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팀인데도 응원? 이 다큐에 K리그 팬들이 열광한 이유
[김성호 기자]
'20년 넘게 FC서울 팬입니다. LG의 연고 이전은 기업에 있어 필연이었고 적절한 판단이었습니다. K리그에 있어서도 너무나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붉은 안양을 응원했던 수많은 서포터. 안양과 함께 뛰었던 그들에겐 사과 한 번 없었다는 것이 마음이 아픕니다. 저에게 연고이전은 미안함이자 안타까움이자 민망함입니다. -정민, 기사 '"내 인생이 달라졌다" K리그2 선두질주 FC안양 이야기https://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3040607&PAGE_CD=SPVEW'에 달린 댓글 중에서
댓글이 기사의 이유가 됐다. <수카바티: 극락축구단>이 제12회 무주산골영화제에 초청된 것과 맞물려 두 감독을 인터뷰한 기사에서였다.
그저 지나칠 수 없는 댓글이었다. 서포터즈의 이야기가 영화가 되었다면, 축구팬들의 이야기가 빠져서는 안 될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주변을 수소문해 K리그의 오랜 팬들, 진정으로 축구와 팀, 서포터즈를 아끼고 이해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 영화의 가치를 더 깊이 이해하는 데 그들의 목소리가 분명한 역할을 해낼 것이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 수카바티: 극락축구단 포스터 |
ⓒ 영화연구소 |
한국 첫 서포터 다큐, 팬들의 목소리를 듣다
8월, K리그2에도 한국 프로축구 역사에 기록될 사건이 벌어졌다. 다큐멘터리 <수카바티>가 정식 개봉한 것이다. 조규성 등이 활약하며 승격 코앞까지 갔던 2019시즌이 주요하게 담겼단 점에서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지난해부터 여러 영화제를 돌며 호평을 받은 기세가 남아 있다.
<수카바티>는 특별한 작품이다. 구단과 축구선수가 중심이 아닌 축구 다큐란 점에서 그러하다. 서포터즈, FC안양의 서포터 'A.S.U. RED'가 주인공이다. 30년이 넘도록 K리그를 지켜봐온 한 사람의 축구팬이자 영화가 제작되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FC서울의 서포터로서 이 글을 써내지 않을 수는 없었다. K리그에 특별한 관심을 가진 이들을 수소문하여 얻은 답을 '씨네만세' 800화로 소개하는 이유다.
박영서씨는 FC서울과 청춘을 함께한 오랜 축구팬이다. 흔히 4대 리그라 불리던 유럽 프로축구 리그에 한국 선수가 단 한 명도 없던 시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프로축구를 즐겨왔다. FC서울이 창단하던 해부터 그를 응원해 온 전적은 특기할 만하다. 강원대학교에 입학해 터전을 춘천으로 옮기고 졸업 뒤엔 강릉시에서 첫 직장을 구해 일하면서도 주말이면 상암을 찾아 응원하길 빠뜨리지 않았다. 지금도 경기가 있는 날이면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들과 함께 N석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박씨에게 안양LG치타스는 역사 속에 등장하는 옛 팀에 지나지 않는다. FC서울 창단부터 서울을 응원해온 그에게 치타스가 제 팀이란 인식은 없는 것이다. 어느덧 연고이전 20년을 맞은 FC서울엔 그와 정서를 같이 하는 팬이 적잖을 게 분명하다.
박씨는 LG가 안양을 버리고 서울로 연고를 옮겨온 사건에 대하여 "연고주의가 안일했던 시기에 일어난 안타까운 사건"이라고 말했다. "프로축구 특유의 연고제도 정착이 겨우 자리를 잡아갈 무렵에 축구팬의 수준에도 못 미치는 행정을 보여준 구단과 연맹의 결정이 아쉽다"고 비판했다.
▲ 수카바티: 극락축구단 스틸컷 |
ⓒ 영화연구소 |
'악연' <수카바티> 제작 후원한 FC서울팬
연고 이전 뒤 FC서울과 FC안양은 앙숙과도 같은 관계가 되었다. 그러나 영화에 우호적인 FC서울 팬은 얼마든지 있다.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수카바티> 제작을 후원하기도 했던 조이예환도 그와 같은 사람이다. 그는 부천SK 팬으로 K리그에 처음 입문했던 시절을 회상한다. 그는 "부천SK가 집 근처 목동운동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했던 시기에 축구를 좋아하게 됐기 때문에 팬이 되었는데, 어느 순간 홈구장을 옮겨가더라"며 "나 역시 서울 사람임에도 응원하던 구단을 잃었던 적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팀이 옮겨간 뒤엔 성남일화를 응원하다 FC서울이 창단한 뒤 이 팀에 정을 붙였다. 조이씨는 "구단을 빼앗긴 데 별다른 감정을 갖기보다 '그냥 응원하는 팀이 좀 멀어졌구나'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안양 서포터즈는 연고의식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게 오히려 놀랍다"고 감탄했다.
조이예환은 안양 서포터즈에 대해 "아픈 시절을 겪으면서도 남기를 선택한 사람들이 서포팅을 이끌고 있고, 재창단 이후 새로운 에너지까지 더해지며 확실히 전체 리그에서도 특색 있고 인상적인 응원을 보여주는 서포터"라고 강조해 말했다.
▲ 수카바티: 극락축구단 스틸컷 |
ⓒ 영화연구소 |
낭만이 넘치고 진심이 흐르는 보랏빛 영화
영화 <수카바티>는 안양을 넘어 K리그 전체 팬들에게도 호감을 사고 있다. 대구FC의 오랜 팬인 조영빈씨도 그와 같다. 조씨는 "흔히 해외에 비해 K리그가 재미가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가 팀들 간에 스토리가 부족하단 것"이라며 "온전히 한 팀의 입장만을 담은 사사로운 스포츠 다큐멘터리가 반가울 수밖에 없는 이유"라고 분석했다. 대구 출신이지만 전주에서 영화 연출 등의 작업을 이어가고 있는 조씨는 "축구장을 찾는 관중이 팀을 응원하는 이유는 단순히 승패만이 아니라 팀의 이름 아래에서 축적해온 경험과 추억에 있다고 생각한다"며 "이런 다큐멘터리는 K리그의 강렬한 스토리와 드라마를 대외에 알릴뿐 아니라 더욱 견고하게 만들 수도 있다"고 기대했다.
전주 일대 문화예술을 나누는 모임 전북영화문화방에서도 활동하고 있는 조씨는 "이 영화로 FC안양의 팬들이 하나의 이름 아래 모여 응원을 하고 추억도 쌓을 수 있으면 좋겠다"며 "한 걸음 나아가 안양시의 시민들을 축구장으로 끌어들이고 FC안양이 성공적으로 지역 사회에 정착해 자생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전국 시민구단 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꼽히는 대구FC의 팬다운 발언이다.
기업구단에서 시민구단으로 거듭난 성남FC의 팬 박태하씨도 지지와 응원을 보냈다. 박씨는 <괜찮고 괜찮을 나의 K리그>란 책으로 굴곡진 역사를 지나온 성남 축구팬들에게 남다른 공감을 이끌어낸 작가이기도 하다. 축구라는 공통점 뿐 아니라 두 팀의 연고지가 경계를 맞대고 있는 이웃이란 점에서 <수카바티>가 남다르게 다가왔을 터다.
▲ 수카바티: 극락축구단 스틸컷 |
ⓒ 영화연구소 |
K리그 서포터가 이 영화를 응원하는 이유
박씨는 <수카바티>가 FC안양 서포터를 넘어 일반 팬, 나아가 K리그 전체 팬들에게 충분한 매력이 있다고 말했다. "아무리 티격태격하고 으르렁거릴지라도, 이 뜨겁고 애잔한 K리그 판에서 '우리'가 겪어온 감정의 파고들은 비슷비슷하다"는 그의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축구팬으로서 K리그를 사랑하고 서포터들을 존중하는 한 사람으로서 안양의 승격을 간절히 바랍니다. K리그1으로 올라와 서울과의 경기. 아워네이션(안양의 홈구장)에 울려 퍼질 폭도맹진가를 가슴 깊이 응원합니다. 반드시 보랏빛으로 상암을 물들여 새로운 스토리의 서막을 올려주길 바랍니다.'
축구의 세계를 관장하는 신이 있다면 이처럼 모여든 마음이 간절하여서라도 'FC안양'을 돌볼 것이 틀림없다. 처음에 그들은 행정가와 기업에 의해 팀을 빼앗긴 서포터에 불과했다. 팀이 없는 서포터라니, 춤추지 못하는 발레리나, 웃기지 못하는 코미디언, 팔이 없는 복서 같은 존재다. 아무것도 아니란 뜻이다.
▲ 수카바티: 극락축구단 선호빈 감독이 팀K리그와 토트넘 홋스퍼가 맞붙은 지난 7월 31일,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을 찾아 영화를 홍보하고 있다. |
ⓒ 선호빈 |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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