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유학파 기자의 몰락... 이런 거짓말까지 퍼트렸다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프랑스 파리는 2024년 제33회 대회까지 합쳐 올림픽을 세 번이나 개최했다. 1900년 제2회 대회에 이어 1924년 제8회 대회도 파리에서 열렸다.
1900년과 1924년 대회는 다른 도시에서 열릴 수 있었지만 결국 파리에서 개최됐다. 제1회 대회를 개최한 그리스는 제2회도 자국에서 열기를 희망했지만, 1896년에 제2대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이 된 피에르 드 쿠베르탱의 주도하에 파리에서 두 번째 대회가 열리게 됐다.
제2회 대회로부터 불과 20년 만에 파리에서 또다시 열린 것은 후보 도시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파리 외에 로스앤젤레스·바르셀로나·암스테르담·프라하·로마 등도 개최를 희망했다. 파리가 쟁쟁한 후보들을 제친 데는 파리 출신인 쿠베르탱의 의지가 크게 작용했다. 1900년 대회가 만국박람회 부속행사처럼 열린 것이 안타까워 고향에서 제대로 치러보고자 했던 그의 의지가 영향을 줬다. 그는 1924년 파리 올림픽을 치른 그 이듬해에 위원장에서 퇴임했다.
정조 임금 때인 1789년에 혁명이 일어난 프랑스는 혜성처럼 등장한 나폴레옹의 혁명전쟁으로 한때는 유럽을 강타했지만, 그의 몰락과 함께 위축되어 갔다. 나폴레옹 전쟁이 진압된 뒤 오스트리아 정치가 클레멘스 메테르니히의 주도로 열린 1815년 빈 회의는 프랑스를 견제하는 전제하에 세력균형 시스템으로 유럽 국제질서를 재편했다.
빈 체제하에서도 프랑스는 강대국의 지위를 잃지는 않았지만, 종전보다 위축된 상태를 감내해야 했다. 1866년에 조선까지 와서 병인양요를 일으키기도 했지만, 1870년에 비스마르크 총리의 프로이센과 치른 보불전쟁에서 패했다. 영국과 러시아가 주도한 19세기 중후반 세계질서 하에서 프랑스는 2위 그룹 국가였다.
그랬던 나라가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때 프로이센의 후신인 독일을 꺾고 세계 정상급 반열에 올라섰다. 프랑스 파리가 불과 20년 만에 올림픽을 또다시 개최한 데는 쿠베르탱 남작의 영향력도 작용했지만 이 같은 프랑스의 국운도 영향을 끼쳤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 1926년 7월 18일 자 <동아일보> 2면 우하단에 실린 이정섭의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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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가 이처럼 승승장구하며 두 번째 올림픽을 개최한 1924년에 파리에 체류한 25세의 한국인 유학생이 있다. 머지않아 서른을 전후한 나이에 친일파로 변신하게 될 이정섭이 그 주인공이다. 1899년에 함경남도 함흥에서 출생한 그가 파리 올림픽 현장에 있었다는 점은 그의 사진이 실린 1926년 7월 18일 자 <동아일보> 2면 우하단에서 확인된다.
"함흥군 주서면 상리 리뎡섭 씨는 지금으로부터 칠년 전에 본국에서 보성중학을 마치고 불국(佛國)으로 건너가 파리에서 고등중학을 맛치고 국립파리대학에서 문과사회학을 공부하다가 지난 삼월 삼십일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하고 작(昨) 17일 오전 일곱시 사십오분 차로 입경하엿는데 ······"
19세기 후반에 일본이 서구화(이른바 근대화)의 모델로 삼은 나라가 독일과 프랑스다. 그런 프랑스에서 파리대학을 졸업했으니, 이정섭의 주가는 대단할 수밖에 없었다. 위 기사의 부제목도 "작일 금의로 환향한"이다.
금의환향한 이정섭은 처음에는 민족주의 활동에 참여했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이정섭 편은 "1926년 7월 귀국하여 이듬해 1월 신간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고 알려준다.
파리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했다는 이야기가 유력 일간지에 보도될 정도로 주목을 받은 인물이 대규모 민족주의단체인 신간회에 가담했다. 일제 당국이 자기를 주시하리라는 것을 뻔히 알 수 있는 상태에서 이렇게 했다. 이 시기의 그가 민족주의로 기울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민족주의 성향은 중외일보사 논설기자 시절인 1928년의 필화 사건에서도 나타난다. <중외일보>의 간판 기자가 된 그는 1927년 상반기에는 제국주의에 맞서는 중국인들의 혁명 투쟁을 기사에 담고, 그해 하반기부터 이듬해 상반기에는 3·1운동 민족대표 최린과 함께하는 세계일주 기행문을 연재하다가 아일랜드 독립운동에 관한 글을 썼다. 그의 기행문에는 "자치에 만족 말고 최후 목적을 달(達)하라"라는 대목도 있었다. 구속시킬 테면 시켜보라는 식으로 글을 썼던 것이다.
총독부 당국이 자기의 기사를 삭제하자, 그는 삭제 사실까지 다음 기사에 쓰면서 "붓을 집어던지고 십흔 생각이 잇스나, 그래서는 기행문의 자살행위가 됩니다"라며 검열 당국에 대한 정면도전의 의지를 표시했다.
2012년 2월에 <신문과 방송>에 게재된 정진석 한국외대 명예교수의 기고문 '아일랜드 기행문 꼬투리...총독부, 기소·정간 탄압'은 이정섭의 과감한 글쓰기에 대한 일제의 대응을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검찰이 법원의 일부였던 당시의 법제를 염두에 두면서 읽어야 할 장면이다.
"1928년 2월 27일 오전 10시 30분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차석검사 나카노와 마쓰마에 검사의 지휘 아래 종로서 형사들이 자동차 두 대에 나누어 타고 중외일보에 들이닥쳤다.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소속 검사는 다섯 명이었는데 두 명이 출동한 것은 사건을 매우 중대하게 취급하고 있음을 의미했다. 수사진은 중외일보 편집국과 주간 이상협(편집 겸 발행인), 논설반 기자 이정섭의 가택도 수색하여 원고 등을 압수했다."
▲ 이정섭이 1942년 2월 8일 자 <매일신보>에 기고한 '세계를 뒤엎는 전파전쟁과 무선방송' |
ⓒ 한국연구원 |
친일단체의 실무 간사가 되어 친일재산으로 생활하기 시작한 그의 이후 행적에 관해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4-14권은 그의 반민족행위를 이렇게 요약한다.
"1938년에 총독을 면담하여 내선일체 방법으로 조선단일당 건설을 건의함. 이후 1938년에 경성방송국에 입사하여 경성방송국 소속으로 1941년부터 매일신보에 '굳은 맹세 1년', '일만화 형제동맹', '세계를 뒤덮는 전파전쟁과 무선방송' 등의 글을 통해 태평양전쟁을 찬동함."
그는 직장인 경성방송국에서만 친일한 게 아니라 관변단체에 가담하는 방법으로도 친일을 했다. 윗글에서 이어지는 대목이다.
"1941년 임전대책협력회의 가두채권판매대 명치정대에서 활동하였으며,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과 평의원을 역임하였음. 또한 1945년에 결성된 조선언론보국회에서 평의원을 지냈으며, 같은 해 6월 14일 개최된 언론총진격대회에서 연사로 활동하였음."
중외일보사는 이정섭 이름 앞에 '문학사'라는 타이틀을 붙였다. 대학 졸업자가 귀하던 시절에 프랑스 대학을 졸업한 그는 그 정도로 귀한 존재였다. 거기다가 일어는 물론이고 영어·불어에 능하고 독일어도 약간 한다는 평을 받았다.
이런 능력을 활용해 독립운동 성향의 글을 쓰다가 구속까지 됐던 그는 친일로 돌아선 뒤에는 선구적 지식인으로 알려진 자신의 이미지를 최대한 활용했다. 그는 그런 이미지를 일제의 승리에 대한 대중적 신뢰를 조성하는 데 이용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1942년 2월 8일자 <매일신보>에 기고한 '세계를 뒤엎는 전파전쟁과 무선방송'이란 기고문은 그의 프랑스 유학 경력과 세계 지식을 아는 독자들에게는 신뢰를 심어줄 수 있는 글이었다. 그는 "이번 전쟁에서 선전의 급증이라면 그것은 무선방송의 비상한 활약이올시다"라며 최신 경향을 소개하면서 일본이 무선방송에 의한 선전전에서도 적들을 압도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런 식으로 일본의 승리에 대한 기대감을 퍼트린 것이다. 위 진상규명보고서가 현대어로 다듬은 기고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의 동맹국인 독일이나 이태리는 우리나라의 통신을 받아 가지고 다시 구라파로 남미로 방송을 해주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지금 대동아전쟁은 오로지 무력전에서 큰 전과를 거두고 있을 뿐 아니라 선전전에 있어서도 단연 영·미를 압도하고 있습니다."
프랑스가 두 번째로 올림픽을 개최할 때 파리에 있었던 이정섭은 자신의 국제감각과 유학 이미지를 최대한 활용해 신문·방송·강연 등에서 거짓말을 퍼트렸다. 그의 프랑스 유학 경험이 일제에 대한 충성의 도구로 활용된 것이다.
일제를 위한 거짓말을 하며 친일재산을 축적하고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던 그는 해방 뒤에도 조선방송협회 회장대리나 대한국민당 의사부장이 되면서 기존의 지위를 그런대로 이어갔다. 그러다가 한국전쟁 발발 다음 달인 1950년 7월에 납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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