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남의 영화몽상] 가족이 눈치 못 채지 않은 변신
지난주 개봉한 ‘파일럿’은 주연 배우 조정석의 여장 연기가 단연 돋보이는 코미디 영화다. 이를 보고 있으면 자연스레 여러 선례가 떠오른다. 로빈 윌리엄스가 연기한 주인공이 이혼 후 여장을 하고 전처의 집에 가사도우미로 취직해 자신의 아이들을 돌보는 ‘미세스 다웃파이어’(1994)도 그중 하나다.
더스틴 호프만이 주연한 ‘투씨’(1983)도 있다. 여장의 주된 이유가 구직이란 점에서 ‘파일럿’과 여러모로 통하는 영화다.
‘투씨’의 주인공은 배우. 연기에 대한 열정도, 경험도 많지만 최근 번번이 오디션에 떨어진다. 급기야 여장을 하고 TV 드라마 오디션에 간 그는 우여곡절 끝에 카메라 테스트를 받고 배역을 따낸다. 주인공이 고위직 여성 덕분에 기회를 잡고, 여성 동료와 마음을 터놓는 가까운 사이가 되고, 일터에서 추근대는 남성 때문에 불쾌한 일을 겪는 것은 ‘파일럿’과도 겹쳐진다. 나아가 ‘투씨’의 주인공은 대본을 벗어난 연기로 드라마 속 여성 캐릭터의 새로운 면을 보여주면서 시청자 인기까지 얻는다.
이와 반대로 ‘파일럿’은 여객기 조종사로 능력을 인정받고 TV에 출연해 대중적 인기까지 누리던 주인공 한정석(조정석)이 하루아침에 추락하면서 시작된다. 그가 해고당한 발단은 회식 자리에서 여성들에 대해 부적절한 언행을 했기 때문. 실직 이후 거듭 구직에 실패한 그는 여성 조종사 채용 의지가 뚜렷한 항공사에 여동생(한선화) 이름으로 서류를 냈다가 덜컥 면접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는다. 여장을 한 그가 면접에서 결혼이나 임신·출산에 관심 없다고 잘라 말하는 건 기본. 한편으로 여성들을 발탁한 이 항공사의 고위직 여성이 지닌 속내는 나중에 드러난다.
이 영화는 ‘콕핏’이란 스웨덴 영화가 원작으로 알려져 있다. 원작을 보지 못해 비교는 어렵지만, ‘파일럿’은 여장 남자를 통해 현실의 여러 면면을 건드리되, 통렬한 풍자나 비판보다 대중영화로서 수위를 맞추는 데 공을 들인 것 같다. 극 중 여러 설정에 대한 긍정과 부정의 반응은 한편으로 지금 우리 사회 관객 눈높이의 스펙트럼을 가늠하게 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건 주인공의 가족. 남편과 사별하고 힘들게 남매를 키운 어머니는 아들의 이혼에 속을 태우는 대신 가수 이찬원의 열혈 팬으로서의 일상에 열심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는 아들의 하소연, 예컨대 가족에 헌신하고 희생했다는 식의 토로 역시 아들이 잊고 있던 중요한 사실을 일깨우며 가뿐하게 받아친다. 한국영화의 전형적 모자 관계와 여러모로 다르다. 여장을 도운 여동생은 물론 이런 어머니도, 한정석의 어린 아들도 그의 여장을 자연스럽게 눈치챈다. 마치 그가 어떤 모습이든 본질을 꿰고 있다는 듯. 이 역시 주인공의 가족 얘기 대신 로맨스 고민이 중심인 ‘투씨’와는 다른 지점이다.
이후남 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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