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호근의 세사필담] 20세기에 이런 나라가 없었다
필자는 최근 연해주 한인들 얘기에 푹 빠져 지냈다. 1860년대부터 두만강을 건넌 조선인들은 연추 지역을 거쳐 연해주 전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3·1운동이 일어난 시점에 연해주엔 10만 이주민이 살았다. 간도 이주민을 합하면 30만 명에 달했다. 이들은 척박한 땅을 개간하고 가축을 치면서 총을 들었다. 궁핍했던 이들은 자식들을 독립의용대에 선뜻 내줬다. 독립군은 간도에 4000명, 연해주에 5000명을 헤아렸다. 무기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던 독립부대는 여순 반도와 연해주 해안을 점령한 일본군 5개 사단과 대적했다. 나라를 잃은 지 10년, 1920년대 초반 외지(外地) 독립투쟁사다.
연해주 의병대는 아쉽게도 볼셰비키 정권에 의해 무장해제 됐고, 간도 독립지대들은 일본이 만주국을 구축하자 분산 투쟁을 고수하거나 상해임시정부를 따라 중국 내륙으로 이동했다. 독립군이 대륙으로 전개하는 동안 연해주 한인들은 2차 대전 직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됐음을 두루 아는 바다. 카자흐스탄 불모지에 17만 한인들이 버려졌다. 눈물의 역사가 따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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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해주와 간도에 묻힌 독립투쟁
독재와 항쟁 속 이룩한 자립투쟁
누구도 흉내 못 낼 한국의 역투
권력투쟁 정치가 망칠까 두려워
」
눈물은 결행(決行)의 사립문, 2차 대전 종전까지 세계 독립투쟁사에서 한국이 유독 두드러진 이유다. 규모와 열정 면에서 그렇고 특히 외지에서 분투했다는 점이 그렇다. 남미와 동남아시아는 규모가 크지 않은 내지(內地) 게릴라전이었다. 나치가 20만 명을 학살한 폴란드 바르샤바 봉기(1944) 역시 내지 항쟁이었다. 베트남은 2차 대전 이후에야 본격적인 항전에 돌입했다. 제국을 상대로 한 한국의 독립투쟁은 연해주, 간도, 중국 내륙, 그리고 미주(美洲)로 끈끈히 이어져 결국 나라를 되찾았다. 미국이 투하한 원폭의 산물이라는 속설을 과도하게 강조하면 독립투쟁의 한국적 특성이 묻힌다.
제국 일본은 조선인의 끈질긴 저항 기질을 읽지 못했다. 3·1운동 당시 일본이 가장 의아해했던 점이 이것이었다. 사람들이 모이면 만세 함성이 일었다. 모든 장터에는 태극기와 민족대표를 자처하는 깃발이 나부꼈다. 누가 시키지 않았건만 노인단, 청년단, 혁명단, 학생단, 조선독립단을 표방하는 사람들이 시위에 활력을 넣었다. 모두가 주체였다.
광복 79주년, 어느덧 1945년생 해방둥이가 증손을 볼 만큼 세월이 흘렀다. 세 세대가 거쳐온 여정이 만만치는 않지만, 적어도 증손 세대가 글로벌 시선과 감각을 갖출 기반은 닦았다. 세계은행은 한국을 중진국 함정을 벗어난 ‘성장의 슈퍼스타’로 호명했다. 특히 한국의 ‘3i 전략’, 투자(investment), 기술 도입(infusion), 혁신(innovation)에 주목했다. 해외차관을 들여와 중화학공업을 제대로 일으킨 나라가 한국이다. 강제저축을 기억하는가, 월급에서 10%를 떼 내 우체국 통장에 의무적립했다. 모든 외제 상품은 수입금지, 외제 담배를 연기로 식별해 처벌한 기법도 한국적이다. 그렇게 아낀 돈으로 한국과학기술원(KIST)을 비롯해 수백 개 과학연구소를 설립했다. 군부독재, 광주항쟁, 민주화 투쟁에 얼룩진 세월이었지만, 결국 선진한국을 향한 자립투쟁이었다.
선진국에 당도한 유일한 국가 한국은 잠시 긴장을 놓을 틈이 없는 나라로 또한 유일하다. 동북아시아는 세계 두 번째로 위험한 화약고가 되었다. 세계 무력의 60%가 운집한 한복판에서 삐끗하면 핵전쟁의 중심부가 될 위험천만한 상황이다. 독립투쟁과 자립투쟁의 역투가 무화(無化)된다. 지난달 31일, 이스라엘은 이슬람 무장단체 최고 지도자인 하니예를 정밀 타격해 사살했다. 이스라엘이 규정한 ‘악의 축’과 반이스라엘 연대가 부르짖는 ‘저항의 축’은 1500년 동안 지속된 종교갈등의 연장선이다. 종교와 인종은 보복과 응징의 끈질긴 씨앗이다. 반면 동아시아 분쟁은 문명충돌이 아니라 타협 가능한 이념, 역사분쟁이다.
대륙과 해양 분쟁선이 정확히 한반도의 허리를 관통하는 현실에서 21세기형 독립운동, 보국과 안민의 지략은 무엇인가? 경제 대국 한국이 동북아시아 전운(戰雲)을 식히는 ‘힘센 교섭국’이 될 길은 없는가? 전쟁 참화를 겪었고 허리가 잘렸으니 더욱 자격이 있다. 삼국 중 가장 빈곤했던 조선은 일본엔 통신사를, 중국엔 연행사를 보내 평화를 꾀했다. 서양 제국이 몰려들자 일본은 형제애를 버렸고, 중국은 조공국을 속국으로 간주해버렸다. 동북아 삼국 간 오랫동안 지속된 무언의 화약(和約)을 우리는 저버린 적이 없다. 평화와 우애를 끝내 지키려 했던 나라가 이웃 나라에 의해 쑥대밭이 된 것도 한국이 유일하다.
광복 79년 세월은 헛되지 않았다. 한국 문화가 세계인을 매료시키고, 청년 세대가 감격의 승전보를 연달아 보내고 있다. 총, 활, 칼, 쏘고 찌르는 독립투쟁의 끈질긴 유전자가 21세기형 경쟁 인자로 진화해 세계를 매혹한다. 그런데 저토록 죽 쑤는 정치, 총, 활, 칼을 당쟁(黨爭)에 동원하는 비루한 정치라니. 20세기 공든 탑을 지키는 것은 정치권의 몫인데 없는 것만 못한 국회, 21세기에 이런 나라도 없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 한림대 도헌학술원 원장·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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