙과 애국심은 남달랐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일기와 성서조선이라는 잡지로 글을 남겼고 책도 남겼다. 부친의 여러 가르침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무엇인가?

"지도의 등고선 색칠하는 것, 지방 시골의 인물이라도 아이들 기를 살려주는 게 중요하다는 것. 그것이 제일 컸다. (당시 아버지는) 지도를 색칠하는 숙제를 내주고, 제대로 안 해오면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면 이다음에는 그걸 안 잊는다는 거였다."

- 김교신 선생은 정릉의 집 옆에 서재를 돌로 손수 지었다고 한다. 혹시 그 서재가 기억나는가?

"기억은 난다. 우리는 아버지 서재에 못 들어갔다. 서재에 들어가 청소도 못했다. 서재 청소는 직접 하셨다. 꽂아 둔 책이 흐트러지거나 없어질까 봐 그런 거다."

형 안 받은 채 1년 감옥살이... "'미국 돈 받지 말고 우리 기초부터 세우자'했던 분"

- 김교신 선생님이 가깝게 지낸 분들 중에 함석헌, 유영모 선생 같은 분이 계셨던 걸로 안다. 그런 분들이 집에 찾아와 직접 만나신 적 있는가?

"무슨 일만 있으면 우리 집으로 다 모이곤 하였다. 송두용 선생(1904-1986)은 늘 식사 기도가 길었다. 기도하면 국이 다 식어버렸다.(웃음) 그래서 식사하기 전에 (다들 그 분에게) '기도 좀 짧게 하라'고 그러곤 했다. 함석헌 선생, 유영모 선생은 북한산을 넘어서 찾아오시곤 했다. 옛날에는 다들 걸어서 다녔다. 돌아서 (우리 집에) 오려면 그게 더 멀었다. 북한산을 넘는 게 보기에는 먼 것 같아도, 가까웠다."

- 김교신 선생님은 일본의 대표적인 기독교 사상가 우치무라 간조를 스승으로 여기시고 그분 밑에서 7년을 배우셨다. 우치무라 간조에게 성서와 애국 신앙을 배우셨다.

"(그런데) 일본 사람에게 배웠다고 그것을 흉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때는 우리나라가 일본의 속국이나 마찬가지였다. 근데 그런 사람한테 배웠다고 지금 그걸 트집을 잡았다."
 
▲ 김교신 관련 책들 김교신 선생을 조명하는 책들. 맨 왼쪽의 <김교신의 신앙과 저항>은 니이호리 구니지가 썼고 김정옥 님이 번역하였다.
ⓒ 정병진
 
- 김교신 선생님의 삶과 가르침이 이제 백 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인 지금에 이르러 조명 받고 있다. 관련 책들도 계속 나오고, 따님께서도 니이호리 구니지가 일본어로 쓴 쓴 <김교신의 신앙과 저항>을 직접 번역하였다. 이 책을 어떻게 번역하기에 이르렀나?

"저자가 한국에 오면서 책을 가져와 나눠 줬는데 나는 못 받았다. 그러다 보니 그 책을 구하기까지 거의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겨우 입수해서 번역한 거다."

- 일본인 니오리 구이지라는 분이 어떤 분이기에 김교신 선생님 책을 썼나?

"세미나 참석차 일본 대표로 온 사람이다. 일본 도쿄 YMCA 학원 원장이다. 그가 우리나라에 와서 우리 언니도 만나고 그랬는데 그 보고를 하고자 책을 썼다고 한다."
 
▲ 김교신의 성서 연구서 김교신 선생이 남긴 산상수훈, 골로새서, 데살로니가 전서, 시편 연구서
ⓒ 정병진
 
- 김교신 선생에 대해서 이제야 점차 활발한 조명이 되는 추세다. 그는 일제 강점기 <성서조선>을 꽤 오래 펴냈고 '조와'라는 글을 써서 옥고를 치렀기에 애국자로 널리 알려졌다. 그런데 2010년에 이르러서야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았다. 왜 이렇게 늦게야 추서되었나?

"증거가 없어서다. 재판으로 형을 언도 받아야 독립운동가로 인정된다. 그런데 서대문 형무소에서 1년 간 옥고를 치렀지만 형을 받지는 않았다. '이렇게 공부 많이 한 사람은 이런 데(감옥)다가 썩히기 아깝다'고 해서 일본 검사가 풀어 줬단다. 그런데 해방된 뒤 우리 아버지 서류를 다 찾아봐도 증거가 없어 증명하는 데 애를 먹었다."

- 해방 뒤 긴 세월이 흘렀으나, 현 대통령도 그렇고 현 정부가 대일 관계에 있어 할 소리를 제대로 못 한다는 지적이 많다. 국민들 애국심도 상당히 많이 희미해져 가는 것 같다. 그런데 김교신 선생님은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 "신앙도 서양 것만 따라가지 말고 우리 자신의 신앙을 제대로 가져야 한다"는 의식을 갖고 살았다. 아버지, 즉 김교신 선생이 오늘 우리 한국 사회에 주는 교훈이 뭐라고 생각하는가?

"나쁜 말로 하면, '미국에서 주는 '더러운 돈' 그런 거 받지 말고 우리끼리 가난한 대로 살자'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 당시 미국에서 주는 돈 받아서 목사와 선교사들이 다 살았다. (아버지는) 그런 돈 받지 말고 우리끼리 성경을 공부해 삶의 기초를 단단히 하자, 조선 김치 냄새 나는 기독교를 만들자, 그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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