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개근’ 구본길 “동생들 믿고 쉽니다” 오상욱 “딱 1년만요” [단독인터뷰]
구본길(35·국민체육진흥공단)의 얼굴에선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함께 역사를 쓴 오상욱(28·대전광역시청)도 마찬가지. 피곤한 기색은 있었지만, 땀과 눈물로 따낸 두 개의 금메달을 바라보며 연신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2024 파리올림픽에서 펜싱 남자 사브르 단체전 우승을 합작한 ‘맏형’ 구본길과 ‘에이스’ 오상욱을 지난 3일 프랑스 파리 도심의 코리아하우스에서 만났다. 이 종목 올림픽 3연패라는 대업을 이룬 둘은 “이날만을 위해 준비했던 순간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정말 꿈같은 하루였다. 숙소로 돌아와 선수들끼리 ‘정말 현실이 맞냐’고 물어볼 정도로 기뻤다”며 활짝 웃었다.
구본길과 오상욱은 1일 프랑스 파리 그랑팔레에서 열린 결승전에서 헝가리를 45-41로 물리치고 금메달을 차지했다. 펜싱 종주국인 프랑스의 수도 파리, 그것도 1900년 만국박람회를 위해 지어진 유서 깊은 경기장에서 후배인 도경동(24·국군체육부대), 박상원(23·대전광역시청)과 함께 시상대 가장 높이 올랐다.
이번 우승으로 한국 펜싱은 남자 사브르 단체전 3연패를 달성했다. 2012 런던올림픽에서 원우영(42)과 오은석(41), 김정환(41), 구본길이 처음 정상을 밟았고, 종목 로테이션상 열리지 않았던 2016년 리우 대회를 건너뛴 뒤 2020 도쿄올림픽에서 김정환과 구본길, 김준호(30), 오상욱이 2연패를 기록했고, 파리에서 금자탑을 쌓았다.
런던 대회 막내로 시작해 이번 대회 맏형으로 3연패를 이끈 구본길은 “지난 대회에서 함께했던 형들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런던에서 내가 (원)우영이 형에게 ‘우리 정말 금메달 딸 수 있어요?’라고 물었는데 형이 ‘걱정하지 마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런데 이번 대회에선 (도)경동이가 내게 똑같은 질문을 하더라. 그래서 나도 ‘전혀 걱정 마라’고 안심시켜줬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고 했다.
오상욱에게도 이번 파리올림픽은 생애 최고의 순간으로 남았다. 앞서 열린 남자 사브르 개인전에서 정상을 밟았고, 단체전에서도 우승해 2관왕 타이틀을 거머쥐었기 때문이다. 한국 펜싱 역사상 단일 올림픽 2관왕은 오상욱이 처음이다.
오상욱은 “금메달 두 개만 보면 밥을 먹지 않아도 배부르다”면서 “사실 개인전을 마치고 몸이 정말 좋지 않았다. 제대로 먹지도 못할 만큼 침대에서 나오기조차 어려운 상태였다. 그래도 경기가 다가오니까 컨디션이 돌아오더라. 무엇보다 개인전에서 얻은 자신감이 2관왕을 향한 큰 동기부여가 됐다”고 말했다.
아직 기침 증세가 있던 오상욱을 바라보던 구본길은 “(오)상욱이가 사실 3~4개월 전까지 자기 컨디션을 찾지 못했다. 혼자 고민도 컸고, 노력도 많이 했다. 그러더니 얼마 뒤 전혀 달라진 선수로 변했다. 경기를 하면서 ‘얘가 이렇게 무서운 선수였나’라는 생각이 들더라. 그때부터 상욱이가 파리에서 일을 낼 줄 알았다. 상욱이가 있어서 3연패가 가능했다”고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프랑스가 종주국인 펜싱은 유럽 국가의 전유물로 여겨진다. 중세시대 호신용 검술로 시작해 스포츠로 진화한 만큼 역대 올림픽에서도 프랑스와 이탈리아, 독일, 헝가리 등이 강국으로 꼽혔다. 그러나 한국은 이 틈을 비집고 3연패라는 역사를 썼다.
비결을 묻자 구본길은 “런던과 도쿄, 파리를 돌이켜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맏형과 막내의 나이 차이가 아무리 많이 나더라도 우리는 선후배보다는 친구 같은 사이로 지낸다. 동생은 형을 어려워하지 않고, 형은 동생을 다그치지 않는다. 이번 대회에서도 (도)경동이가 내게 ‘기죽지 말고 정신 차리라’고 하더라. 그 말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웃었다. 오상욱은 “런던 대회를 시작으로 형들의 노하우가 동생들에게 잘 전달되고 있다. 선배가 이끌고, 동생이 밀어주는 힘이 3연패의 원동력이라고 본다”고 진단했다.
3연패의 산증인인 구본길은 결승전 직후 ‘1년 휴식’을 천명했다. 당분간 육아에만 전념하며 가정을 돌볼 생각이다. 마침 우승 이틀 뒤인 3일에는 아내가 둘째 아들(태명 모찌)을 출산해 기쁨이 더했다. 구본길은 “내가 없는 동안 아내가 아이를 낳아 정말 미안하고 고마울 따름이다. 빨리 둘째를 보러 가고 싶다”면서 “생각해보니 17년 동안 국가대표 개근을 했더라. 잠시 쉴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이전부터 계획했던 바를 우승 직후 발표한 것뿐이다. 동생들을 믿고 잠시 쉬겠다”고 말했다. 옆에서 이를 듣던 오상욱은 “나는 형을 이해한다. 그동안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을 위해 정말 많이 희생해왔다. 대신 딱 1년만 쉬고 돌아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터뷰 말미 둘에게 파리에서의 남은 계획을 물었다. 구본길은 “아내에게 명품백을 사주기로 했는데 아직 사지 못했다. 매장을 방문할 시간도 없었다. 빨리 약속을 지키러 가야 한다”고 했다. 오상욱은 “벌써 4년 뒤 LA올림픽 이야기가 나오더라. 아직은 이른 느낌이다. 지금 당장은 빨리 한국으로 가서 일주일만이라도 푹 쉬고 싶다. 그러고 나서 다음 계획을 짜려고 한다”고 말했다.
파리=고봉준 기자 ko.bong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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