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동의 최초의 질문] 운을 불러온 엔비디아의 전략
성공한 기업가의 회고에는 늘 운이 좋았다는 겸손한 언급이 빠지지 않는다. 한국의 1세대 기업가들이었던 정주영 회장과 이병철 회장도 그랬고, 벤처신화를 쓴 오늘의 젊은 기업인들도 사업의 성공에 운이 중요했다고 이야기한다. 혁신의 아이콘인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도, 심지어 일론 머스크도 운이 좋았다는 언급을 자주 한다. 기막힌 시점에 귀인이 나타나기도 하고, 정말 뜻하지 않게 갑자기 시장이 확 열리기도 한다. 정말 운이 좋아야 성공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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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엔 단순 그래픽칩으로 시작
SW 플랫폼 구축, AI 생태계 장악
“뜻밖의 행운으로 성공” 말하지만
미래 대비해 갖은 노력 다한 결과
」
운으로 말하자면 엔비디아의 젠슨 황에게 찾아온 뜻밖의 행운만 한 게 없다. 젠슨 황은 1993년 엔비디아를 창업한 이후 집요하게 그래픽 정보처리기술 한 가지에 집중해서 역량을 키워왔다. 주력 제품은 CPU보다 기능이 단순하면서 오로지 게임의 그래픽 정보를 빨리 처리하기 위한 용도로 특화된 그래픽 칩이었다. 1997년 RIVA 128 버전을 내놓았고, 시장에서 제법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후에도 집요하게 성능을 개선해나갔고, 1999년 GeForce 256 제품을 내놓으면서부터는 그래픽 칩이라는 용어 대신 GPU(Graphic Processing Unit)라는 좀 더 일반적인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2010년에는 상당히 성능이 개선된 GTX 580이라는 GPU를 내놓았다.
딥러닝 원조가 선택한 엔비디아
그러던 중 2012년 뜻하지 않던 결정적인 운이 찾아왔다. 인공지능의 성능을 겨루는 이미지넷 대회에 캐나다의 제프리 힌튼 교수팀이 출전했는데, 바로 이들이 행운을 가져다준 주인공이었다. 힌튼 팀의 팀원이었던 박사과정 학생 알렉스 크레체프스키가 딥러닝에 필요한 계산을 빠르게 하기 위해 엔비디아의 GTX 580 칩을 사용하자고 제안했다. 힌튼은 알렉스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팀의 인공지능 모델을 ‘알렉스넷(AlexNet)’이라고 이름 지었다. 출전 결과 2위 팀과 10% 이상 차이 나는 뛰어난 정확도를 보이면서 우승하였고, 딥러닝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바로 이때부터 엔비디아의 GPU는 PC방의 컴퓨터 속에서 게임 그래픽 정보나 처리해주던 단순한 부품의 역할을 넘어 인공지능 시대 가장 중요한 물리적 인프라로 떠올랐다. 젠슨 황의 입장에서는 예상하지 못했던 엄청난 운이 제 발로 찾아온 격이고, 덕분에 세계 10위권 부자의 위치를 바라보게 되었다. 이를 뒷받침하듯 젠슨 황은 여러 차례 공개적으로 알렉스넷이라는 행운 덕에 엔비디아가 완전히 탈바꿈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엔비디아에게 우연히 찾아왔던 바로 그 행운의 손길을 만나지 못해 사라져간 기술과 기업가들이 부지기수다.
준비된 사람에게 찾아오는 운
결국 성공의 비밀은 운일까? 한마디로 답하자면 절대 그렇지 않다. 운도 준비된 사람에게 찾아오는 법이다. GPU의 성능을 높여가던 2000년대 초반, 젠슨 황은 엉뚱하게도 단백질 구조를 연구하는 생물학 실험실에서 엔비디아의 GPU로 계산을 하고 있는 사례를 접하게 된다. 이처럼 생각지도 못했던 분야에서 본인의 기술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 몇 년간의 투자 끝에 2006년에 쿠다(Computer Unified Device Architecture, CUDA)라는 소프트웨어 플랫폼을 만들어 배포하게 된다. 쿠다를 이용하면 각 응용분야에서 빅데이터로 연산작업을 하고자 하는 개발자들이 자신의 용도에 맞게 엔비디아의 GPU를 쓸 수 있도록 프로그래밍을 할 수 있다. 이때부터 GPU는 여러가지 용도로 쓰이는 범용의 계산칩으로서 자리를 잡게 되었는데, 이를 가능하게 한 결정적인 플랫폼이 쿠다이다. 쿠다라는 인터페이스가 생기자 수많은 응용분야에서 GPU를 가져다 자신의 용도에 맞게 쓰기 시작했고, 인공지능을 연구하던 힌튼 팀의 알렉스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 지금은 엔비디아의 쿠다 플랫폼에 익숙한 사람들이 너무 많아져서 인공지능으로 뭔가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엔비디아가 아닌 다른 회사의 GPU를 쓰기가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오늘날 GPU 기술에서 엔비디아가 사실상 독점적 위치를 누리고 있는 이유도 바로 이 쿠다 플랫폼이 구축한 강력한 생태계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만약 젠슨 황이 쿠다라는 플랫폼을 만들어 배포하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면, 알렉스가 GPU를 쓰는 일은 없었을지 모른다. 운이 젠슨 황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젠슨 황이 길을 포장해 운이 걸어 들어올 수 있도록 유도한 것이다.
생태계 구축은 엔비디아가 처음
더구나 GPU를 만드는 회사가 엔비디아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가능한 많은 사람이 참여하여 경험을 공유하면서 혁신이 일어날 수 있도록 쿠다라는 공유 생태계를 구축한 것은 엔비디아가 처음이었다. 생태계에 참여하는 사람이 많으니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기막힌 혁신의 아이디어가 탄생할 가능성 역시 높을 수밖에 없었다. 운이 들어올 길을 여러 갈래로 만들어놓은 것과 같다. 운은 준비하고 노력하는 자에게 찾아온다는 말은 상투적 표현이 아니라 진실이다. 성공한 기업인들이 한결같이 운을 이야기하는 것은 미래의 가능성을 대비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운처럼 보였던 일들도 노력한 결과 언젠가는 찾아오기로 예정된 기회였을 뿐이다. 언제 어떤 모양으로 올지를 정확히 맞추기가 어려울 뿐, 운은 정확하게 찾아온다.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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