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일도 우리의 발길 막을 수 없어”

최민우 2024. 8. 3.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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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 구호 요원 줄리아 수로바
“전쟁 3년째 난민 수백만명 위험… 아이들은 트라우마 심각”
국제구호개발 NGO 희망친구 기아대책의 우크라이나 현지 법인 대표인 줄리아 수로바가 지난달 25일 서울 강서구 기아대책 본부에서 국민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이한형 기자


“미사일이 쏟아져 내리는 가운데 156개 난민 가정이 구호품을 받기 위해 도시 외곽에서 키이우 오볼론으로 모이기 시작했어요. 미사일이 계속 날아왔지만 행사를 멈출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키이우 도심의 오흐마트디트 어린이병원이 폭격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나를 비롯해 행사장에 있던 모두가 눈물을 흘렸어요.”

줄리아 수로바(22)씨는 지난달 25일 서울 강서구에 있는 국제구호개발 NGO 희망친구 기아대책 본부에서 국민일보와 인터뷰하며 지난달 8일 러시아군의 대규모 공습에 대해 언급했다. 당시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여러 도시를 향해 미사일을 발사해 수십명의 인명 피해를 냈고, 특히 어린이병원을 공격한 일로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았다. 수로바는 “폭격이 4시간 넘게 이어졌다”며 “폭발음이 계속 났지만 난민들에게 구호품을 하나라도 더 전달해야 해 자리를 피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지난달 8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오볼론 구청에서 줄리아 수로바(맨 오른쪽)가 구호품 전달 행사를 마치고 난민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날 러시아군은 키이우를 비롯한 우크라이나 여러 도시를 향해 미사일 수십 발을 발사했다. 기아대책 제공


기아대책 우크라이나 현지 법인 대표인 수로바는 1년 넘게 자국 난민들을 대상으로 구호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는 키이우 국립외국어대 한국어학과를 수료해 한국어가 유창했다. 그는 대학 1학년 때 기아대책 소속 유성옥 선교사와 사제 관계로 만나 인연을 맺었다.

4학년 때인 2022년 2월 전쟁이 터졌다. 당시 우크라이나 주재 한국대사관 채용시험을 준비 중이던 수로바는 어머니·남동생과 함께 폴란드로 피란을 갔다가 그해 9월 키이우로 돌아왔다. 그리고 구호 활동에 뛰어들었다. 기아대책의 구호품을 트럭에 싣고 폴란드 난민보호소와 우크라이나 각지에 전달했다. 그는 구호 활동을 “조국을 지키는 싸움”이라고 표현했다.

수로바는 구호 활동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의 아픈 사연 때문에 그들을 떠올리는 것을 힘들어했다. 보르디안카 지역의 한 가족 이야기를 어렵게 꺼냈다. 폭격으로 집이 무너져 일가족 6명이 지하 창고에 숨어 지냈는데, 감자로 끼니를 때우며 두 달 넘게 버텼다고 한다. 수로바는 “창고 바닥이 너무 차가워서 감자를 두껍게 잘라 바닥에 깔고 지냈다고 한다”며 “가족 중 할머니는 당뇨를 앓고 있었는데 약을 구하지 못해 손발이 퉁퉁 부어 있었다”고 전했다. 이 지역 주민들은 러시아군에게 옷과 신발, 이불까지 빼앗겨 추위에 떨어야 했다.

수로바는 군인인 아버지가 휴가 나올 때는 함께 구호 현장을 찾았다. 그는 “부모님을 통해 조국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고 말했다.

지난해 6월 우크라이나 북동부 하르키우에서 실향민에게 구호품을 전달하는 줄리아 수로바. 기아대책 제공


그는 “전쟁 3년째인 지금도 동남쪽에서 난민들이 계속 올라오고 있다”며 수백만명의 난민들이 심각한 위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특히 어린이가 어른보다 더 전쟁을 감정적으로 받아들인다며 우크라이나의 많은 아이들이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고 전했다. 수로바는 “전쟁은 아이들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다. 살던 집을 떠나고 함께 지내던 친구들과 헤어져 피란을 가야 하는 현실에 대해 많은 걱정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미사일 공습 경보가 울리면 하던 일을 멈추고 대피소로 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이들의 일상”이라며 “미사일 소리를 듣고 자란 아이들은 작은 소음에도 극심한 두려움을 느낀다. 일부는 말을 잃고 대화 자체를 거부한다”고 전했다.

아이들을 떠올리면서 수로바는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자국민들의 피해 상황을 자세히 말하기가 조심스럽다는 그는 애꿎은 휴대전화를 만지며 감정을 추스르다가 끝내 눈물을 보였다. 겨우 말을 다시 이어간 수로바는 “지난해 폴란드의 한 고아원을 찾아가 아이들에게 과자 등을 전달했는데, 한 아이가 내게 다가와 내 이름(줄리아)이 자기 엄마 이름과 똑같다며 눈물을 흘린 일이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지난 5월 난민보호소에서 아이들을 위해 미술 프로그램을 진행했을 때도 눈물을 참기 힘들었다고 한다. 수로바는 “아이들은 손님이 왔다는 것 자체로도 행복해했다”며 “전쟁으로 가족을 잃었기 때문에 좀처럼 행복한 시간을 갖기 어려운데, 비록 잠깐이었지만 함께 놀고 노래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구호 활동의 보람도 크다고 했다. 수로바는 “시민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어려운 상황임에도 음식을 대접해준 노부부도 있었다”며 “난민들을 만나면서 구호 활동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깨닫는다”고 말했다.

지난해 키이우 모슈춘을 방문했을 때는 주민들이 서로 돕고 챙기는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수로바는 “마을 이장과 주민들은 우리한테서 받은 구호 식료품 중 일부를 따로 모으고 페트병에 수돗물을 담아 카호우카댐 붕괴로 피해를 입은 인근 마을에 전달했다”며 “이들은 직접 연막탄을 만들에 군에 제공했는데, 그 연막탄 덕분에 실제로 군인들이 탈출에 성공하기도 했다”고 소개했다.

수로바는 한국인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며 “이 전쟁은 서로가 함께해야 이길 수 있다. 한국의 도움과 응원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고 있어 지속적인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다. 아이들은 잘못이 없다”며 관심과 도움을 부탁했다.

인터뷰를 마치며 수로바에게 한국에서의 스케줄을 물었다. 인터뷰 내내 결연하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그는 한복을 입고 경복궁에 갈 예정이라고 했다. 눌러 살고 싶을 만큼 한국이 좋다고 말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20대 여성이었다. 수로바는 오는 8일 우크라이나로 돌아간다.

최민우 기자 cmwoo11@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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