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 한동훈과 민심의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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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서 늙은 어부는 며칠에 걸친 고독한 사투 끝에 청새치를 매달고 귀항한다.
하지만 그 거대한 물고기는 피 냄새를 맡고 몰려든 상어 떼의 공격으로 이미 앙상한 뼈만 남은 상태.
그는 일성으로 "민심의 파도에 올라타자"고 외쳤지만, 먼저 부서진 배와 어구부터 정비해야 하는 처지다.
4·10 총선의 패장이긴 하지만, 그래도 다시 여당을 이끌고 거대 야당에 맞서는 정치력을 발휘할 기회를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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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서 늙은 어부 산티아고는 며칠에 걸친 고독한 사투 끝에 청새치를 매달고 귀항한다. 하지만 그 거대한 물고기는 피 냄새를 맡고 몰려든 상어 떼의 공격으로 이미 앙상한 뼈만 남은 상태. 노인도 손과 등, 어깨 할 것 없이 온몸 구석구석 부상을 입었다. 국민의힘 새 선장이 된 한동훈 대표도 지금 그런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전쟁 같은 전당대회를 치르느라 자신과 당 모두 온전한 상태가 아니다. 그는 일성으로 “민심의 파도에 올라타자”고 외쳤지만, 먼저 부서진 배와 어구부터 정비해야 하는 처지다.
당원들이 한 대표에게 다시 한번 집권여당 키를 맡긴 건 무엇보다 정권 재창출에 대한 기대 때문일 터다. 다른 어부들이 가지 않는 먼바다로 나가 대어를 낚을 수 있는 현재의 가장 능력 있는 어부라고 본 것이다. 4·10 총선의 패장이긴 하지만, 그래도 다시 여당을 이끌고 거대 야당에 맞서는 정치력을 발휘할 기회를 준 것이다. 녹초가 된 몸으로도 사자 꿈을 꾸는 산티아고처럼.
한 대표는 ‘국민 눈높이에 반응할 것’ ‘미래를 위해 유능해질 것’ ‘외연을 확장할 것’이 본인과 당에 요구된 책무라고 했다. 63% 득표율의 의미를 ‘변화’에서 찾았다. 그런데 변화를 위한 항해를 위해서는 당의 화합, 특히 한 배를 탄 대통령실과의 관계 회복이 당면한 과제다. 좁은 배 위에서 서로 다투다 자칫 연안을 벗어나기도 전에 배 자체가 뒤집혀버릴 수 있다는 위험성이 전당대회 때의 진흙탕 싸움으로도 확인됐기 때문이다. 한 대표에겐 당 변화를 주도하며 자생적 리더십을 드러내는 일이 중요하지만, 당정 관계 회복 없이 변화도 성공하기 어렵다는 게 딜레마다. 서로 팔을 감는 러브샷이나 “잘해보라” “더 잘하겠다”는 덕담만으로는 풀리지 않는 현실적인 벽.
한 대표가 당의 나침반으로 ‘국민 눈높이’를 내건 것은 나침반이 어디를 가리키느냐에 따라 대통령실과 반대 방향으로 갈 수 있다는 점도 함의한다. 지난 1월 김건희 여사 디올백 수수 의혹을 두고 그가 말한 국민 눈높이는 실상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를 해야 한다는 뜻이었고, 이는 두 사람의 갈등이 수면 위로 드러나는 계기가 됐다. 대통령이 두 번이나 거부권을 행사한 채상병 특검법 역시 마찬가지다. 한 대표는 민심을 이유로 제3자가 추천하는 방식의 특검 도입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문제는 제3자 추천 방식 특검법이 여당의 공식 테이블에 올려지는 순간 당내 파열음도 불가피하다는 점이다. 그동안 “탄핵으로 가는 문을 스스로 열어주는 것”이라며 특검 자체를 반대해온 대통령실이나 친윤계에서 이를 수용할 가능성은 현재로서 희박하다. 여당이 일단 법안을 발의할 경우 문제는 더 커질 수 있다. 가결 칼자루를 쥔 민주당이 태도를 바꿔 법안을 받겠다고 나선다면 대통령실은 진퇴양난에 빠지게 된다. 여당이 내놓은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도, 거부권을 행사한다 해도 국회 재의결을 막을 수도 없다. 실제 이렇게 전개되면 당정 관계는 루비콘강을 건너게 된다. 한 대표는 과연 설득을 통해 대통령실의 양보를 받아낼 수 있을까. 자신의 공언은 지키면서 당정 관계 파국을 막을 묘안은 있는 걸까. 그의 앞에 반드시 헤쳐나가야 할 격랑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한 대표 스스로도 변화에 대한 결연한 각오가 필요하다. ‘여의도 사투리’를 쓰지 않겠다고 했지만 ‘프로’ 정치인의 길을 택한 이상 여의도 방식에 적응해야 한다. 검사 출신 초보 정치인이란 입지가 풍기는 불안감을 지우기 위해 인내와 겸손, 유연성을 체득하고 있음을 보여줘야 한다. 막스 베버는 ‘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 “정치란 열정과 균형감각 둘 다를 가지고 단단한 널빤지를 강하게 그리고 서서히 뚫는 작업”이라고 규정했다. 정치가는 널빤지에 구멍을 뚫겠다는 열정을 가져야 하지만 널빤지를 단칼에 뚫어버리려 하다간 자칫 널빤지 자체를 깨뜨려버릴 수 있다는 경고를 담고 있다.
지호일 정치부장 blue51@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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