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유도 동매달, 모든 순간이 눈부셨다
[이준목 기자]
"너와 함께한 시간 모두 눈부셨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이 좋았다."
대한민국 유도 국가대표팀이 드라마 <도깨비>의 명대사를 떠올리게 하는 감동을 선사하며 파리올림픽의 여정을 아름답게 마감했다.
▲ 3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 샹드마르스 경기장에서 열린 2024 파리올림픽 유도 혼성단체전 동메달결정전에서 독일을 상대로 승리한 한국 안바울이 기뻐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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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조건 극복한 유도
2020 도쿄 대회에서 처음 도입된 혼성단체전은 남자 3명(73㎏급·90㎏급·90㎏ 이상급)과 여자 3명(57㎏급·70㎏급·70㎏ 이상급)이 출전하는 팀 대결로 먼저 4승을 거둔 팀이 승리하는 방식이었다. 한국 유도는 혼성단체전에서 사상 첫 메달을 획득하는 기쁨을 누렸다.
이번 혼성단체전 동메달이 더욱 값진 이유는, 체급 격차와 부상 악재라는 최악의 조건을 극복하고 이뤄낸 성과였기 때문이다. 한국은 이번 대회에서 남자 73㎏급과 여자 70㎏급에 출전 선수가 없었다. 이에 따라 66㎏급의 안바울과 여자 63㎏급 김지수는 각각 자신보다 한 단계 체급이 높은 선수들과 맞대결을 펼쳐야 했다.
또한 남자 90㎏급에서도 한주원의 부상으로 81㎏급 이준환이 대신 출전해야 했고, 남자 100㎏의 김민종은 전날 개인전 결승전에서 당한 무릎 부상을 참고 경기 출전을 강행하는 투혼을 발휘했다.
한국은 8강에서 프랑스에 패하며 패자부활전으로 내려갔으나 우즈베키스탄을 누르고 동메달 결정전으로 향했다. 마지막 상대가 된 독일은 이전 대회 동메달 팀이자, 모든 출전선수가 개인전과 비교해 같거나 낮은 체급 선수들과 상대하며 유리한 상황이었다.
▲ 2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 아레나 샹드마르스에서 열린 2024 파리올림픽 유도 여자 78kg 이상급 시상식에서 동메달을 획득한 김하윤이 메달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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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유도의 값진 결과
양 팀의 운명을 가를 최종전의 체급은, 추첨 결과 남자 73㎏급으로 정해졌다. 한국팀에서 이 체급을 책임진 선수는 '맏형' 안바울이었다.
그런데 안바울은 불과 몇 분 전 5라운드에서 자신보다 약 6㎏ 무거운 이고어 반트케와 9분 38초의 혈투를 벌인 끝에 석패했다. 약 일 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 다시 매트에 올라야 했다. 게다가 안바울은 이미 패자부활전과 동메달 결정전을 합쳐 약 20분 가까이 소화한 뒤라 체력적-심리적 부담이 상당한 상황이었다.
다시 반트케와 '리벤지 데스매치'를 치르게 된 안바울은 비장한 표정으로 경기장에 들어섰다. 동료 선수들은 안타까운 마음에 눈물을 쏟거나 경기를 제대로 지켜보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해 보였던 안바울은 막상 경기가 시작되자 오히려 업어치기를 연달아 시도하며 적극적인 공세를 퍼붓는 투혼을 발휘했다. 당황한 반트케는 안바울의 공격을 막아내기에 바빴고, 소극적인 플레이를 펼치다가 결국 5분 25초 만에 지도 3개를 받으면서 반칙패 했다.
모든 걸 쏟아낸 안바울은 동메달이 확정되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함께 고생한 선수들은 모두 뛰쳐나와 안바울에게 달려가 얼싸안았다. 선수들이 서로 손을 맞잡고 두 팔을 치켜들며 환호하는 장면은, 메달의 색깔을 넘어선 진한 동료애가 빛났던 순간이었다.
한국 유도는 이번 파리올림픽에서 개인전 은메달 2개(남자 100㎏ 이상급 김민종·여자 57㎏급 허미미), 동메달 2개(남자 81㎏급 이준환·여자 78㎏ 이상급 김하윤)를 수확한 데 이어 어 마지막 혼성단체에서 동메달을 추가하며 '메달 5개'를 수확하는 기쁨을 누렸다. 2012년 런던 올림픽 이후 12년 만의 금메달은 아쉽게 나오지 않았지만, 지난 2016년 리우 올림픽(은메달 2, 동메달 1)이나 2021년 도쿄 올림픽(은메달 1, 동메달 2)보다 더 향상된 성적으로 대회를 마무리했다.
이번 대회에서 가장 아쉬웠던 장면은, 역시 57㎏급에서 28년 만의 여자유도 금메달이 유력해 보인 허미미가 결승전에서 석연치 않은 판정의 희생양이 된 순간일 것이다. 허미미는 독립운동가의 후손이자 한일 혼혈로 일본 국적을 포기하면서 한국 국가대표를 선택한 사연으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
꿈에 그리던 생애 첫 올림픽 출전에서 허미미는 대망의 금메달을 눈앞에 두는 듯했으나 크리스타 데구치(캐나다)와 결승전에서 골든스코어 끝에 '위장공격'판정으로 지도 3개째를 받으며 아쉬운 반칙패를 당했다. 외신들조차도 판정에 의구심을 제기했을 정도로 논란이 된 장면이었다.
▲ 2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 아레나 샹드마르스에서 열린 2024 파리올림픽 유도 남자 100kg 이상급 시상식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김민종이 메달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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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유도의 명장면
또 김민종은 남자 100㎏ 이상급 결승전에서 '프랑스의 유도 영웅' 테디 리네르를 넘지 못했지만, 한국 유도 최중량급에서 최초의 은메달을 수확하는 기록을 세웠다. 역대 올림픽 유도 최중량급 메달 종전기록은, 남자부가 1984년 LA 대회와 1988년 서울 대회의 조용철, 여자부는 2000년 시드니 대회의 김선영이 각각 기록한 동메달뿐이었다.
203cm의 리네르는 올림픽 금메달 3연패, 세계선수권대회 11회 우승을 차지한 최중량급 사상 최고의 유도 선수로 꼽힌다. 그런 리네르는 우승이 확정된 이후, 패자인 김민종의 왼팔을 잡더니 함께 높게 들어 올리며 관중들의 환호를 끌어냈다. 그만큼 함께 경쟁한 동료에 대한 존중과 예우를 보여준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마침, 8강전에서 앞서 리네르에게 패한 구람 투시슈빌리(조지아)가 패배 후 분풀이로 리네르의 급소를 향해 발을 뻗는 비신사적인 행위를 저지르며 중징계를 받았던 장면이 나왔던 뒤라, 결승전에서 리네르와 김민종이 서로를 인정하는 훈훈한 장면은 더욱 깊은 인상을 남겼다.
또한 마지막 혼성단체전의 히어로가 된 안바울은 '올림픽 3회 연속 메달'이라는 금자탑의 주인공이 됐다. 안바울은 2016 리우 올림픽에서 은메달, 2020 도쿄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수확한 바 있다. 이번 대회 개인전에서는 16강에서 탈락하며 아쉽게 고배를 마셨지만, 혼성단체전을 통하여 한국 유도의 피날레를 장식한 '진짜 주인공'으로 등극했다.
누리꾼들은 매 순간 빛나는 명장면을 대거 보여준 한국 유도 대표팀의 선전에 ?이번 대회 최고의 감동" "한 편의 청춘영화 같다"며 아낌없는 찬사와 박수를 보냈다. 승패를 떠나 매 순간 과정에 최선을 다하는 선수들의 아름다운 '스포츠 정신', 특히 단체전에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자신을 희생하며 동료들을 더 빛나게 한 끈끈한 '팀워크'는, 금메달 그 이상의 감동을 전해준 대한민국 유도의 명장면으로 오랫동안 회자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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