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움직이자 1·2인자 만났다, 14년만에 또 與분열 막은 정진석 [who&why]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 초반 2년을 혹평하는 인사들은 “정치는 없고 통치만 있었다”는 표현을 쓰곤 했다. 정치적 유연성 대신 법적 타당성을 고려해 국정운영을 해나가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여소야대 상황에서 국정을 이끄는 윤 대통령이 이재명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2년 동안 회담하지 않았던 걸 봐도 이를 알 수 있다.
그랬던 윤 대통령이 4·10 총선 패배 이후 “이제 정치하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다짐한 뒤 중용한 인물이 정진석 비서실장이다. 경제 관료 출신 김대기·이관섭 전 비서실장과 달리 5선 국회의원 출신인 그를 두고 ‘정무형 비서실장’이라는 평가가 이어졌다.
그런 정 실장의 진가는 지난달 30일 윤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의 90분 회동에서 드러났다. 총선과 7·23 전당대회를 거치며 윤·한 갈등이 증폭됐다는 징후가 커지던 차에 지난달 24일 대규모 만찬 행사에 이어 정 실장이 배석한 3인 회동까지 조기에 성사되며 당정 분열의 우려를 불식시킨 것이다. 회동 이틀 만에 친윤계 정점식 전 정책위의장이 스스로 물러나며 친윤계와 친한계의 감정 소모전도 소강 상태를 맞게 됐다.
한 대표와 물밑 조율을 거쳐 회동을 성사시킨 정 실장이 여권 분열의 급한 불을 끈 건 처음이 아니다. 과거 정 실장은 3선 의원 시절이던 2010년 7월 금배지를 떼고 이명박 당시 대통령의 정무수석으로 긴급 투입됐다. 이명박 정부가 사활을 걸고 추진하던 세종시 수정안이 당시 국회의원이던 박근혜 전 대통령의 반대로 본회의에서 최종 무산된 뒤 후폭풍으로 청와대 개편과 개각이 이어졌던 때다. 박 전 대통령이 국회 본회의장 단상에 올라 직접 반대 토론을 하자 친이계는 “항복하는 사람 등에 칼을 꽂았다”고 하는 등 친이·친박의 갈등이 극에 달했었다. 분당의 우려마저 나오던 상황에서 정 실장은 부임 한 달여 만에 이·박 회동을 성사시켰고, 분열하지 않은 당시 여권은 2012년 대선에서 정권 재창출에 성공했다.
14년 전의 상황을 기억해서인지 정 실장은 전당대회 과정에서 대통령실 참모진에게 “당정 갈등이 생기면 대통령실도 감당이 안 된다”며 리스크 관리에 나섰다. 특히 ‘wait and see(기다리고 지켜본다)’ 기조를 강조하며 대통령실이 전당대회에 개입한다는 오해를 사전에 차단했다. 김건희 여사 ‘문자 읽씹(읽고 무시)’ 논란이 불거지는 등 자칫 당무 개입 논란이 번질 수 있었지만, 정 실장의 군기반장 역할이 불필요한 오해를 막을 수 있었다는 평가다. 정 실장은 4월 24일 부임 첫날에도 “대통령실은 일하는 조직이지, 말하는 조직이 아니다”며 ‘원 보이스’의 중요성을 강조했었다.
일각에선 정 실장이 윤·한 사이의 가교가 될 수 있었던 건 윤 대통령과의 소통이 원활하기 때문이란 분석이 나온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정 실장은 수시로 통화할 뿐 아니라 주말에도 관저로 가서 대통령에게 대면 보고를 한다”고 귀띔했다. 한국수력원자력이 체코 원자력발전소 건설 사업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지난달 17일 밤에도 정 실장은 서울 한남동 대통령 관저에서 윤 대통령과 함께 보고를 받으며 기쁨을 나눴다. 한 참모는 “윤 대통령이 다른 사람보다 정 실장의 조언을 경청하는 거 같았다”고 전했다.
언론인 출신으로 국회 부의장과 당 비대위원장·원내대표 등을 맡았던 정 실장은 현안 파악도 빠르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수석급 참모와 함께 평일 아침 티타임을 할 때면 주요 현안에 관해 깊게 파고들고 담당 수석의 입장까지 들은 뒤 그 자리에서 해당 현안에 대한 대통령실의 공식 입장을 정리한다고 한다. 대통령실 실무 인사는 “정치인 출신 비서실장이 오니까 일하는 사람 입장에선 업무가 수월한 면도 있다”고 말했다.
허진·박태인 기자 b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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