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호의 시시각각] 스미스씨가 여의도에 갔다면

서경호 2024. 8. 6.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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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호 논설위원

옛날 흑백영화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는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졸지에 상원의원에 지명된 정치 문외한 제퍼슨 스미스는 시골뜨기 소년단 지도자다. 허수아비에서 벗어나 제대로 일 좀 해보려다 의회에서 제명될 위기에 처하자 필리버스터에 나선다. 수정헌법과 성경 구절을 읽고 지친 몸을 배배 꼬며 장장 24시간을 버틴 끝에 쓰러진다. 이를 지켜본 기존 정치인이 양심선언을 한다. 영화는 해피엔딩이다.

야당이 ‘전 국민 25만원 지원법’ 등 7건의 법안을 잇따라 강행 처리하자 여당은 건건이 필리버스터로 맞섰다. 이 과정에서 국민의힘 박수민 의원(15시간50분)이 필리버스터 최장 기록을 세웠다. 박 의원은 ‘25만원법’은 매표행위라고 했다. 다섯 자녀를 둔 박 의원은 “아빠는 25만원 상품권을 반대했지만 가장 빛나는 모습으로 너희들의 미래를 책임진다”며 울컥하기도 했다.

박수민 국민의힘 의원이 지난 1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416회국회(임시회) 제2차 본회의에서 2024년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위한 특별조치법안(대안), 일명 '25만원법'에 반대하는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을 하고 있다. 뉴스1

「 기준 중위소득 인상, 임금 대지급
‘25만~35만원’ 지원보다 나은 대안
재정 제대로 잘 쓰는 경쟁을 해야

‘25만원법’은 전 국민에게 ‘소득 수준에 따라’ ‘25만~35만원 범위에서 대통령령으로 정한 금액’을 지역사랑상품권으로 지급하도록 했다. 그래도 정부 권한인 예산 편성에 국회가 개입해 삼권분립에 위배된다는 비판은 피하기 어렵다. 국회예산정책처는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에 12조8193억~17조9471억원의 재정이 필요하고, 여기에 액면가의 10%에 달하는 상품권 발행 비용까지 더하면 14조~20조원이 들어간다고 분석했다. 추경 편성이 불가피한 법을 통과시켜 놓고 구체적인 건 정부가 알아서 하라고 하는 건 ‘눈 가리고 아웅’이다. 정부 동의 없이 예산안 증액을 못 하게 한 헌법 정신은 빛을 잃었다.

전 국민 대상의 상품권 지급이 왜 문제인가. 첫째, 소비 진작 효과가 크지 않다. 2020년 재난지원금은 22~42%만 소비 증가로 연결됐다. 둘째, 병원·유통업·주유소 등 특정 업종과 대형 매장이 주로 혜택을 본다. 셋째, 물가를 올린다. 넷째, 재정 여력이 없다. 일각에선 반대만 하지 말고 대안을 내놓으라고 주장한다. 민생이 어렵고 내수가 부진한 건 사실이다. 기준금리를 내리면 빚에 짓눌린 이들이 허리를 좀 펴겠지만 집값 불안과 가계부채 증가 탓에 한국은행 금통위도 조심스럽다.

지난 2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2024년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위한 특별조치법안(대안)이 재적 300인, 재석 187인 중 찬성 186인, 반대 1인으로 통과되고 있다. 뉴스1


이럴 땐 재정이 나설 필요가 있다. 그래도 전 국민이 아니라 취약층을 돕는 게 정공법이다. 이미 기존 채널이 있다. 정부는 최근 복지 혜택의 잣대가 되는 기준 중위소득(4인 가구 기준)을 지난해(5.47%)와 올해(6.09%)에 이어 내년에 역대 최대(6.42%)로 올리기로 했다. 기준 중위소득은 최저 생계비 등 정부의 74개 복지사업에 영향을 미친다. 사회 약자를 콕 집어서 두텁게 지원할 수 있다. 전 국민에게 현금 살포라는 포퓰리즘을 막는 강력한 방패다.

임금을 못 받은 노동자를 지원하는 방법도 있다. 올해 상반기 임금 체불이 1조원을 넘어섰다. 역대 최대였던 지난해 상반기보다 27%나 늘었다. 피해자는 15만 명에 달한다. 정부가 밀린 임금을 사업주 대신 지급하는 대지급금을 늘리면 노동 약자를 보호하는 데 효과가 있을 것이다. “전 국민에게 25만원 뿌리는 것보다 일하고 돈 못 받은 사람부터 챙기는 게 중요하다”는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 후보자의 말은 일리가 있다. 당장 하반기 내수 보강을 위해 지역상품권의 할인 폭을 늘리되 사용기한을 연말 등으로 한정하는 방안도 있다.

공공운수노동조합 조합원이 지난 3일 서울 여의도 순복음교회 앞에서 택시기사 고(故) 방영환씨와 관련 동훈그룹에 책임을 촉구하는 손피켓을 들고 있다. 방영환씨는 임금체불에 항의하며 택시 완전월급제 전면 시행을 요구하는 시위를 하다 지난해 9월 26일 분신해 숨졌다. 뉴스1

여야는 돈 많이 쓰는 경쟁이 아니라 제대로 잘 쓰는 경쟁을 해야 한다. 필리버스터 무용론이 나오지만 동의하지 않는다. 국회와 여론을 설득할 수 있는 약자의 거의 유일한 수단 아니던가. 박수민 의원의 경우 기록을 세운 것 못지않게 “대단한 정치인이 되기보다 부끄럽지 않은 정치인이 되고자 한다”는 발언 내용도 많이 회자됐다. 스미스씨가 여의도에서 필리버스터를 했다면 쓰러지기도 전에 거대 야당이 표결로 강제 종료했을 것이다. 그래도 여의도의 스미스씨, 힘내시라. 지켜보는 국민은 있다.

서경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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