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독립투사 후손' 허미미 "파리서 완전한 한국인 됐어요"
"에펠탑 아래서 올림픽 메달이라니, 꿈만 같아요."
지난 4일(한국시간) 프랑스 파리의 샹드마르스 경기장에서 만난 재일동포 유도 국가대표 허미미(22·경북체육회·세계랭킹 3위)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2024 파리올림픽 유도 종목이 열린 샹드마르스 경기장에선 에펠탑이 올려다보인다. 허미미는 지난 30일 이곳에서 열린 대회 여자 유도 57㎏급 결승에서 일본계 캐나다 대표 크리스타 데구치(29·세계랭킹 1위)와 골든스코어(연장전·정규시간은 4분)를 포함해 10분 35초간의 혈투 벌인 끝에 반칙패(지도 3개)했다.
그래도 금메달 못지 않게 값진 은메달이었다. 허미미는 이번 올림픽 유도 종목 3일차에 한국 유도에 첫 메달을 안겼다. 여자 유도 선수로는 2016 리우올림픽 48㎏급 정보경 이후 8년 만에 나온 메달이었다. 허미미가 메달 물꼬를 트면서 한국 유도는 5개의 메달(개인전 은2·동2, 단체전 동)을 수확했다. 2000 시드니올림픽(은2·동3) 이후 가장 많은 메달이다. 특히 단체전은 경기를 뛰지 않은 후보 선수들에게도 메달이 주어지기 때문에 한국은 주전으로 활약한 허미미를 포함한 11명의 선수 모두가 동메달을 받았다.
허미미는 "개인전 은메달을 땄을 땐 메달을 놓친 언니, 오빠들의 눈치가 보여 마음껏 기뻐하지 못했다. 룸메이트인 여자 57㎏급 (김)지수 언니가 패자부활전에서 탈락한 날 밤새 울었는데, 나도 같이 울었다. 단체전에서 동메달을 따 우리 대표팀 전원이 시상대에 오를 수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러고 말했다. 그는 이어 "생애 첫 올림픽 출전에서 2개의 메달(은·동)을 목에 걸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하다. 한국으로 건너와 지난 3년간 힘든 훈련을 버텨낸 덕분이다. 한국행을 만류했던 아빠·엄마도 한국에서 함께 유도하는 여동생 허미오(20)도 나에게 '태극마크를 달길 정말 잘했다'고 영상 통화로 축하해주셨다"며 또 한 번 웃었다.
2002년생 허미미는 한국 유도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도쿄 태생인 그는 일본에서 자랐지만 한국 국적을 유지한 유도 선수 출신 아버지를 따라 여섯 살 때 처음 도복을 입었다. 어머니는 일본 국적이다. 중3이던 2017년 일본 전국중학교유도대회에서 우승하는 등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냈다. 그런 그가 한국에 온 건 재일본대한민국민단 간부 출신으로 2021년 별세한 할머니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서다. "손녀가 꼭 한국 대표가 돼 올림픽에 나갔으면 좋겠다"였다.
허미미는 부모의 만류에도 같은 해 경북체육회에 입단했다. 2022년 2월 대표 선발전에서 당당히 태극마크를 달았다. 이때부터 고생길이 활짝 열렸다. 충북 진천국가대표선수촌에 입촌 당시 허미미는 일본 명문 와세다대 스포츠과학부 1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유도 대표팀에선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운동과 학업을 병행한 첫 사례였다.
그는 독립운동가 허석(1857~1920년) 선생의 5대손이기도 하다. 경북체육회 김정훈 감독이 선수 등록 과정에서 밝혀냈다. 하지만 당시 허미미는 한국어를 정식으로 배운 적 없어서 한국말을 거의 못했다. 그러자 일부에선 "일본인인지 한국인인지 모르겠다. 기량도 입증되지 않은 신입 국가대표에게 입촌 중에 수시로 해외를 오가는 건 특혜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허미미는 "태어나고 20년간 자란 일본을 떠나 한국에서 적응하는 건 쉬운 일은 아니었다. 태극마크를 달고 국제대회에 나갔다가 일본으로 들어와 와세다대 강의실에 앉아 있을 땐 '내가 한국 사람인지, 일본 사람인지 정체성의 혼란이 오기도 했다"면서도 "그런 고민은 오래 가지 않았다. 다행히 나를 편견 없이 받아준 여자 대표팀 김미정 감독님, 소속팀 김정훈 감독님과 대표팀 언니들 덕분에 적응할 수 있었다"고 털어놨다.
허미미는 한국에서 운동하고 일본에서 공부하는 빡빡한 일정에 빠르게 적응했다. 그는 올림픽 전까지 올해 세계선수권을 포함한 국제 대회에서 7차례나 우승하며 한국 유도의 간판으로 올라섰다. 통역 없으면 어려웠던 한국 말도 지금은 유창하게 한다. 한글도 쓰고 읽는다. 손편지를 직접 쓸 실력이다. 한국과 일본, 이중국적자였던 허미미는 일본인이라는 시선이 싫어서 지난해 12월엔 일본 국적을 포기했다. 와세다대에선 현재 4학년으로 내년 졸업을 앞뒀다. 대부분 A학점이다. 대학 유도부에선 올해 주장까지 맡았다.
허미미는 "한일 두 나라를 오가며 운동과 학업을 슬기롭게 해내는 방법을 터득했다. 정체성도 더는 헷갈리지 않는다. 나는 일본에서 나고 자랐고, 지금은 태극마크를 달고 유도하는 한국인"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올림픽 시상대에 올라보니 내가 한국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았다. 힘들게 외운 애국가를 부르지 못한 게 아쉽다"고 말했다.
허미미는 은메달을 따고 "파리에서 파스타를 먹는 게 소원"이라고 밝혔는데, 이날 이뤘다. 그는 파리의 한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토마토 파스타와 크림 파스타 두 접시를 주문해 먹었다. 식사 내내 "음음, 제가 생각했던 맛 그대로예요"라고 했다. 식사를 마치며 허미미는 목표를 밝혔다.
그는 "은메달도 좋지만 역시 금메달이 아니면 만족 못할 것 같아요. 처음엔 몰랐는데, 며칠 지나니 경기장에서 태극기를 휘날리지 못한 게 너무 속상하다"고 말했다. 그는 "5일 귀국하는대로 경북 군위에 있는 할아버지(허석 선생) 순국비를 찾아 메달을 걸어드리겠다. '태극마크를 달고 4년 뒤 로스앤젤레스올림픽에선 꼭 금메달을 따겠다'고 말씀드릴 것"이라며 웃었다.
파리=피주영 기자 akap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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