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준호의 사이언스&] 가상현실·인공지능…과학기술이 올림픽 메달 색·수 바꾼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남성들이 터질 듯한 허벅지 근육을 뽐내며 달린다. 창을 던지는 남성 역시 나체 그대로다. 고대 그리스 벽화나, 도자기 그림 등에 나타난 올림픽 참가 선수들의 모습이다. 옷이 곧 신분과 계급을 상징하던 그 시대에, 공정한 경쟁을 위해 모든 선수가 옷을 벗고 올림픽에 참여했다는 게 고고학자들의 분석이다. 그들이 누린 유일한 기술이 있다면, 몸에 올리브 오일을 바르는 정도. 강렬한 지중해 태양빛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하고, 경기 중 부상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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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기술 경연장 된 파리올림픽
수영·사격에 VR, 체조에 AI 도입
한국 사격팀 기대 이상 성적 올려
기술도핑 논란에도 신기술 경쟁
」
천 년이 두 번도 더 지난 현대의 올림픽은 차원이 다르다. 훈련부터 첨단 장비를 이용한 데이터 분석이 이뤄지고, 첨단 소재를 이용한 장비와 선수복·신발 등이 선수들의 기록 경신을 돕고 있다. 우리나라는 물론 미국·일본·중국 등 세계 주요국들은 ‘스포츠과학원’까지 만들어 과학기술에 기반한 선수 지원을 연구하고 있다. 나이키 등 스포츠 관련 기업들도 첨단 장비와 소재 개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선수들의 땀과 노력이 우선이지만, 과학기술이 선수의 메달 색과 수를 바꾸는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첨단 육상트랙, AI 체조 심판
지난달 26일부터 프랑스에서 열리고 있는 파리올림픽은 과학기술의 숨은 경연장이다. 파리올림픽 주경기장인 ‘스타드 드 프랑스’엔 보라색 육상 트랙이 처음으로 등장했다. 지금까지 어디서나 볼 수 있었던 붉은 벽돌색 트랙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트랙은 두 겹의 고무 층으로 돼 있는데, 아래층은 벌집 모양의 특수조직으로 만들어져 있다. 육상 선수의 착지 충격을 흡수하고 발을 바닥에서 떼는 시점에 맞춰 에너지를 되돌려주는 역할을 하면서 경기력을 1~2% 향상시켜 준다는 게 제작사(몬도) 측의 설명이다. 파리올림픽은 인공지능(AI) 기술이 전면 도입된 첫 AI 올림픽이기도 하다. 경기력 분석, 심판 지원 등 대회 운영 전반에 AI가 도입됐다. 특히 체조의 경우 AI 심판으로 불리는 심판지원시스템(JSS)이 도입됐다. 빠르게 움직이는 선수의 움직임을 카메라로 포착한 뒤, AI 이미지 분석으로 회전수와 동작의 정확성을 판단한다.
가상현실(VR)을 이용한 훈련도 파리올림픽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수영 강국’ 호주 계영팀은 파리올림픽을 준비하면서 VR 훈련을 도입했다. 계영 대표선수들의 영법 패턴을 3차원 비디오 영상으로 찍어 VR 고글로 재생했다. 터치 패드를 찍기 전 앞 주자의 영법을 잘 볼 수 있게 해, 다음 주자들이 언제 어떻게 더 빨리 물에 뛰어들지 판단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훈련이다. 이 덕분일까. 호주는 여자 400m와 800m 자유형 계영에서 올림픽 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획득했다.
기대 이상의 선전을 하고 있는 한국 사격팀도 이번 파리올림픽에 앞서 처음으로 VR 특별훈련을 받았다. 사격연맹이 지난 4월 한국스포츠과학원에 요청해 파리 샤토루 경기장의 곳곳을 VR 특수장비로 촬영해 가져온 뒤 한국 진천 국가대표 선수촌에서 재현했다. VR 훈련은 과거 양궁에서 도입한 적은 있었으나, 사격에선 처음이었다.
장태석 한국스포츠과학원 연구위원은 “파리 올림픽에 출전할 사격선수 12명이 실제 경기에 앞서 VR을 통해 현지 경기장을 간접경험 하고, 동시에 뇌 혈류량 검사를 통해 부족한 부분을 잡아내는 훈련까지 했다”며 “선수와 코치진 모두 실제 경기장과 같은 조건을 미리 경험하고 훈련할 수 있어서 만족해했고, 결과적이지만 메달 성적도 아주 좋았다”고 말했다. 애초 출정식 당시 한국 사격 대표팀의 목표는 금 1개, 은 2개, 동 3개였지만, 초반부터 금메달 3개 등으로 목표치를 훌쩍 넘겼다.
기술도핑이란 새 현상
스포츠에 첨단 과학기술 입히기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기술도핑(tech doping)’이란 이슈까지 등장했다. 도핑이란 원래 금지약물을 이용해 신체기능을 강화하는 것을 말하지만, 최근엔 특정 과학기술도 ‘도핑’의 영역에 들어서고 있다. 아무나 누릴 수 없는 고가의 첨단 장비를 이용한 선수의 성적이 눈에 띄게 좋아지는 건 공정한 경쟁이라는 스포츠 정신에 어긋난다는 인식이다. 대표적 사례가 영국의 스포츠웨어 업체인 스피도가 만든 전신 수영복 ‘LZR 레이서’다. 상어의 피부를 본떠 수영복 표면에 비늘 같은 미세돌기를 만들어 마찰력을 줄이고 더 큰 힘을 쓸 수 있게 했다. 이 수영복을 입은 선수들은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여러 기록을 깨면서 큰 논란이 됐다. 결국 국제수영연맹(FINA)은 2009년 세계선수권 직후 전신수영복 착용을 금지했다.
나이키의 ‘베이퍼플라이’ 러닝화도 같은 사례다. 밑창에 넣은 탄소섬유판 3개가 스프링 역할을 해 마치 내리막길을 달리는 것처럼 효과를 냈다. 2019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케냐의 전설적 마라토너 엘리우드 킵초게가 1시간 59분 40초로 ‘마의 2시간 벽’을 처음으로 깨는 등 장거리 달리기 경기에서 여러 선수가 이 신발을 착용하고 기록을 세우면서 주목받았다. 결국 세계육상연맹은 2020년 베이퍼플라이를 포함, 특정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신발의 사용을 금지하는 새로운 규정을 도입했다.
그럼에도 스포츠 기업들의 과학기술 경쟁은 계속되고 있다. 스피도는 이번 파리올림픽에 앞서 인공위성을 우주 방사선으로부터 보호해주는 나노입자 코팅 기술을 적용한 수영복을 새로 내놨다. 발수성(물이 스며들지 않는 성질)이 높아 물속 저항을 줄여준다고 한다. 나이키도 기존 베이퍼플라이보다 쿠션이 뛰어나고 밑창이 넓은 새로운 운동화 ‘알파플라이3’를 출시했다. 케냐 마라토너 킵초게는 이번 파리올림픽에서 나이키의 알파플라이3를 신을 것으로 외신들은 전하고 있다.
스포츠과학 강화 경쟁
과학기술이 선수의 성적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사실이 인식되면서 세계 주요국들은 일찌감치 과학기술에 기반해 스포츠를 지원하기 위한 기관을 만들고 있다. 송강영 한국스포츠과학원장은 “일본은 그간 생활체육을 중점적으로 지원하다 보니 엘리트 스포츠가 많이 죽었는데, 2020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기존 국립스포츠과학센터(JISS)에 의사 등 지원 인원을 대대적으로 충원하고 스포츠 과학연구를 통해 선수들의 경기력 향상에 주력하기 시작했다”며 “이때부터 올림픽 등 국제대회에서 일본의 메달 성적이 급상승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했다. 송 원장은 또 “이번 파리올림픽 체조에 도입된 AI 심판을 시작으로 앞으로 스포츠의 모든 분야에 AI가 본격적으로 도입될 것”이라며 “우리 스포츠과학 지원도 AI를 중심으로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다각도로 고심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최준호 과학전문기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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