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에 검은 먹물 덮었던 독립지사, 멀끔히 돌아온 사연

김경준 2024. 8. 4.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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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그레·국가보훈부, '처음 입는 광복' 캠페인 공개

[김경준 기자]

서대문형무소의 감방 문이 열린다. 수의(囚衣) 대신 빛 고운 한복을 입은 이들이 걸어 나온다. 강석대, 고수복, 신채호, 이원록(이육사). 모두 일제강점기 당시 순국한 독립운동가들이다.
 
 AI로 복원된 강석대(1857~1920) 지사. 빙그레와 국가보훈부가 기획한 '처음 입는 광복' 캠페인 영상의 일부다.
ⓒ 빙그레
 
지난 1일, 빙그레가 공개한 '처음 입는 광복' 캠페인 영상의 한 장면이다. '처음 입는 광복'은 일제강점기 수의를 입고 옥중 순국한 독립운동가들에게 AI기술을 활용해 한복을 입혀드리는 캠페인으로, 빙그레와 국가보훈부 합작 프로젝트로 기획됐다.
국가보훈부의 설명에 따르면 이번 캠페인은 제79주년 광복절을 맞아 기획된 것으로, 대상자는 옥중 순국(혹은 출옥 후 옥고로 인한 순국)한 독립운동가 중 일제 감시대상 인물카드 등에 수의를 입은 사진으로 기록된 87명이다. 이중에는 안중근, 안창호, 강우규, 유관순, 신채호 등 우리에게 잘 알려진 독립운동가들도 포함돼 있다.
 
 빙그레가 AI 기술로 복원한 독립운동가 87인의 모습
ⓒ 빙그레
 
유튜브에 영상이 공개되자 폭발적인 조회수(4일 오전 10시 기준 조회수 73만)와 함께 누리꾼들의 칭찬 댓글이 쏟아지고 있다.

"눈물이 나네요. 독립운동가 분들의 희생 덕분에 저희가 살아있습니다.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잠시 어려운 때가 있어도 부끄럽지 않게 살겠습니다."

"저 광복이라는 옷, 독립운동가 분들이 살아계셨다면 꼭 입혀드리고 싶은, 100년이 넘어 전해진 독립이자 대한민국이 전하고자 하는 감사한 마음의 상징이네요"

"광고라서 스킵하려고 했다가 홀린듯 끝까지 봤네요."

광복, 옷에 담긴 의미는

빙그레 측은 광복절의 '복(復)'이 옷을 의미하는 '복(服)'과 동일한 발음이라는 데서 착안하여 독립운동가들에게 입힌 한복을 '광복'이라 이름 붙였다.

한복에 담긴 의미도 남다르다. 독립운동가들이 입은 한복을 디자인한 김혜순 디자이너는 "어른들이 살아계셔서 광복을 맞이했다면 어떤 옷을 입었을까 많은 고민을 했다"며 "그분들의 마음을 담아 아주 귀한 옷감으로 최고의 옷을 지어드리고 싶었다"고 밝혔다.

실제로 소목빛(나라를 위한 희생정신), 쪽빛(어려운 환경 속 피어났던 절개), 치자빛(독립을 위한 간절한 희망) 등 한복의 색에 각각의 의미를 담아냈다.
 
 김혜순 디자이너가 독립운동가들이 입을 한복을 소개하는 모습
ⓒ 빙그레
 
복원 전후 얼굴이 다른 까닭

빙그레 측은 단순히 과거 사진을 있는 그대로 복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역사적 사실을 고려하여 독립운동가들의 '온전한 얼굴'을 되살리고자 했다.

조용하(1882-1937) 지사가 대표적이다. 조용하 지사는 대한제국의 주독·주불 공사관 참사관을 역임하고 귀국하여 이천군수를 지내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베이징으로 망명하여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32년 10월 일경에 체포됐고, 1933년 4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월형을 선고 받았다.

일제 감시대상 인물카드상의 사진을 보면 조용하 지사의 얼굴에는 검은 점이 가득하다. 그런데 이번에 복원된 사진 속 지사의 얼굴은 깨끗하다. 이는 당시 사진 속 지사의 얼굴을 덮은 것이 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조용하 지사는 일제 법정에 서게 되자 "대한사람으로 왜인 판사 앞에 서는 것이 하늘에 부끄럽다"며 스스로 먹물을 얼굴에 칠한 것으로 알려졌다. 빙그레는 이러한 점까지 감안하여 선생의 얼굴을 뒤덮은 먹물을 지워냈다.
 
 복원 전후 조용하(1882-1937) 지사의 모습.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 기록된 사진(왼쪽)에는 검은 먹물이 덮여있지만, 복원한 사진(오른쪽)에서는 먹물을 지워내고 온전한 지사의 얼굴로 되살려냈다.
ⓒ 빙그레
 
<절정>, <광야>, <청포도> 등의 시로 유명한 이원록(이육사) 지사의 경우 본인의 시인 <청포도> 속 구절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라는 구절을 살려, 일부러 '쪽빛 한복'을 입은 모습으로 복원했다고 한다.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도 예외 없이

이번 캠페인을 통해 소개된 이들 중에는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도 대거 포함돼 있다.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등을 역임하며 6.10 만세운동을 기획했던 권오설(1897-1930), 사회주의 단체인 '경성 트로이카'를 조직한 이재유(1905-1944) 등이 대표적이다.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등을 역임하며 6.10 만세운동을 기획했던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권오설(1897-1930)의 복원 전후 사진.
ⓒ 빙그레
 
이들 모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았기에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디 현실이 그런가. 윤석열 정권 출범 후 시작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폄훼를, 우리는 분명히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

작년 7월 국가보훈부 출범 직후 박민식 초대 국가보훈부 장관은 뜬금없이 "가짜 독립유공자는 용납할 수 없다"며 기존에 서훈된 독립유공자들의 공적을 재검증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특히 박 장관은 "공산주의 혁명에 혈안이었거나 기여한 사람을 독립유공자로 받아들일 대한민국 국민이 누가 있겠느냐"며 일제강점기 당시 사회주의 운동을 한 독립운동가들조차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뉘앙스로 발언하기도 했다. 또다시 이념의 잣대로 독립운동의 기준을 평가하겠다는 구태적 발상이었다.

작년 여름 불거진 육군사관학교의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시도야말로 윤석열발 역사전쟁의 본격적인 신호탄이었다. 당시 신원식 국방부 장관은 "볼셰비키 홍범도의 흉상을 육사에 설치하는 것은 육사의 정체성과는 맞지 않는다고 본다"며 육사 측의 철거 계획을 두둔하는 망언을 내뱉기도 했다.

'독립운동가를 독립운동가로 부르지 못하는' 웃픈 현실 탓에,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에 대해서도 재조명한 이번 빙그레와 국가보훈부의 캠페인이 더욱 의미 있게 느껴진다.

빙그레가 '독립운동 캠페인'을 하는 이유

사실 빙그레의 '독립운동 캠페인'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작년 8월에는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퇴학·정학 등 부당한 징계를 당해 학업을 포기해야 했던 학생 독립운동가들을 위한 '세상에서 가장 늦은 졸업식'이라는 캠페인을 선보였다.

복원 가능한 사진 자료가 있는 94명 사진을 바탕으로 학창시절 모습을 AI로 복원하여 졸업앨범을 만든 것이다. 또 후손들을 초대하여 특별한 졸업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빙그레는 독립유공자 후손을 위한 장학사업도 하고 있다.

독립운동가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헌신에 보답하기 위한 빙그레의 행보에는 다 이유가 있다. 빙그레 김호연 회장이 바로 백범 김구 가문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김호연 회장은 김구 선생의 손녀인 김미 백범김구기념관장의 남편이다.

김 회장은 1993년 사재를 출연해 비영리법인 '김구재단'을 세웠다. 김구 선생 서거 60주년이던 2009년에는 미국 브라운대학교에 '김구도서관'을 설립하기도 했다.

김 회장 부부는 그동안 생사를 몰랐던 안미생 지사(김구의 맏며느리이자 안중근 의사의 조카)의 혈육을 찾아 안미생 지사에게 수여된 건국포장을 전달하는 등 정부도 하지 못한 일을 해냈다. 빙그레의 행보에서 진심이 느껴지는 까닭이다.

다음에 또 무엇이 찾아올까

'처음 입는 광복' 캠페인은 옥외 광고, SNS 콘텐츠, TV 광고, 지면 광고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소개될 예정이다.

특히 홈페이지(처음입는광복.com)에서는 AI 기술로 복원된 독립운동가 87인의 사진을 감상할 수 있다. 시민들이 직접 독립운동가들에게 감사의 메시지를 남길 수 있는 게시판도 마련돼 있다.

매년 신선하고 파격적인 방법으로 우리 독립운동가들을 기억하기 위한 캠페인을 선보이는 빙그레의 행보를 응원한다. 또 어떤 캠페인으로 독립운동가들과의 뜨거운 만남을 주선할지, 벌써부터 내년 광복절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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