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완벽한 순간은 혼자 있을 때 찾아온다” [유경희의 ‘연금술의 미술관’]

2024. 8. 3. 08:03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은둔형 화가들’의 소통법
➊ 사물을 배치하기 위해 골몰한 모란디, 1953년.
요즘 자주 ‘예술이 드러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보곤 한다. 아니 어쩌면 평생의 화두일지도.

며칠 사이 무심코 지나칠 수 없는, 마치 현현(epiphany)과도 같은 세 개의 만남이 있었다. 이는 일상과 예술이 명상이 된 모멘텀과 관련이 있다.

먼저 뉴저먼 시네마 거장인 빔 벤더스의 최근 영화 ‘퍼펙트 데이즈’를 본 일, 강릉 솔올미술관에 열리고 있는 미국 추상표현주의 화가 아그네스 마틴의 전시를 관람한 일, 그리고 미술사 아카데미에서 조르조 모란디의 작품을 다룬 일이 그것이다. 일면식도 없는 이 세 존재들은 어쩌면 모종의 각별한 관계 속에 놓여 있지 않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까 서로의 도플갱어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 나

는 이런 연상에 담담한 쾌재를 부르며, 내심 다시 아름다움의 근원에 대해 질문하면서, 예술과 삶이 드러내는 방식에 대해 생각해본다.

먼저 조르조 모란디(1890~1964년)의 은밀한 생과 예술로 들어가보자.

사실 근현대 화가치고 모란디만큼 사생활이 감춰져 있는 화가는 없을 듯싶다. 그가 그저 볼로냐 태생으로 5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고, 볼로냐미술 아카데미에서 수학했으며, 평생 독신으로 누이 세 명과 함께 수도사 같은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살았다는 것, 그리고 볼로냐를 떠난 적이 거의 없으며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는 정도다. 수도자의 삶처럼 아틀리에라는 독방에 유폐돼 작업에만 전념하는 삶,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등진 삶이었다. 모란디의 침대 머리맡에 놓여 있는 두 권의 책이 그의 절제된 삶을 축약적으로 보여준다. 파스칼(프랑스 수학자이자 철학자)과 레오파르디(단테 다음으로 영향력 있는 이탈리아 낭만주의 시인). 그는 39세로 요절한 은둔자였던 두 사람의 책을 모서리가 닳도록 평생을 걸쳐 읽고 또 읽었다.

모란디는 흔하디 흔한 정물화를 그린 화가다. 그런데 그의 정물화는 좀 묘연하며 볼수록 매혹된다. 왜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까?

먼저 그려지는 대상에 천착해보자. 모란디는 벼룩시장에서 다양한 모양의 병과 용기를 주의 깊게 골라온다. 그리고는 표면에 붙어 있는 상표를 떼고 페인트를 칠해 고유의 개성을 최대한 가린다. 이 물건들은 먼지가 쌓여 원래의 질감이 점점 사라지고 엇비슷해 보일 때까지 선반 위에 방치된다. 이로써 먼지가 쌓인 모든 사물은 오랫동안 그곳에 머물고 있었다는 듯이 색채와 질감이 균일해진다. 진정 모란디는 정물화에 등장하는 물건들 위에 먼지가 가볍게 겹겹이 쌓이게 놔두길 좋아했다. 사물에 쌓인 먼지는 모란디 그림의 부차적인 요소가 아니라, 채색과 분위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모란디의 그림 속에서 사물들은 드러나는 동시에 숨는 것처럼 보이며, 색채들은 빛바래고 희미해져 애매하고 모호하지만,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존재감은 강력하게 느껴진다.

1930~1950년에는 볼로냐 미술 아카데미 교수를 지냈고, 1948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대상까지 수상했던 모란디였지만, 작업실은 그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 작고 순박하고 적막했다. 그런 작업실에서 인공조명을 사용하지 않고, 단 하나 있는 창문을 여닫아가며, 사물들 위로 비치는 빛을 관찰했다. 때로 조도를 커튼으로 조절하면서 사물들이 눈앞에서 서로 포개지도록 조심스럽게 배치했다. 언제나 거의 동일한 사물을 사용했지만 그것들은 모두 세밀한 차이를 갖고 상이하게 묘사된다. 즉 모란디의 예술 작업은 사물의 본질을 찾아 나아가기 위한 ‘변주’였다. 그림에서 보이는 집중적이고 고요한 분위기는 사물 자체의 본질에 관한 명상인 셈이다.

어떤 비평가는 “마치 체스판 전체의 수를 읽으면서도 자신 앞에 놓인 하나의 수를 어떻게 둘지 곰곰이 생각하는 명인”에 비유했다.

조르조 모란디, 정물화, 1946년. 조르조 모란디, 정물화, 1961년. 조르조 모란디, 정물화, 1964년.
스스로 세상과 분리한 아그네스

만년을 향해 갈수록 모란디 작품에는 아주 소소하지만 귀중한 양상이 드러난다. 그가 세상 사람을 멀리하면 할수록 그림 속 사물들은 더욱 밀착돼 경계가 허물어진 듯 겹쳐지고 있다는 것. 색채 또한 점점 더 흐려져 소멸하는 듯 색채와 색채 사이의 경계가 없어진다. 어쩌면 카프카처럼 모란디는 내면의 자아를 지키는 자신의 능력이 타인과의 친밀함 때문에 위협받는다고 느꼈던 것 같다. 그렇지만 그는 사물들의 겹침을 통해, 자신이 선택한 고독 속에서 타자와 소통하고자 하는 열망이 얼마나 본질적인 것이었는지를 보여준다. 여기 모란디와 마찬가지로 평생 독신으로 세상과 등진 채 그림을 그렸던 또 한 명의 화가가 있다. 모란디 회화의 추상적 버전이라 할 만한 여성 화가 아그네스 마틴(1912~2004년)이다.

캐나다 서스캐처원주의 외딴 농장에서 태어난 그녀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고, 가학적일 만큼 엄격한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아마도 싫든 좋든 어머니의 강박적인 성격은 그대로 딸에게 내면화됐을 터. 아그네스는 30세가 다 돼서야 뉴욕에서 본격적으로 미술을 공부하면서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교사가 되기 위해 수련도 하고, 돈벌이가 되는 갖가지 일을 하다 마침내 시작한 미술이지만, 자신의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한 작품은 가차 없이 파괴하기도 했다. 그런 까닭에 초기 작품 중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을 정도다. 40대 중반에 화상인 베티 파슨스를 만나 로워 맨해튼에 정착한 그녀는 마크 로스코와 바넷 뉴먼 같은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의 영향을 받는다. 그런 연유로 미니멀리즘의 차가운 추상이 아닌 따뜻한 기하학적 추상 작품을 선보임으로써 자신만의 독창적 세계를 열게 된다. 아주 희미하고 옅게 채색한 화면에 반복되는 격자무늬의 미묘한 변주가 돋보이는 작품이 탄생한 것. 아주 투명하고 참을성 있게, 더듬거리지 않고 분명하게, 평온에 다다른 선들의 향연을 보여주는 작품 말이다.

“가장 완벽한 순간은 혼자 있을 때 찾아온다”고 말하며, 예술은 오롯이 영감에서 비롯된다고 믿었던 아그네스는 완전한 몰입을 위해 스스로를 세상과 분리시켰다. 1967년 뉴멕시코로 이주한 후 외딴집에 자신을 철저하게 고립시켰다. 60대 이후 아그네스는 고독과 충만을 경이롭게 일치시키며 직관적이고 명상적인 인생 최고 회화 작품을 탄생시킨다. 그리고 92세 나이로 뉴멕시코 타오스에서 가까운 사람들에 둘러싸인 채 세상을 떠난다.

출세주의와 노출증 예술가들이 득세하는 세상에 이런 은둔형 작가의 존재는 그 자체로 삶과 사유의 여백으로 다가온다. 그 여백은 아름다운 포옹처럼 든든하다. 미학 용어에는 ‘알레테이아(aletheia)’라는 말이 있다. ‘망각(lethe)’에서 ‘벗어난다(a)’는 뜻이다. 직역하면 탈은폐 혹은 비은폐지만, ‘진리’를 뜻한다. 그런 까닭에 ‘알레테이아’라는 용어는 내게 ‘진리가 드러나는 방법’으로 의역된다. 진리는 노출이 아니라, 감춰지고 숨겨져 있던 것이 넌지시 은밀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아주 모호하고 신비롭게!

이와 더불어 예술이 드러나는 방식이 하이데거가 말한 것처럼 한때 그리스인에게 열렸던 근원적인 존재의 체험을 상기하는 것으로써의 ‘알레테이아’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다. 바로 내게 조르조 모란디와 아그네스 마틴 그리고 빔 벤더스의 ‘퍼펙트 데이즈’가 그렇다. 코모레비(こもれび),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 같은 존재들이여!

[유경희 유경희예술처방연구소 대표]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70호 (2024.07.31~2024.08.06일자) 기사입니다]

Copyright © 매경이코노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