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에르노 책 번역한 작가가 먼저 한 일

김규영 2024. 8. 6.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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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자리> 번역한 신유진 작가와 함께한 정담북클럽

[김규영 기자]

▲ [작가없이뒷담화]에서 함께 "남자의 자리"를 읽고 있다.  정담북클럽은 [작가두고앞담화]로 작가를 만나기 일주일 전에 북클럽회원만의 [작가없이뒷담화] 시간을 갖는다.
ⓒ 김규영
"제 책이 아닌데 사인하려니 이상하네요."

신유진 작가는 사인을 청하는 독자 앞에서 머뭇거렸다. <열 다섯 번의 낮>을 포함한 여러 권의 산문집과 소설집 <그렇게 우리의 이름이 되는 것이라고> 등 그가 쓴 책이 아니라 그가 번역한 아니 에르노의 <남자의 자리>를 내밀었기 때문이다.

작가의 번역

지난 7월 마지막 목요일 저녁, 정담북클럽은 'Part.3 작가의 번역'이라는 제목으로 신유진 작가를 초대했다. 독자가 하나의 작품을 만나기까지 책은 여러 번의 옮기는 과정을 거친다. 목소리를 글로 옮기고, 글을 활자로 옮기고, 활자를 종이에 옮긴다. 그중에서 낯선 언어를 옮기는 번역가의 존재가 늘 궁금했다.

특히 2022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아니 에르노의 초기 작품 <남자의 자리>(1984BOOKS)를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은 어떠했을까.
▲ 신유진 작가 정담북클럽에서 독자와 만나고 있다.
ⓒ 문가은
아니 에르노는 '체험하지 않은 현실은 쓰지 않는다'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작품을 처음 읽는 독자는 작가의 노골적인 솔직함에 깜짝 놀란다. 이렇게까지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니!

솔직함에 익숙해지면 더 놀라운 경험이 찾아온다. 독자가 읽고 있는 것은 낯선 외국 작가의 '나'라는 목소리인데, 어느새 시공의 거리를 뛰어넘어 독자인 나의 목소리로 쓰여진 것 같다는 착시효과가 나타난다.

작가는 프랑스의 작은 도시 이브토에서 카페 겸 식료품점을 운영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묘사한다. 작가가 실제 경험한 매우 구체적이며 개인적인 장면을 읽고 있는데, 독자인 우리는 우리의 아버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가 살아온 시대, 살아온 방식, 나와 그의 관계를 떠올리고 있다.

공동의 글쓰기

신유진 작가는 아니 에르노가 타인과 공유하는 공동의 글쓰기를 추구했다고 설명한다. 우리가 <남자의 자리>를 읽으며 경험한 것은 201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올가 토카르추크가 말한 문학의 특성을 보여준다. 그는 '문학은 개별적이면서도 특별한 자신만의 언어가 타인의 언어와 만나는 가장 독창적인 순간을 의미하며, 사적인 것들이 공적인 것들로 탈바꿈하는 공간'이라고 말한 바 있다.

사람들은 아니 에르노의 작품을 자전적 소설이라고 분류하면서 솔직하게 드러내는 용기를 말하곤 한다. 신유진 작가는 아니 에르노가 보여준 진짜 용기는 실제 아버지의 있는 모습 그대로가 문학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한 사실이라고 강조한다. '진실'에 닿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예술적인 것, 무언가 '흥미진진한 것' 혹은 '감동적인 것'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라고 다짐하듯 말한 바 있다. ( <남자의 자리>, 19쪽)

쓰고 옮기는 일을 하는 사람
▲ 신유진 작가 정담북클럽 [part.4 작가의 번역] 자리에 초대되었다.
ⓒ 김규영
신유진 작가는 자신을 번역가로 소개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다고 했다. 단지 좋은 작품을 소개하고 싶었을 뿐이라고 한다. 그의 번역으로 꾸준히 아니 에르노를 소개하고 있던 1984BOOKS 출판사도 아니 에르노가 노벨문학상을 받을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큰 상을 받고 나니 어쩐지 멀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한다.

글을 옮기는 것은 작가의 목소리를 옮기는 것이라고 신유진 작가는 말한다. 번역가로서 작품 이해력은 물론, 인내와 체력도 필요하지만, 작가의 목소리를 잘 아는 것이 중요하다. 번역한 글에 쉼표 하나 찍는 것조차 작가의 목소리를 알아야 가능하다. 말이 글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작가의 인터뷰 영상 등을 많이 본다고 한다. 작가가 말하는 방식을 관찰한다. 소리의 높낮이, 말하는 속도, 호흡의 방식, 리듬감을 숙지하는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목소리를 체득한 후에 우리말의 글로 옮기는 작업에 임한다.
▲ 아니 에르노 작품들 1984BOOKS 츨판사의 신유진 번역 작품들
ⓒ 김규영
여선생님이 내 언어를 '고쳐 주셨기' 때문에, 훗날 나는 아버지에게 '자빠지다' 또는 '15분 남은 11시'라는 표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주며 고쳐주려 했다.

- "남자의 자리" (58쪽)

위 인용문에서 따옴표와 굵은 글자 모두 원문을 따른 것이다. <남자의 자리>는 작가의 아버지가 살았던 노르망디 지역의 사투리가 많이 등장한다. 아니 에르노는 아버지가 속한 세상, 이른바 하류 문화의 언어를 그대로 적으려고 했다. 신유진 작가도 낯선 표현들을 가능한 그대로 옮겨 왔다고 했다.
실제 인물을 작품에 등장시킨다면?
▲ 정담북클럽_신유진 작가 독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 문가은
아니 에르노의 작품은 문학이 무엇이며, 우리의 기억과 증언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신유진 작가는 '실제 인물을 작품에 등장시키는 '재현의 윤리'가 어디까지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던졌고 참석한 모두가 의견을 주고 받았다.

순식간에 신상털기가 완료되는 요즘 시대는 더 신중해야 할 것은 아닌지. 허락과 동의를 구하지 않고 누군가와 공유한 경험을 쓰면 안 되는 것이 아닌지. 그러나 작가는 스스로 감추고 싶었던 자신의 바닥으로 내려가는 존재가 아닌지. 그런 과정을 통해서 어떤 '진실'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닌지. 작가의 문제가 아니라 독자의 문제는 아닌지. 문학보다 가십에 열광하는 것은 아닌지, 등 군산의 인문학창고 정담에서 나누는 여름밤의 토론은 끝을 맺기 어려웠다.

신유진 작가는 우리에게 아니 에르노의 목소리를 옮겨 주었다. 또한 아니 에르노가 고민했던 기억과 진실의 문제, 그리고 문학의 문제를 질문과 토론의 방식으로 옮겨주었다. 조만간 번역 작품이 아닌 신유진 작가의 작품으로 만나 대화하는 시간을 기대해 본다.

덧붙이는 글 | 개인 SNS 게재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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