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무대에 거저 올라온 팀은 하나도 없다

김예지 2024. 8. 3.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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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말 루틴은 전국노래자랑을 보는 것... 그러다 꿈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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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지 기자]

우리집 주말 루틴 중 하나는 '전국노래자랑'이다. 어릴 때는 부모님이 꼬박꼬박 챙겨보시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던 프로그램. 노래 실력이 가수에 버금가는 출연자는 손에 꼽힐 정도로 드물었고, 나머지 출연자들이 부족한 노래 실력 대신 앞세우는 춤과 개그도 대체로 어설퍼 보였다. 

부모님과 함께 보던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전국노래자랑은 한결같다. '프로'가 아닌 '아마추어'의 무대라는 점에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바로 그 점이 내가 전국노래자랑을 좋아하는 이유다.

전국노래자랑은 매주 전국을 돈다. '전국지역자랑'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만큼 지역에 따라 방송 분위기와 내용이 달라진다. 직전 방송편은 부산진구였다. 부산진구 인구가 36만 명. 내가 사는 진주는 34만 명. 우리 옆 동네 통영은 12만 명, 거창은 6만 명, 의령은 2만 명이다. 행정구역 단위로 쪼개도 웬만한 중소도시보다 인구가 많으니 그만큼 예선 경쟁률도 높았을 테고, 그래선지 대도시 방송에서는 가수 뺨치는 실력자도 꽤 자주 등장한다.

반면 보는 재미로 치면 작은 지방이 더 크다. 능글맞은 출연자들이 지역 특산물을 가져와 진행자에게 맛보이고 악단장을 공연히 불러내 먹게 한다. 악단장의 얼떨떨한 표정으로 봐서는 즉흥적인 이벤트가 분명해 보인다. 얼마 전 새 진행자가 된 남희석은 악단장으로도 부족한지 악기 연주자들도 한 명씩 불러내고 있다. 불려 나온 사람들은 뜻밖의 이벤트에 당황스러워하면서도 내심 싫지는 않은 반응들이다.
 
 전남 화순군 편에 출연한 1922년 출생 강예덕 할머니. (KBS화면갈무리)
ⓒ KBS
이미 수백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무대에 선 출연자들. 거저 올라온 팀은 하나도 없다. 노래를 잘하거나 재미있거나 귀엽거나 아니면 셋 다 이거나. 그중 '귀여움'은 주로 아이들 몫이다. 

전국노래자랑에는 아이들이 꽤 자주 나온다. 故 송해 선생님은 아이들이 출연할 때마다 등을 떠밀었다. 악단장에게 가서 용돈을 받아오라는 뜻이다. 신재동 악단장은 어린이 출연자들이 나오는 날이면 잔돈을 바꿔 미리 준비했다고 한다.

다른 가요프로그램이 소비자의 입맛에 맞춰 잘 가공된 음식이라면, 전국노래자랑은 자연 그대로의 원물 같다. 평소에는 끼를 숨기고 살던 정육점 사장님, 소방대원, 시골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 고무줄 바지를 입고 무대를 휘어잡는다.

명색이 '노래자랑'인데 시상이 꼭 노래실력에 비례하지는 않는다. 그날의 최연소 출연자에게는 가산점이 붙는 걸로 보이고, 특이한 장기에도 어느 정도 가산점이 있는 것 같다.

여러 번 '땡'을 받고 다시 기회를 얻어 부른 도전곡으로 인기상을 꿰차는 경우도 있다. 노래 실력이 순위권인 출연자 입장에서는 억울할 만도 한데 개의치 않고 함께 웃으며 최우수상 수상자의 노래를 따라 부른다. 노래자랑이지만 노래자랑만은 아니다. 1시간에 15팀. 한 팀당 5분도 채 주어지지 않은 그 짧은 무대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이 보인다.

작년 군산편에 노란 원피스를 입고 등장해 격렬한 댄스와 넘치는 '끼'로 화제를 몰았던 출연자는 당시 주부로 소개되었는데, 알고 보니 그녀에게는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배우로 활동한 과거가 있었다. 결혼 후 10여 년간 경력이 단절되었다가 용기 내어 무대 위에 다시 오른 그녀를 보면서 나는 마음이 좀 울컥했다.

지난 6월 2일에는 만 102세 강예덕 어르신께서 출연하셨다. 고운 옷을 차려입은 어르신은 연세가 무색하게 말씀도 잘하시고 귀도 밝으셨다. 틀린 가사 없이 노래 부르시는 모습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면서 또 한 번 울컥했다. 어르신이 앞으로도 오래, 또 건강하게 사시기를 바라며 동시에 내게도 새로운 꿈이 생겼다. 60년 후 전국노래자랑 출연! 두둥!  
 
 전남 화순군 편에 출연한 1922년 출생 강예덕 할머니. '죽기 전에 한번 나왔습니다'하며 웃으신다. (화면갈무리)
ⓒ kbs
꿈을 이루려면 목 관리는 필수. 가사를 외우기 위해 기억력도 잘 관리해야겠다. 노래 실력으로는 예선 통과도 어려울 것 같으니 춤이라도 곁들이려면 관절 건강에도 신경 써야지. 나도 나지만 전국노래자랑이 60년 후에도 살아있어야 하는데. 남희석님 잘 부탁해요.

덧붙이는 글 | 기자의 브런치에도 함께 게재됩니다. https://brunch.co.kr/@nost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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