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따라 아버지의 학력은 계속 바뀌었다

정호갑 2024. 8. 4.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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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이네 시골살이 21] 콤플렉스였던 아버지가 존경의 대상으로 바뀐 사건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정호갑 기자]

여름, 장마가 끝나니 곧바로 무더위가 이어진다. 비와 무더위로 정원과 텃밭으로 나가는 시간이 많이 줄어 들었다. 아침 두세 시간 정도, 정원과 텃밭에 나가 잡초 뽑고, 비바람에 넘어진 꽃들과 채소들을 지지대에 묶어 주고, 시든 꽃은 잘라낸다. 이 일도 조금만 하고 나면 예전과 다르게 몸이 많이 지친다. 2년 만에 체력이 바닥난 것일까? '쉬엄쉬엄 하자. 이제 그럴 나이도 되지 않았나?' 스스로 되뇐다.

힘겨워 일을 마무리하고 현관으로 들어서려는데 채송화가 눈에 들어온다. 내가 채송화, 봉선화를 정원 곳곳에 심은 것은 어릴 때의 추억이다. 채송화를 보면 마음이 밝아지며 기분이 좋아진다. 이 조그만 꽃들이 한여름에 티 없이 환한 모습으로 피어난 것이 예쁘고, 대견하고, 고맙다. 여름 정원에서 톡톡히 자기 역할을 하고 있다.
 
▲ 채송화 현관 입구 정원에 있는 채송화
ⓒ 정호갑
   
초등학교 다닐 때 음악 시간에 홍난파의 '봉선화'를 많이 불렀다. '울 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로 시작되는 가사는 어린 마음에도 내 모습처럼 여겨질 때가 많았다. 봉선화의 하얀, 분홍, 빨간색에서 소박한 아름다움을 느낀다. 그리고 봉선화의 생명력은 놀랍다. 옮겨 심어도 잘 죽지 않고, 줄기가 연약함에도 비바람을 잘 버틴다. 비바람에 쓰러져 있을 때 바로 세워주기만 하면 곧바로 회복한다.
콤플렉스였던 아버지의 학력
 
▲ 봉선화 집 정원 곳곳에 봉선화가 있다
ⓒ 정호갑
   
내가 어릴 때 우리집은 먹고 살기 조차 힘든데도 흙담 아래에는 채송화, 봉선화 등이 피어 있었다. 그렇게 힘든 삶을 살면서 이 꽃들을 어떻게 심고 가꾸었을까? 이 꽃들을 보면서 아버지,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흙담 아래 작은 화단을 만들고 우물을 길러 물을 주시던 아버지의 모습. 한여름 마당에 우물물을 뿌리면서 바라본 채송화, 봉선화에서 아버지는 힘든 삶의 위로를 받았을까? 초가집 곳곳에 아버지는 꽃과 나무를 심고 가꾸었다.

유전자의 힘일까? 퇴임을 앞두고 나도 꽃과 나무를 심고 가꾸는 시골살이 삶을 택했다. 아버지보다 더 큰 정원에서 더 많은 꽃과 나무를 심고 가꾸고 있다. 그러면서 내 삶의 행복을 찾아간다. 그런데 아버지의 유전자 가운데 체력은 나에게 유전되지 않은 것 같다.

막일을 하시던 아버지가 일이 없는 날 미루어 두었던 집일과 마당을 정리하신다. 야간 경비원으로 직업을 바꾸고 난 뒤에는 아침에 퇴근하고 와서 바로 주무시는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늘 일을 찾아 몸을 움직였다.

아버지에게 '피곤하다', '힘들다', '지친다'는 말을 돌아가실 때까지 한 번도 듣지 못했다. 아버지는 정말 강철 체력의 소유자일까? 지금 생각해 보면 힘들고, 피곤하고, 지치면 살 수가 없었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아버지의 삶은 힘들고 지쳐도 피곤하면 안 되는 삶이었다.

아버지는 6남매 가운데 둘째이다. 그런데 첫째 역할을 했다. 할아버지는 말 그대로 한량이셨다. 집일은 관심 밖이고 유람과 음주를 즐겼다.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학교에 가지 않고 밭일과 집일을 도와야 했다.

아버지는 1929년 가을에 태어나셨다. 아버지가 10살쯤 되었을 무렵 어느날, 학교에 가고 싶어 학교에 갔다. 갔다 오니 할아버지로부터 엄청나게 맞았다. 아버지가 학교에 가면 집일 도울 사람이 없다는 것이 그렇게 때린 이유이다. 장남은 학교에 가야 하고, 동생들은 나이가 어리니 집일을 도울 수 없기 때문이다.

너무 심하게 때려 곁에 있던 할머니가 이러면 아이가 크게 다치겠다 싶어 아버지에게 도망가라고 하였지만, 아버지는 꼼짝하지 않고 선 채로 버티며 고스란히 맞았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부터 학교에 대해 생각은 싹 지웠다고 한다. 이 말을 아버지에게 직접 들었을 때, 아버지의 서러움과 한이 뼛속까지 그대로 밀려와 하늘을 우두커니 바라만 보았다.

이 이야기를 들은 것은 내가 마흔이 넘어서이다. 그래서 아버지의 학력은 무학이다. 아버지의 무학이 학창 시절 내내 나를 괴롭혔다.

학교에서는 학년 초마다 가정환경조사서를 작성한다. 나는 그것이 엄청 싫었다. 그때마다 거짓말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12년 동안 학교에 다니면서 아버지의 학력을 무학으로 표시한 적은 단 한 차례도 없다.

아버지 학력은 내가 초등학교 때 다닐 때는 초등학교, 중학교 다닐 때는 중학교, 고등학교 다닐 때는 고등학교 졸업이었다. 나의 이런 감정을 눈치채시고 어머니는 부모의 학력은 자식의 학력을 따라간다며 나의 감정을 어루만져 주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아버지 직업 또한 나에게는 열등감이었다. 무학인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아버지는 젊어서는 막일을 하시다가 마흔이 넘어서 중소기업의 야간 경비원이 되어 정년을 마쳤다. 이 또한 가정환경조사서에 정확하게 표시한 적이 없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아버지의 직업은 한결같이 회사원으로 표시하였다.

대학 입학식 사건

아버지의 학력과 직업이 학생인 나에게 콤플렉스였다. 아버지 학력이 고졸 이상인, 아버지 직업이 회사원인, 은행원인, 공무원인 친구가 너무 부러웠다. 이런 콤플렉스 대상인 아버지가 나에게 존경의 대상으로 바뀌는 계기가 있었다.

우리집은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두 아들을 모두 실업계 고등학교에 보냈다. 두 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업하였으면 우리집은 쪼들린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두 아들 모두 대학에 가겠다고 하였다. 그때 단 한 마디의 토도 달지 않고 묵묵히 들어 주셨다. 깊숙한 곳에 자리한 아버지의 한을 아들에게는 대물려주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여기서 끝났으면 좋았는데,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하지 않고 곧바로 대학원으로 진학하겠다고 하였다. 그때도 아버지는 나에게 단 한 마디의 불평도 원망도 하지 않았다. 그때 아버지의 어깨를 짓누르며 조여오는 중압감은 어떠했을까? 아버지는 그 무게를 어떻게 감당하려고 허락하였을까? 아버지가 짊어진 무게를 그때 나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못난 아들이었다.

내가 대학에 입학하던 날이었다. 아버지는 입학식날 이모, 고모를 다 불러 내 입학식에 참석하겠다고 한다. 아들의 대학 입학이 자랑스러웠는가 보다. 그런데 입학식 도중 나는 친구와 잠시 빠져나와 대학 캠퍼스의 봄을 즐기며 친구와 사진을 찍다가 입학식이 끝날 때쯤 돌아왔다.

아버지가 나를 불렀다. '너는 왜 입학식에 제대로 참석하지 않나?' 그때 나는 대학의 자유에 대해 아버지에게 가르치듯 말했다. '대학은 고등학교와 달리 행사는 참석하고 싶은 사람만 참석하고, 그렇지 않으면 굳이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내 말이 끝나자, 아버지가 대뜸 말하셨다.

"저기 있는 사람은 다 너보다 못한 바보라는 말이지."

나는 그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콤플렉스 대상인 아버지가 존경의 대상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아버지의 인품을 처음으로 느꼈다. 그 후로 나는 아버지의 말씀을 잘 따랐다. 그러니 아버지의 인품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였고, 그 인품을 지인들에게 자랑하기도 하였다. 아버지에게 나의 이런 감정도 가끔 말씀드리곤 했다.
  
▲ 아버지와 어머니 아버지 생신날 가족 외식을 마치고 부산 기장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서
ⓒ 정호갑
 
아버지가 나에게 남긴 유전자는 꽃의 소박한 아름다움도, 체력도 아닌 이 말씀이다. 이 말씀은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어떤 사람을 곁에 두어야 할지를 가르쳐 주는 지침서가 되었다.

이후 지위, 권력, 돈의 유무로 사람을 바라보지 않았다. 나 또한 지위, 권력, 돈을 쫓아가는 삶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말없이 자기 할 일을 하는 사람을 인정하고, 그 사람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냈다.

말없이 할 일을 하는 사람

이런 일도 있었다. 아버지 댁을 방문한 어느날, 대문 밖에 나와 있는데 마을 어르신이 지나가다 나를 보고 말씀하신다. 아버지가 리어카를 끌고 폐휴지를 줍고 다니신다고 한다. 동네 부끄러우니 그만두라고 말씀드리란다.

나는 그때 아버지가 폐휴지를 줍는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내가 집에 갈 때마다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길에 쌓아둔 폐휴지를 고물상에 가져다주고 깨끗하게 하여 놓았고, 리어카도 다른 곳에 두었다는 사실도 뒤에 알았다. 정년퇴직을 하시고 난 뒤 아버지는 중고 리어카를 구입하여 폐휴지를 나 모르게 주웠다.

나는 오히려 아버지의 건강이, 부지런함이 자랑스러웠다. 아버지께도 이 말씀을 드리면서 건강을 살펴 가시면서 일을 하시라고 당부드렸다. 그 뒤부터 아버지는 내가 집에 오는 날 골목길에 쌓아둔 폐휴지를, 리어카를 굳이 숨기지 않으셨다.

자기 자리에서 말없이 할 일을 하는 사람에게 따뜻함을 느낀다. 그 사람들의 곁으로 가고 싶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기분이 좋다. 세상이 아름답게 다가온다. 이 또한 시골살이하면서 이웃들에게서 느낀다. 시골살이 참 잘 선택하였다.

'저기 있는 사람은 다 너보다 못한 바보란 말이지'.

이 말씀은 내 가슴 깊숙한 곳에 자리 잡아 나를 이끌고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0년이 넘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돌아가셨다는 실감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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