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의 국내 이주와 해외 이주는 연결된 현상” [김기협의 남양사(南洋史) <23>]
‘화교(華僑)’라면 “중국 밖에 사는 중국인”이란 뜻으로 대개 이해한다. 그러나 엄밀한 뜻으로는 중국(중화인민공화국 또는 중화민국) 국적 소유자로 한정된다. 국적에 관계없이 중국계 모두를 지칭하는 말로는 ‘화예(華裔)’나 ‘해외화인(海外華人)’이란 말이 있다. 이 글에서는 엄밀한 구분 없이 ‘화교’란 말을 통념대로 쓰겠다.
‘화교’는 19세기 말에 화교들 자신이 아니라 본국 언론에서 쓰기 시작한 말이다. 국가가 위기에 처하자 종래 무시해 온 해외 중국인들의 힘이 아쉬워진 결과다. 한국 독립운동에도 하와이 이주 노동자들의 지지가 큰 몫을 했는데, 나간 지 얼마 안 되는 조선인 노동자들보다 훨씬 더 큰 실력을 당시 해외 중국인들은 쌓아놓고 있었다.
‘화교’란 말에는 민족주의 정서가 얹혀 묘사적(descriptive) 의미보다 규범적(normative) 의미로 많이 쓰이면서 그 실제 모습이 명확지 않게 되었다. 화교 중에는 현지에 동화된 수준의 차이가 있고 정체성의 의식에도 편차가 크다. ‘중국인’의 다양성 못지않게 큰 다양성을 가진 존재가 ‘화교’라는 사실에서 출발해야 그 실체에 접근할 수 있다.
남양 곳곳에 자리 잡은 한 작은 고을 사람들
민국혁명(1911)을 전후한 본국의 정치적 변화에 화교의 역할이 부각되면서 화교 연구가 활발해졌다. 그러나 본국의 변화에 대한 역할에 관심이 집중되어 ‘화교 현상’의 본질에 대한 연구는 부진했다. 21세기 들어 제기된 새로운 연구 방향이 눈길을 끈다.
필립 큔은 〈타인들 속의 중국인 Chinese among Others: Emigration in Modern Times〉(2008)에서 “중국인의 해외 이주를 국내 이주의 연장선 위에서 볼 것”을 제안했다. 중국은 언제나 많은 이질성을 내포한 국가였다. 그 국경 내에서의 이주라도 실제로는 언어와 풍속이 다른 ‘외국’으로 옮겨가는 것과 같은 양상이 많았다. 국내 이주와 해외 이주를 같은 틀 안에서 고찰함으로써 시각을 넓고 깊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스티븐 마일스의 〈중국인 디아스포라: 이주민의 사회사 Chinese Diasporas: A Social History of Global Migration〉(2020)는 이 시각을 이어받은 책이다. 마일스는 그 도입부에서 푸젠성의 한 조그만 고을에 초점을 맞춘다. 장저우(漳州)의 용계현(龍溪縣), 지금은 장저우시 룽하이(龍海)구의 일부가 되어 있는 곳이다.
최근 조사된 각지의 묘비 중 용계현 출신 인물의 것을 열거한다. 1641년 나가사키, 1678년 말라카, 그리고 1701년과 1702년의 자바 비석들. 한 조그만 고을 사람들이 아득히 먼 이곳저곳에 (묘비를 남길 만큼)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용계현 출신들이 자바와 샴 사절단 일원으로 들어온 상황을 적은 명 실록 기사다. 1430년대와 1440년대에 이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가 제사를 지내게 허락해 달라고 청원을 올렸다는 것이다.
마일스는 용계현의 예를 통해 중국인의 해외 이주에 어떤 뚜렷한 패턴이 있었음을 역설한다. 한 장소에서 해외의 어느 장소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두 장소 사이에 하나의 궤적이 생겨 더 많은 이주가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주민 사회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이 패턴의 이해가 필수적이라고 한다.
‘해적’이란 이름으로 불린 이주민 집단들
마일스는 앞서 중국 내 이주 현상을 연구한 〈강을 거슬러 Upriver Journeys: Diaspora and Empire in Southern China, 1570-1850〉(2017)를 내놓은 바 있다. 이 책에서 마일스는 명나라 말기에서 청나라 중기까지 광둥(廣東) 사람들의 광시(廣西) 이주 현상을 탐구했다. 한화(漢化) 수준도 산업 수준도 낮은 광시 지역은 광둥 사람들에게 ‘기회의 땅’이었다. 농부들은 경작할 땅을 쉽게 구할 수 있었고 상인들은 작은 자본을 갖고도 사업을 일으킬 수 있었다. 심지어 학인들도 경쟁이 약한 광시로 가면 과거시험 합격이 훨씬 쉬웠다.
여러 세기에 걸쳐 활발하게 진행된 광둥-광시 이주 현상에서 마일스가 가장 중시하는 패턴은 이주집단의 ‘패키지’ 성격이다. 광둥의 한 고을에서 광시의 한 구역으로 이주하는 집단에는 여러 직종의 (상업, 제조업, 농업, 학인-관리 등) 사람들이 어울려 시너지효과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농부들도 생산물을 받아주는 동향 상인들이 있어야 정착이 쉬웠다.
국내 이주에서 확인되는 패턴을 해외 이주에 관해서도 가설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 마일스의 제안이다. 국내 이주는 해외 이주보다 기록이 많고 잘 정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이 이해에 도움이 되는 하나의 사례가 해적 리마홍(Limahong, 林阿鳳)이다. 리마홍은 수천 명 무리를 이끌고 스페인인이 막 자리 잡은 마닐라를 공격하다가 격퇴되었다. 그에 관해서는 스페인 쪽과 중국 쪽에 모두 기록이 있다.
리마홍은 1574년 60여 척 배에 3천여 명 병력을 싣고 마닐라를 포위했다가 몇 차례 접전으로 2백여 명 병력을 잃고 퇴각했다고 한다. 압도적인 병력을 갖고 쉽게 퇴각한 이유가 석연치 않은데 아녀자 등 비전투원이 많았음을 기록 중에서 알아볼 수 있다. “해적”이라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이주민 집단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당시 “해적” 중에는 진짜 해적 외에도 명나라 체제에서 벗어난 여러 종류 사람들이 있었다. 스페인인이 마닐라를 중심도시로 선택한 것은 그곳에 정착해 있던 중국인들이 상업, 제조업 등 항구도시의 기반조건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리마홍 집단은 중국 연안에서 밀려나 자리 잡을 곳을 찾고 있었고, 조금 더 빨리 움직였다면 마닐라에 자리 잡은 상태에서 스페인인을 맞이할 수도 있었을 것 같다.
고향 그리운 마음을 담은 림 꾸냥의 설화
리마홍과 같은 시기의 해적 림도건(林道乾)은 리마홍보다 운이 좋았다. 중국 동남해안에서 활동하며 리마홍과 교전을 벌인 적도 있는 그는 1570년대에 2천 명 무리를 이끌고 파타니(말레이반도의 일부로 지금은 태국 영토)에 자리 잡았다. 지역 술탄과 협력관계를 맺은 것으로 보인다.
림도건에 관한 설화가 여기저기 전해지는데, 그 여동생이 등장하는 파타니의 설화가 당시 해외 중국인의 의식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특히 흥미롭다. 림코뉴(林姑娘)는 차오저우(潮州)에서 파타니까지 오빠를 찾아와 병든 어머니를 돌보러 고향에 돌아가자고 간청하다가 따르지 않자 캐슈나무에 목매어 죽었다. 그 죽음을 애처롭게 여기고 효심과 애향심을 사모한 현지 중국인들이 그 나무로 림코뉴의 목상을 만들어 사당에 모셨다고 한다.
림도건 집단 중에는 파타니가 형편 때문에 일시 머무는 곳이고 언젠가 고향에 돌아가리라는 희망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돌아갈 길은 열리지 않고 파타니에 자리 잡게 되었다. 고향을 그리는 마음을 담은 림코뉴 설화에는 그 길을 열어주지 못한 (또는 열어주지 않은) 지도자에 대한 원망도 곁들여졌을 것 같다.
위에 림코뉴의 “애향심”이라 한 것은 〈위키피디아〉 “Lim Ko Niao” 기사 중 “patriotism”을 옮긴 말이다. “애국심”이라 하지 않은 것은 그 사람들이 그리워한 것이 고향이지 국가가 아니었으리라는 생각에서다.
국가 정체성보다 강했던 지역 정체성
인간의 정체성은 여러 층위가 겹쳐진 것이다. 한 개인이라는 미시적 정체성과 인류의 일원 내지 우주의 일부라는 거시적 정체성 사이에 가족, 직장, 지역사회, 국가, 종족 등 여러 층위 정체성이 겹쳐져 있다. ‘근대’라는 시대의 큰 특징 하나가 국가(민족) 정체성의 강조다.
‘화교’란 말이 널리 쓰이기 시작한 것은 중국에서 국가(민족) 정체성의 인식이 강화되고 있던 19세기 말이다. 화교사회의 실제 모습은 매우 다양했다. 정착한 지역에 따라, 그리고 정착 후 겪은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른 모습이 빚어졌다. 그런 다양성을 단순한 ‘현상’으로 치부하고 중국인이라는 ‘본질’만 내세운 것이 “화교”의 호명(呼名)이었다.
본국의 호명에 화교사회에서도 큰 응답이 있었던 것은 이주 지역의 민족주의 흥기 때문이었다. 민족주의 흥기는 식민지배에 대한 반발에 큰 원인이 있었다. 화교는 서양 열강의 지배체제 아래 상공업과 전문직종에 종사하는 중간계층으로서 준-지배계급의 역할을 맡고 있다가 배척의 표적이 되었다. 태국은 가장 많은 중국계 인구를 가진 나라인데도 배척이 비교적 덜했던 것은 식민지배를 받지 않은 데 원인이 있을 것이다.
큔도 마일스도 화교사회의 결속력을 혈연, 지연과 종교활동의 세 가지 원리로 파악한다. 이중 ‘지연’의 의미가 우리가 익숙한 범위를 넘어선다. 중국이 ‘천하’이던 시절에 중국인의 국가 정체성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광둥이면 광둥, 민난(閔南)이면 민난, 차오저우면 차오저우, 언어와 풍속을 공유하는 지역 정체성이 더 중요했다.
〈강을 거슬러〉에 그려진 16-18세기 광시 지역의 상황은 한족에 의한 식민지배의 확장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광둥과 푸젠의 대부분 지역도 그런 상황을 겪은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중국인의 국내 이주와 해외 이주를 연결해서 고찰할 필요가 이 점에서 두드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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