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쓰레기 없나요”… 석화대기업, 폐플라스틱 확보 전쟁
영국에 본사를 둔 ‘석유 공룡’ 로열 더치 쉘은 지난 3월 발간한 ‘2023년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통해 플라스틱 재활용 관련 목표를 철회했다. 당초에는 내년까지 연간 100만t의 플라스틱 폐기물을 열분해 방식으로 재활용하겠다고 했는데, 이 목표가 실현 불가능하다고 결론 내렸다. 재활용 플라스틱에 대한 고객 수요는 분명히 있지만, 원료인 폐플라스틱의 부족으로 관련 시장의 성장 속도가 예상보다 느리다는 이유에서다. 열분해란 폐플라스틱에 열을 가해 다시 정유‧석유화학 공정에 투입할 수 있는 액체 기름(열분해유)으로 만드는 기술이다.
폐플라스틱 재활용 사업에 뛰어든 한국의 대기업들도 쉘처럼 폐플라스틱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SK지오센트릭(2026년 10만t), GS칼텍스(2027년 5만t), HD현대오일뱅크(2027년 3만t), LG화학(2024년 2만t) 등도 열분해유 관련 생산 목표를 제시한 바 있다. 그런데 이들은 전체 폐플라스틱 물량 중 중소기업이 먼저 가져가고 남은 분량을 두고 경쟁해야 하는 처지다.
과거부터 한국 폐기물 시장은 물리적 재활용(플라스틱을 잘게 쪼개 재활용)을 하는 영세 업체들이 주도해왔다. 2019년 폐플라스틱 재활용량은 5698t이었는데 그 중 물리적 재활용이 4384t으로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런 상황에서 대기업들이 화학적 재활용 사업에 뛰어들어 폐기물 확보에 나서면서 중소기업계는 생존 위기를 느꼈고, 지난 2021년 당국에 폐플라스틱 재활용·소각을 중소기업 적합업종으로 지정해달라고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적합업종으로 지정될 경우 대기업은 3년 동안 해당 업계에 진입할 수 없고, 조처가 연장되면 최대 6년까지 진입이 막힐 수 있다. 대기업들은 순환경제 사업을 위해선 안정적인 폐플라스틱 공급이 필요하다며 반대했다. 결국 양측은 한발씩 물러나 중소기업이 물리적 재활용 목적으로 먼저 물량을 가져가고, 나머지를 대기업이 가져가 화학적 재활용에 쓰기로 상생 협약을 맺었다.
그런데 중소기업이 가져가고 남은 물량의 상당 부분은 시멘트 업계가 선점 중이다. 시멘트 회사들은 소성로 보조 연료, 시멘트 자체 원료 등으로 석탄 대신 폐플라스틱을 활용함으로써 탄소 감축을 도모하고 있다. 이들은 투자 계획만 제시된 상태고 실제 생산 중인 곳은 아직 없는 화학적 재활용 업계와 달라 쓰레기 수급을 꽉 쥐고 있다.
최근 정부가 석유 또는 석유화학제품의 원료 물질로 재활용할 수 있는 폐플라스틱을 ‘친환경 정제원료’로 인정해 주기로 하는 등 정책 지원에 나서면서 대기업 중심의 석유화학 업계, 중소 소각·재활용 업계, 시멘트 업계의 ‘쓰레기 확보전’은 더 치열해질 전망이다. 그동안 폐플라스틱 열분해 재활용 사업은 합법이 아니라 규제 샌드박스로 진행됐는데 정부가 이를 손보겠다고 나선 것이다.
쓰레기 확보 경쟁으로 인한 원료 비용 상승은 대기업들의 투자 속도 조절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현재 울산에 플라스틱 재활용 복합단지(ARC)를 짓고 있는 SK지오센트릭도 쉘처럼 열분해 관련 목표 하향 조정을 검토 중이다. SK지오센트릭이 예고했던 대로 2026년에 ARC에서 10만t 열분해유를 생산하려면 약 15만t의 폐플라스틱을 확보해야 하는데 한국에서 구할 수 있는 쓰레기양이 얼마나 되는지, 확보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이 있는지 등을 연말까지 자세히 따져볼 예정이다. 검토 결과에 따라 목표 생산량 및 상업 가동 시점 등을 재조정할 계획이다.
SK지오센트릭 내부에서는 아예 폐플라스틱으로 열분해유를 만드는 설비는 나중에 도입하자는 목소리도 나온다. 중소기업에서 생산한 저품질 열분해유를 갖다 후처리해 고품질로 만드는 설비부터 도입하자는 것이다. 원래는 둘 다 동시에 도입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거의 공짜로 가져올 수 있을 줄 알았던 폐플라스틱 가격이 치솟고, 투자비는 급증한 상황에 맞춰 우선순위를 검토하자는 분위기다.
아직 구체적인 사업 실행에 들어가진 않은 다른 정유·석화 기업들은 검토 단계에 머물며 몸을 사리는 중이다. 업계 관계자는 “이미 대대적인 투자를 집행하고 있는 SK지오센트릭은 수정 목표치를 제시하는 게 발등에 떨어진 불이겠지만 나머지 기업들은 목표로 제시했던 열분해유 생산 시점까지 아직 여유가 있다”며 “시장성, 규제 상황 등을 지켜보며 유연하게 대응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정유·석화업계 대기업 대부분이 열분해를 중심으로 폐플라스틱 사업에 뛰어드는 배경에는 친환경 전환이라는 공통의 과제가 있다. 탄소 다배출 사업 중심 포트폴리오는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판단이다. 유럽 미국 등 선진국을 중심으로 환경 규제가 강화하며 재활용 플라스틱 수요가 느는 상황도 고려했다. 유럽연합(EU)은 2030년까지 플라스틱을 제조할 때 재생 원료를 30% 이상 사용하도록 규정했다.
김평중 한국석유화학협회 대외협력본부장은 “회원사들이 화학적 재활용 사업에 진출했던 초기부터 다양한 민원을 취합해 정부에 전달했고 환경부, 산업통상자원부 등도 의지가 강해 상당 부분 반영됐다”며 “현 시점에선 폐플라스틱 부족 문제를 제외하면 정책적으로 건의할 사항이 많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황민혁 기자 okj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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