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한" 쏟아진 日고교의 반전…한국어 교가 부르며 고시엔 간다

김현예 2024. 8. 5.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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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 바다 건너서 야마도(大和·야마토) 땅은 거룩한 우리 조상 옛적 꿈자리~“

39도에 달하는 기록적인 폭염이 찾아온 지난 3일 일본 교토(京都). 푹푹 찌는 체육관, 구슬땀을 흘리면서도 야구선수 60여 명이 합창하기 시작했다. 한국어 교가다. 목청 높여 교가를 부른 건 한국계 민족학교인 교토국제고 선수들.

사우나를 방불케 하는 체육관에서 제106회 일본 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 우승을 기원하는 장행회(壯行會)에 참가한 학생들은 승리하겠다고 다짐했다. 이들이 고교야구의 ‘꿈의 구장’으로 불리는 고시엔(甲子園) 땅을 밟게 된 건 2년 만의 일이다.

올 여름 일본고교야구의 '성지'로 불리는 고시엔 구장을 밟게 된 한국계 민족학교 교토국제고 야구선수들의 승리를 기원하는 행사가 지난 3일 열렸다. 교토=김현예 특파원 /열악한 환경에서도 꿈을 향해 노력한 교토국제고 선수들의 닳아버린 글러브, 주민들이 보낸 응원 엽서.

야구 인기가 높은 일본에선 여름 고시엔은 야구 경기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통상 일본 전역에서 4000개 학교가 참여하는데, 이 중 지역 예선을 통과한 상위 1%의 팀만 출전할 수 있어서다. 올해는 49개 학교가 오는 7일부터 우승 깃발을 놓고 자웅을 겨룬다. 고시엔 경기는 일본 NHK가 전 경기를 생중계할 정도로 국민적인 사랑을 받는데, 교토국제고는 지난달 말 77개 학교가 나선 교토지역 예선에서 1위를 거머쥐며 통상 세 번째 여름 고시엔 티켓을 따냈다.


교토국제고의 기적


교토국제고의 뿌리는 194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교토 지역 재일동포를 중심으로 민족교육을 위해 세워진 학교다.

하지만 재일동포들이 일본에 정착하면서 오히려 한국식 교육을 받겠다고 나서는 학생 수가 줄었다. 고민하던 학교가 눈을 돌린 건 야구였다. 야구를 좋아하는 학생을 유치해보자는 아이디어였다. 그 길로 1999년 야구부가 만들어졌다.

상황이 녹록하지는 않았다. 첫 대회에선 ‘34대0’이란 최악의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그래도 학교와 감독, 학생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차츰 야구를 좋아하는 학생들이 모여들면서 믿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여름 고시엔 진출이었다.

재일동포들이 세운 한국계 민족학교 교토국제고가 올 여름 일본 고교야구의 꿈의 구장으로 불리는 고시엔 땅을 밟게 된다. 지난달 28일 교토지역 고교 77곳이 출전한 가운데 지역 예선에서 승리해 고시엔 행 출전권을 따낸 교토국제고 선수들이 기뻐하고 있다. 사진 교토국제고

2021년 교토국제고가 고시엔에 출전하면서 한국어 교가가 처음으로 고시엔에 울려 퍼졌다. 경기 처음에 한 번, 승리를 하면 한 번 더 교가를 틀어주는데, 교토국제고가 4강까지 진출하는 기적을 이뤄내면서 많은 주목을 받았다.

재일동포 사회에선 “감동 받았다”는 목소리가 이어졌지만, 뜻밖의 어려움도 뒤따랐다. ‘혐한’ 전화가 학교로 쏟아졌다. 냉골이던 한·일관계의 영향이었다.

그러자 이번엔 마을 주민들이 나섰다. 경찰이 순찰을 돌 지경까지 되자 마을 주민이 자비를 들여 학교 앞에 방범 장치를 달고, 응원 편지와 후원금을 보내왔다. 한국어 교가를 이유로 드는 혐한 전화가 이어지며 교사들이 교가를 놓고 고민에 빠졌을 때 “그간 불러온 교가를 왜 바꿔야 하냐”며 짐을 덜어준 건 학생들이었다.

재일동포들이 세운 한국계 민족학교 교토국제고가 올 여름 일본 고규야구의 꿈의 구장으로 불리는 고시엔 땅을 밟게 된다. 지난 3일 학부모들과 재일동포 등이 참석한 가운데 승리를 기원하는 행사가 열렸다. 사진 교토국제고


한일 우호의 상징으로


백승환 교토국제고 교장은 “한국 정부와 일본 정부가 인정하는 국제고로, 한국 출신의 학생은 10%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일본인 학생”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어와 영어, 일본어로 가르치다 보니 최근엔 K팝과 드라마를 좋아해 입학하겠다고 나서는 일본 학생들도 늘었다고 했다.

현재 교토국제고의 전교생은 138명. 이 중 61명이 부 활동으로 야구를 할 정도로 야구 사랑이 깊다. 신성현(두산)·황목치승(LG)·정규식(LG) 전 선수가 이 학교 출신이다. 일본인 선수들도 다수 배출하면서 ‘일본 제일’이 되겠다는 학생들의 꿈도 커지고 있다. 이날 행사를 마친 뒤에도 선수들은 다시 뙤약볕 아래 운동장으로 뛰어나갔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꿈을 향해 노력해온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교토국제고 선수들의 닳아버린 글러브와 운동화. 선수들은 야구공이 부족해 공에 테이프를 감아쓰곤 했다. 교토=김현예 특파원


백 교장은 “학생 수가 적고 시설이 열악한데도 학생들이 학교 주변을 열 바퀴, 스무 바퀴씩 돌며 연습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야구공이 부족해 테이프로 감아 쓰고, 학교 야구장이 좁아 인근 민간 야구장을 빌려서 훈련할 정도로 상황은 열악했다. 그늘진 곳에 학생들이 가지런히 정렬해둔 야구방망이와 글러브엔 세월감이 역력했다.

올해 고3인 후지모토 하루키(藤本陽毅) 야구부 주장은 “다른 고교와 달리 우리는 일본인, 한국인 모두 응원해줘서 정말 기쁘다”며 “한국 분들에게도 용기를 줄 수 있는 플레이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백 교장은 “고시엔에 나가서 많은 사람들에게 교가를 한 번이라도 더 들려드리겠다는 마음으로 아이들이 최선을 다하고 있다”며 “교토국제고가 한·일 우호의 상징이 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교토=김현예 특파원 hy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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