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민주주의의 신뢰에 의문 던진 ‘트럼프 현상’
4년 전에 필자는 ‘초선’이라는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해 2020년 대선 당시 연방하원에 도전한 재미 한인 다섯 명의 유세 현장을 따라다녔다. 당시 “2020년 대선은 미국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선거로 기억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코로나19로 하루에 최대 1736명이 사망했고, 경제는 위기에 봉착했다. 조지 플로이드 사망으로 인종차별 철폐 운동과 아시아계 혐오 범죄가 끊이지 않다. 지금 보니 4년 전의 생각이 틀렸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등장하면서 미국 상황은 더 위태로워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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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죄 판결에도 제재 없이 재출마
미국 사법·민주주의 위기 드러내
동맹국 언론들 단편적 보도 유감
」
재미 한인으로서 미국 대선과 관련된 한국 언론의 보도 논조를 보면서 때때로 심각한 문제의식이 생긴다. 트럼프 후보를 다루는 시각이 너무 단편적이고 순진해 보여서다. 적잖은 언론은 트럼프 후보를 ‘괴짜’ 정도로 희화화하거나, 그의 정치적 정당성 주장을 비판 없이 받아들인다. 트럼프 후보의 당선을 기정사실로 여겨 한반도에 줄 영향을 예측하는 수준에 그치거나, 심지어 어떤 방송은 트럼프 후보를 정치적 재기에 성공한 영웅인 양 묘사하는 특집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하지만 트럼프에 대한 보도 태도는 정당이나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 트럼프 1기의 성과에 대한 호불호 문제도 아니다. 핵심은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기본적 신뢰의 문제다. 트럼프 후보는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선거와 평화적 정권 교체를 부정했다. 그는 미국의 모든 법원에서 “공정하게 진행됐다”고 판결한 2020년 대선 결과를 ‘사기’라고 지금도 주장한다.
2021년 1월 임기 종료 직전 수천 명의 지지자를 선동해 의사당에 난입하고, 새로 선출된 대통령(조 바이든) 비준 과정을 방해했다. 의원들을 협박하는 과정에서 경찰과 시위대 여러 명이 사망하는 사건의 중심에 트럼프가 있었다. 2020년 11월 대선 직후 중요한 경합주였던 조지아주의 선거 주무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존재하지도 않던 “1만1780표를 찾아내라”고 압박했다.
위의 두 사건으로 퇴임 이후 기소된 지 3년이 지났지만, 변호인단의 훼방과 재판 지연 작전 때문에 올해 대선 전에 재판을 받지 않을 것 같다. 지난 5월 말에 유죄를 선고받은 ‘성인 여배우 입막음을 위한 회계 부정’ 사건에서 증명됐듯 유죄 판결을 받더라도 재선 도전에 아무런 법적·제도적 제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공분을 일으킨다.
현직 대통령이 폭력적 선동을 통해 재선에 실패하더라도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고 그다음 대선에 재출마할 수 있는 현실은 기가 막힌다. 그동안 미국 민주주의를 지탱해온 ‘명예 규율(honor code)’의 붕괴와 미국 제도의 심각한 결함을 보여준다.
한국 언론도 이런 문제의 심각성을 지적해야 한다. 미국은 한국이 가장 우러러보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표본이 아닌가. 그런데 트럼프 후보에 대한 건설적 비판은 민주당의 음모라거나 ‘마녀사냥’이라는 말로 일축된다. 지금 미국은 사법제도와 대의 민주주의가 실패했다. 유일한 견제 장치는 11월 대선에서 민심의 심판뿐이다.
그나마 재선을 포기한 바이든 대통령의 결단은 신선하다. 바이든 대통령은 고령 리스크와 인지능력 저하에다 TV토론 참패 이후 민주당 원로들과 여론의 압박으로 사퇴가 불가피했다. 그럼에도 권력을 스스로 내려놓은 그의 정치적 행보는 트럼프 후보와 큰 대조를 이룬다.
미국 대통령의 영향력은 미국 국내뿐 아니라 세계 질서를 바꿔 놓을 만큼 강력하다. 그러나 실질적 영향력만큼 중요한 것은 미국 대통령의 민주주의와 자유 세계에 대한 상징성이다. 트럼프 후보는 그 상징성을 위협하는 존재로 여겨진다. 트럼피즘 (Trumpism)으로 대변되는 폭력적 정치 극단주의는 이미 위험 수위를 넘었다.
민주주의의 관행과 작동 방식, 평화로운 권력 승계를 음모론과 실력 행사로 거부한 정치인이 포퓰리즘을 무기로 다시 대통령이 될 수도 있는 현실은 참담하다. 미국 대중의 집단지성이 대선에서 제대로 작동하기를 기대할 뿐이다. 아울러 미국의 주요 우방국이자 선진국 반열에 오른 대한민국 언론은 민주주의의 가치를 부정하는 미국 정치인의 실체를 직시하고 정당과 이념을 초월해 용기 있게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주길 기대한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전후석 미국 변호사·영화 ‘헤로니모’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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