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 속 아름다운 남자들의 얼굴
수많은 BL 웹 소설 인기 작품의 표지 일러스트레이션과 삽화를 그려왔다. 가장 공통적으로 요구되는 키워드가 있었나‘퇴폐’다. ‘무심’이나 ‘지적인’이라는 표현도 물론.
왜 그럴까? 어딘지 공허하고 퇴폐적인 남자의 얼굴을 ‘착즙’하는 여성들이 주변에 꽤 많다BL에서든 남녀 로맨스에서든 ‘공’과 ‘남주’가 어떤 방식으로든 사랑하는 상대만 바라봐야 한다는 규칙이 불문율 아닌가. 그러니 모든 면에서 완벽하지만, 내면 어딘가 채우고 메워줘야 할 부분이 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얼굴에 끌리는 것 같다. 그런 공허한 구석을 지닌 남자. 그림체의 영향도 있다. 화려하거나 귀여운 그림체를 추구했다면 밝고 다정한 남자 주인공을 그려달라는 요청이 많이 왔을 것 같다.
‘피폐’와 ‘공허’이라는 키워드를 남성의 신체에 어떤 방식으로 투영하나일단 여성에게서 자주 발견되지 않는 아주 짙은 눈썹, 벼려진 턱선, 적당한 비율로 자리한 근육, 그 틈으로 불룩하게 드러난 핏줄 같은 것들. 흔히 남성적이라고 특징되는 면모를 갖춘 뒤 긴 속눈썹과 물기 있는 눈을 그린다. 육체는 남성의 것이지만, 특정 부분에서 여성성을 품는 거다. 그 결합이 묘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남자들의 손이 유독 아름답게 묘사된다. 단순히 ‘곱다’는 의미가 아니다강인하고 덩치 큰 남성을 묘사하더라도 여성향 장르니까 손은 길쭉하게 그린다. 투박해 보이지만 핏줄이 섬세하게 도드라지고, 상흔이 있고 손톱은 아주 짧게. ‘미인공’을 그린다면 손가락은 하얗고 길지만 핏줄이 일부만 보이고, 손톱 보디는 살짝 길게.
대부분 한국 남성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여성적 요소 뿐 아니라 다국적인 요소마저 결합되어 있다. 그래서 더 끌리는 것 같은데내 취향 또한 두 이면을 섞는 걸 좋아해서 남성성만으로 승부를 보기에 부족하다 싶으면 여성성을 첨가해 보거나 다른 인종의 특징을 가미하는 식으로 한국 미남자의 오리지널리티에 좀 더 양념을 친다. 물론 이 여성성과 남성성, 인종에 대한 묘사는 전통적으로 규정된 특징들을 의미한다.
작가로서 감람이 ‘꽂히는’ 남성의 신체 부위는처음 남자 아이돌을 좋아했을 때 그들에게 꽂힌 건 아주 잘 관리된 눈썹과 턱선 때문이었다.
분명 여성에게는 ‘관리된 남자’에 대한 욕망이나 판타지가 있다태생적으로 인간이란 관리되지 않은 존재다. ‘가꿈’이 반영된 모습을 통해 육체 그 이면의 더 많은 매력이 읽히기 시작한다.
BL과 이성애 로맨스, 두 장르의 남성 묘사에서 어떤 차이를 두나. 두 장르 모두 여성 독자의 이상형이지만 보고 싶어 하는 지점이 다르다로맨스 쪽은 남주를 소위 ‘남편감’ 혹은 ‘남친감’의 잣대로 보게 된다. 현실과 밀착되는 부분에서 매력을 판단한다는 뜻이다. 지적이고 흠결 없고 현실 기준에 좀 더 부합하는 쪽으로. 늘 정장을 입고 깔끔하게 머리를 다듬은 ‘상견례 프리패스 상’에 가까운 남자 같달까. BL도 비슷하지만 캐릭터들의 개성이 좀 더 특징적으로 부여된다. 찡그리며 과장된 표정을 짓거나 좀 더 나쁜 사람처럼 보이게끔 그린다. 눈썹도 뾰족하고, 눈도 더 부리부리하고. 취향에 따라 잘생긴 남자보다 예쁜 남자를 더 선호하는 것 같기도 하다.
BL의 남남 주인공들을 묘사할 때 특이점은 극단적인 두 갈래의 남성상을 동시에 보여줘야 한다는 거다. 특히 ‘수’라는 존재를 그릴 때. 남성이지만 공과는 대비되어야 하고, 그렇다고 여성적으로 그릴 수만은 없다작가의 취향마다 다르겠지만 내 경우 ‘수’의 보편적 레퍼런스는 아이돌 스타들이다. 특히 성숙하지 않은 의상 스타일에 더해진 마르고 하얗고 눈이 큰 얼굴. 머리도 대부분 깔끔하게 다듬은 옅은 갈색이다. 그 밖에 목의 굵기, 입술의 색감, 손 크기와 손목 굵기 차이도 신경 쓴다.
감람이 비주얼리스트로서 욕망하는 남자의 얼굴은 어느 쪽에 가깝나굉장히 남성적인데 속눈썹은 길고, 테스토스테론이 뿜어져 나오지만 여성스러운 미모. 내가 만족스러워야 그림을 낼 수 있으니까 주인공들은 내 욕망의 거름망을 꼭 한 번씩 거친다. BTS의 팬 아트를 그린 적 있는데, 특히 뷔를 그릴 때 그림쟁이로서 묘사할 거리가 많아서 즐거웠다.
요즘 영감이 되는 남자는특정 연예인보단 다양한 화보들 중에 연출이나 표정이 마음에 드는 사진을 수집하는 편.
신기하게도 어릴 적부터 BL 소설을 읽으며 머릿속으로 상상해 온 남자들의 형상이 점차 실사화되고 있는 느낌이 든다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2D 남성을 굉장히 사랑하는, 소위 ‘오타쿠’인 유튜버가 있다. 하지만 그는 2D 남자와 현실의 남자는 정말 다르고, 비록 자신은 2D 남자를 사랑하지만 그 캐릭터가 현실에 있다면 ‘쳐다도 안 볼 양아치’라고 선을 긋는 말에 굉장히 공감했다(웃음).
욕망하면서도 현실에 없길 바란다는 면이 아이러니하다만질 수 없으니까 사랑할 수 있다. 현실의 완벽한 남자는 불안하니까. 우리는 상상하고 욕망할 여지를 남겨주는 존재에 빠져든다.
개인적으로 BL 장르를 사랑하는 이유는 남녀 로맨스를 읽을 때 개입되는 불필요한 젠더 권력이나 감정 노동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르 특성상 폭력과 강압적인 부분 등 소위 ‘빻았거나’ 뒤틀린 지점도 있게 마련인데, 스스로 그림을 구현할 때 검열하는 부분이 있다면그런 면이 현실에 적용된다면 도덕관념이나 사상을 검증하고 지탄해야 하는, 의무적으로 필요한 단계가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이 장르에서는 그냥 있는 그대로의 직감이나 감각을 받아들이면 된다고 본다. 남성들 또한 그들이 즐기는 남성향의 세계가 있을 것인데, 그걸 실제 여성들에게 요구하지는 않는다. 물론 그런 나쁜 인간들도 있지만 말이다. BL은 그야말로 여성 판타지이니 엄격하게 지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물밑 장르가 점점 수면 위로 떠오르고, 실제 대상에게 이런 측면을 투영하는 일이 점차 생겨나면서 우려되는 부분도 있다. 여성들이 몰래 즐겼던 몇 안 되는 ‘안락한 쓰레기통’이 사라질까 봐.
현실 남자들에게서 미적 영감을 얻는 때는가끔 지하철에서 깔끔하게 다듬어진 남자의 뒷목을 본다. 팔뚝의 핏줄 같은 걸 참고하기도 한다. 내가 매력적으로 느끼는 지점을 그림에 오롯이 녹여낸다.
쓰는 자도, 그리는 자도, 소비하는 자도 대부분 여성인 장르다. 작품을 매개로 이 여성들의 욕망이 교차되고 있음을 느끼나굳이 세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통한다는 지점에서 든든한 면은 있다. 예컨대 ‘적당한 근육’이란 키워드 하나만 던져줘도 찰떡같이 쓰고, 그리고, 소비한다. 여자들의 머릿속에 있는 그 세계. ‘그래 이거지!’ 싶은 것들.
BL 콘텐츠와 그 비주얼의 세계를 굴리는 동력은 아무래도 남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욕망이자, 그로 인해 느끼는 쾌락일 것이다. 우리는 왜 잘생긴 남자를 봐야 할까심플하다. 사람은 아름다운 걸 좋아하니까. 아름다운 건 소수일 수밖에 없으니 갖지 못한 것을 선망하게 된다. 아무래도 그 욕망은 시각으로 가장 먼저 발현되고.
아름다운 남자들을 그리는 일에 책임감과 즐거움을 느끼는 이유는가끔 아이돌 팬들이 최애에게 “내가 낳을걸”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나. 바로 그거다. 여성 욕망의 결정체를 내 손으로 낳을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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