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2035] 다른 당 의원의 연설문
1일 의원실에서 만난 더불어민주당 정성호 의원은 손에 다른 당 초선 의원의 연설문을 들고 있었다. 5박 6일간 야당의 법안 상정 강행과 여당의 필리버스터가 지루한 영화처럼 미적미적 지나간 후였다.
정 의원은 그 필리버스터를 귀담아들었다고 했다. 그 중 “누가 써준 원고 없이 자기 생각을 설득력 있게 얘기한 사람이 이 사람밖에 없었다”며, 꼼꼼히 다시 보려고 속기록에 남은 한 의원의 연설을 프린트했다. 원고 상단에 이준석 개혁신당 의원의 이름이 보였다.
다른 당 의원 연설문을 다시 읽는다는 것. 산뜻한 생경함 속 뜬금없이 막내 시절 선배들에게 들은 우스개가 머리를 스쳐 갔다. 통상 상임위에서 합의 못 한 쟁점 법안은 국회의장과 여야 원내지도부가 만나 최종 담판을 짓는데, 이 비공개 회동에선 일종의 ‘약속 대련’이 벌어진다는 우스개다. 기자들이 문 앞에 진을 치고 문틈 새로 소리를 엿듣고 있으니, 미리 합의문을 써도 일부러 언성을 높여서 치열한 협상이 벌어지는 척 연기를 한다는 얘기였다.
문 앞의 기자들에겐 괘씸한 괴담이겠지만, 돌아보니 그 농담은 협상의 성공을 당연한 전제로 한 미담이기도 했다. 본회의장에서 여야가 어울려 농담을 섞고, 상임위에서 언성 높이던 의원들이 산회 후 어깨를 두드리며 냉면집에 소폭이라도 마시러 가던 능청스러운 때가 진짜 있었다는, 이제는 사라진 정치의 흔적 같은 미담.
22대엔 타당 의원의 연설을 귀담아듣는 것조차 놀라운 일이 됐다.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 탄핵소추안이 보고된 1일 본회의에선 여야 원내수석부대표의 의사진행발언이 시작되자 양당 의원들이 준비한 듯 고성과 조롱을 퍼부었다. 연임을 앞둔 민주당 전직 대표와 원내대표는 대법관 임명동의안 표결 내내 여당 의원 한 사람과도 악수를 나누지 않았다. 필리버스터 땐 야당이 퇴장해 청자 없는 반대 토론이 펼쳐졌고, 다음날 법안 표결 땐 여당이 모두 퇴장했다. 강행처리와 거부권은 새로운 약속대련의 초식이 됐다.
듣지 않으면 점점 더 서로에게 괴물이 된다. 22대 국회 개원 3개월 만에 5명의 의원이 윤리위에 제소됐고, 상임위에선 “지가 뭔데”, “빌런” 등 낯 부끄런 언쟁이 오고 간다. 적과 웃는 장면이라도 카메라에 찍혔다간 ‘재명이네마을’도, ‘위드후니’도 발칵 뒤집힌다. 이런 국회에선 합의는커녕 대화조차 사치다.
“대화해보니 의외로 사람이 합리적이고 괜찮더라고.” 얼마 전 통화 한 전직 야당 의원은 한 전직 여당 의원을 이렇게 평가했다. 둘 다 낙선 후 우연한 자리에서 만났는데 생각보다 대화가 잘 통하더라고 했다. 의외성을 발견하기까지 4년과 낙선의 아픔이 지나갔다. 그들이 서로의 연설문이라도 일찍 읽어봤더라면 어땠을까. 22대 국회에선 또 실없는 가정일 뿐이다.
성지원 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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