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사는 양봉소녀가 TV에 출연하자 생긴 일들
[장혜령 기자]
▲ 영화 <더 원더스> 스틸컷 |
ⓒ M&M 인터내셔널 |
12살 젤소미나(알렉산드라 마리아 룽구)는 호기심 많은 소녀지만 아빠 볼프강(샘 루윅)의 일손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밑으로 세 동생이 있지만 아직 어려 농가 일을 돕기는커녕 장난치느라 엉망이 된 뒤치다꺼리까지 해야 한다.
사춘기를 맞은 젤소미나 좋아하는 가수의 춤을 따라 추거나 예쁘게 꾸미는 게 좋다. 하지만 시골에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토스카나를 떠나 밀라노로 가고 싶다. 그러던 어느 날 TV 프로그램 '전원의 기적' 팀이 촬영차 시골을 찾아 고대 복장을 하고 무언가를 찍어갔다.
▲ 영화 <더 원더스> 스틸컷 |
ⓒ M&M 인터내셔널 |
아빠는 센 척하지만 속은 여린 사람이다. 도시에서 내려와 양봉과 가축을 기르며 가족을 건사한다. 첨가물을 넣지 않고 옛 방식 그대로 벌꿀을 생산하지만 벌이는 시원치 않다. 집세는 밀렸지, 빚은 늘어나고 있지, 기계는 낡아서 교체해야 하지. 최근에는 농장까지 쫓겨날 위기에 처했지만 아빠는 태평하다. 어떻게든 되겠지 싶은 거다.
딸이 도시로 떠나 고생하는 걸 원치 않는 아빠는 대를 이어 농부가 되라고 설득한다. 젤소미나를 붙잡아 보겠다고 어릴 때나 관심 있었을 낙타를 데려와 선물이랍시고 들이댄다. 아빠는 참 대책 없는 사람이다. 가난을 참다못한 엄마(알바 로르바케르)는 아빠와 헤어지겠다고 선언하지만 곧 접고야 만다. 가족을 건사할 능력이 부족한 탓이지, 사람 자체가 나쁘지 않다는 건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까. 하지만 젤소미나는 포기를 몰랐다. 전원의 가족에 선발되어 우승한다면 자금 문제도 해결될 거라며 처음으로 반항한다. 결국, 몰래 참가 접수한 젤소미나로 인해 가족은 본선 무대로 떠나게 된다.
▲ 영화 <더 원더스> 스틸컷 |
ⓒ M&M 인터내셔널 |
<더 원더스>는 토스카나의 시골 농가를 배경으로 한 가족의 일화를 조금씩 듣는 형식이다. <행복한 라짜로>로 알려진 알리체 로르바케르 감독의 두 번째 영화로 제67회 칸 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2014년 작품이다. 이후 <행복한 라짜로>와 <키메라>까지 더해 이탈리아 정체성 3부작으로 묶어 부르게 된다.
최근 한국에서 기획전이 열리며 10년 만에 개봉했다. 알리체 로르바케르 감독의 스타일에 벗어나지 않는 형식이다.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는 모호한 시기, 16mm 필름 카메라 특유의 거친 분위기, 노스탤지어의 향수를 중심으로 한다. 에트루리아(이탈리아 중부에 있던 고대 국가)인의 후예를 강조하는 신화적 정체성의 출발을 만나볼 기회다.
이탈리아는 삼면이 바다인 반도국인 대한민국과 여러모로 유사한 지점이 있다. 비슷한 자연환경을 가진 탓인지 민족성이 은근히 닮았다. 오랜 고대국가의 문화를 꽃피운 문명, 풍족한 먹거리와 사계절, 잦은 전쟁과 정치적 격변기, 독재자를 겪었던 점도 그렇다.
가부장적 가치관도 공통점이다. 젤소미나의 24시간을 관찰하면 옛 농부들이 자식을 여럿 낳아 일꾼으로 쓰던 게 생각난다. 첫딸은 살림 밑천이란 말이 있듯이 농사, 집안일, 육아까지 거들며 일인 다역을 해야 했던 낯설지 않은 풍경이 K-장녀와 오버랩된다.
▲ 영화 <더 원더스> 스틸컷 |
ⓒ M&M 인터내셔널 |
실제 토스카나의 양봉 농가 출신인 감독의 자전적 경험을 녹여 내 사실적이면서도 판타지적 세계관을 구축했다. 자신만의 방식을 이어가길 바라는 아빠와 새로운 세상에 눈뜬 딸은 세대 차이를 겪으며 투닥거린다. 몇 천년 전 소크라테스도 '요즘 애들은 버릇없다'는 말로 세대 차이를 말했던 것처럼 21세기에도 삶의 방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그저 반복되고 있다.
영화는 별다른 사건사고가 일어나지 않지만 경쟁에 지친 현대인에게 휴식을 준다. 정겨운 마을 사람들과 괴팍한 아빠, 순수한 소녀 등 알리체 로르바케르의 인장을 찾는 재미가 있다. 이탈리아의 옛 농가의 전원이 한 장의 엽서처럼 박제되어 있다. 천천히 흘러가는 목가적 풍경을 보는 내내 마음은 차분해진다.
그러면서도 사라져가는 것들의 아쉬움과 지켜야 할 가치를 빠짐 없이 논한다. 감독이 꾸준히 말하고자 하는 정체성이자, 현대인이 놓치고 있는 소중한 것들이다. 그게 무언인지는 영화를 본 후 각자의 방식으로 찾아가면 된다. 특히 마술과도 같았던 마지막 장면은 퍽퍽한 삶에서 영화가 왜 필요한지를 일깨우는 환상적인 여운으로 다가온다. 영화가 없는 인생은 길고 지루할 거라는 예상에 딱 맞아떨어지는 잊지 못할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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