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쇼 현장 되자 술렁이는 사람들, 고요한 이태리 마을은 결국...

김상목 2024. 8. 2.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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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더 원더스>

[김상목 기자]

국내 예술영화 애호가들에게 <행복한 라짜로>와 <키메라>로 눈도장을 찍은 이탈리아 여성 감독 알리체 로르바케르, 그를 세계에 각인시킨 작품 <더 원더스>가 공개 10년 만에 국내 극장에서 정식 개봉한다. 국내 관객 절대다수는 감독의 후속작들을 먼저 접했을 테니, 이 감독의 기원을 거슬러 오르게 되는 셈이다.

이번 영화는 감독의 연출 경력에서 전환점이 되는 작업이기도 하지만, 감독의 초반 작업과 현재 작업 스타일의 중간정류장 격이기도 하다. 알리체 로르바케르의 영화세계를 좀 더 깊이 이해하고 싶은 이들이라면 관심을 둘 만 하다. 

영화를 보고 나니 마치 유서 깊은 영화 전통을 가진 이탈리아 영화 역사의 독특한 연대기 압축판이나, 현재 이탈리아는 물론 서유럽의 오랜 전통적 공동체가 처한 공통의 위기를 소개하는 시사 다큐멘터리를 본 기분도 들었다. 이 감독의 작품을 소개할 때 '현대 이탈리아 정체성' 3부작의 연작 테두리 안에서 살펴볼 수도 있다. 그렇게 다양한 생각이 들게 하는 영화다. 
 
 영화 스틸 이미지
ⓒ 엠엔엠인터내셔널㈜
 
시골 양봉 농가 가족, TV쇼와 만나다

시골 농가의 일상이 화면 가득히 펼쳐진다. 12살 젤소미나는 부모님의 일을 도우면서 세상의 흐름과 단절된 것처럼 살아간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꿀을 수확하는 젤소미나의 가족은 늘 바쁘다. 벌집을 관리하고, 때가 되면 꿀을 채집해 가공한다. 토마토와 채소를 재배하고 양 떼도 방목한다. 작은 농장에는 젤소미나와 엄마, 아빠, 그리고 세 여동생과 함께 마치 이모나 고모 같은 여인 '코코'가 있다. 젤소미나는 부모님의 일을 돕고 어린 동생들을 돌보느라 항상 바쁘다. 가끔 방문하는 마을의 또래 여자아이들은 다들 멋을 부리고 남자애들에게 눈이 가지만 젤소미나는 그럴 틈도, 기회도 없다. 고단한 노동의 나날이다.

젤소미나의 가족 농장은 전통을 지키며 고되긴 해도 목가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묘사된다. 하지만 머지않아 농장 살림은 썩 좋지 않다는 게 드러난다. 아빠는 늘 벌침에 쏘여 젤소미나에게 침을 뽑아달라 하고, 벌집을 수거할 때마다 어린 여자아이들은 두꺼운 마스크와 보호복을 착용해야 한다. 일손이 모자라 젤소미나는 물론 첫째 여동생도 농장 일에 매달려야 한다. 천진한 둘째와 셋째 동생들은 그런 사정을 알 리 없으니 응석을 부린다. 고단한 나날이지만 일손은 늘 부족하고 꿀 수확은 예전 같지 않다. 농장은 물론 마을 전체가 푹 가라앉은 분위기다. 가혹한 노동에도 불구하고 수입은 좋지 않고, 이웃들과 젤소미나의 아빠는 제초제 사용 문제로 티격태격한다.

젤소미나는 헌신적으로 부모의 일을 돕지만 성인 몫을 해내기엔 역부족이다. 어느 날 경찰과 공무원과 함께 또래 남자애가 농장에 도착한다. 소년교도소에 갈 위기에 처한 도시 출신 소년을 젤소미나의 아빠가 노동력 충원 차원에서 위탁 보호를 맡은 것이다. 적응하지 못하면 꼼짝없이 교도소행이 될 처지의 소년 '마틴'은 말이 없고 타인과의 접촉을 극도로 꺼린다. 여자아이들만 가득한 농장이기에 젤소미나의 엄마는 반대하지만, 아빠는 밀어붙인다. 노동력 제공 외에도 위탁 관리에 따른 경비도 지급되기 때문이다. 

어느 날, 한적한 마을이 갑자기 들썩거린다. 시골을 다니며 풍물을 소개하는 유명 TV쇼 프로그램 촬영이 예정됐기 때문이다. 마을 인근 강 가운데 위치한 섬에서 예행연습이 진행되고, 주민들은 많은 상금과 함께 전국적인 주목을 받을 기회를 반색한다. 정체된 마을에 수입이 생기고 관광명소가 되리란 기대감 때문이다. 이웃들은 우승을 목표로 필살기를 궁리하는데, 젤소미나의 아빠만 이를 탐탁해하지 않는다. 하지만 젤소미나는 농장의 경영난을 타개할 기회 겸 화려한 바깥세상과의 접촉이라고 생각한다. 아빠를 설득하다 결국 몰래 신청서를 접수한다. 이후 이 가족에게 연달아 일이 벌어진다. 
 
 영화 스틸 이미지
ⓒ 엠엔엠인터내셔널㈜
 
영세 자영농의 현주소

젤소미나와 그의 가족이 처한 상황은 현재 이탈리아 농촌이 전반적으로 처한 위기를 대변한다. 이는 우리에게도 그리 낯설지 않은 모습이다. 현재 소규모 자영농이 당면한 전형적인 위기의 풍경은 유라시아 대륙 반대편 끝에 위치한 한국에서도 통용된다.

젤소미나네 농장에서 생산되는 꿀은 이중의 노동만으로 추출된 순수한 존재다. 꿀벌은 부지런히 토스카나의 숲과 들에서 꿀을 채취해 벌집에 갈무리한다. 젤소미나의 가족은 푹푹 찌는 무더위와 갑자기 몰아치는 소나기에도 매일의 노동을 멈추지 않는다. 최첨단 과학기술이나 수확량을 불리기 위한 첨가물 같은 남들 다 하는 방책을 젤소미나의 아빠는 한사코 거부하며, 오로지 순수한 꿀 자체에 집중한다. 우리가 종종 경외감을 느끼는 '장인'의 고집과 직결되는 면모다.

하지만 그런 전통적인 방식은 꿀벌과 인간의 헌신과 희생을 전제하는 행위다. 젤소미나의 가족 농장은 말 그대로 온 가족의 노동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야 지속할 수 있는 현장이다. 12살 한창 꿈 많을 소녀는 물론 8살 동생도 어른들과 별반 다를 것 없이 매일의 노동에 투입된다. 아동학대, 혹은 19세기 산업혁명 초창기 아동노동을 보는 기분이다.

아이러니한 건 젤소미나의 가족이 토스카나 시골 토박이가 아니라는 점이다. 마을에서도 가장 전통 방식을 고수해 까다롭다는 평판을 듣는 젤소미나의 아빠는 사실 알프스 건너 북쪽에서 내려와 정착했다. 아내는 물론 더부살이하는 '코코'도 모두 이 동네에 연고가 없다. 이들은 어떤 사연 때문에 이곳으로 이주했다. 영화에서 따로 설명되진 않지만, 눈썰미가 있는 이들이라면 이 가족이 과거에 어떤 이상을 좇으며 살았고, 그 신념을 여전히 고수하며 대도시의 산업 문명과 유리되는 삶을 추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이상주의는 위기에 봉착한 지 오래다. 편법 없이 순수한 자연의 수확만으로 생활하려는 젤소미나 가족의 원칙은 이를 위한 노동력 수요 때문에 어린 자녀들을 일터로 내몰게 했다. 외부자인 소년 마틴을 보호관찰이란 명목 아래 이용해 사실상 일꾼으로 부려 먹는 모순으로 연결된다. 가족 내에서 이런 위선은 종종 지적되며 불화와 분쟁으로 이어진다.

우리가 이탈리아 여행을 꿈꿀 때, 마치 목가적 이탈리아 전원 풍경 그 자체로 상상하는 토스카나의 그림 같은 풍광 이면에는 그렇게 위기에 처한 수백수천 년 동안 계승된 전통적 농업과 공동체의 균열이 감춰져 있다. 편리함을 위해 채용한 제초제는 독성 때문에 젤소미나네 벌집의 꿀벌을 해친다. 제초제 성분이 토양과 식물에 농축되고 꿀벌은 그런 독소를 견디지 못한다. 마을의 수입원이 될 관광 진흥은 불청객들을 꼬이게 만든다. 고단한 일과를 마치고 단잠에 빠져야 할 젤소미나네 가족은 밤의 수렵을 즐기러 온 사냥꾼들의 총소리 때문에 잠을 설치기 일쑤다. 하지만 합법적 수렵 허가와 함께 마을에 돈을 뿌리는 이들의 존재를 막을 수 없다. 

TV쇼 관계자들은 이 시골마을의 오래된 전통과 도시인들에겐 이국적인 풍속과 문화를 소개해 도움을 주러 왔다고 한다. 프로그램에 걸린 상금과 홍보 효과는 이 마을에 절실하다. 로마 문명의 주춧돌 노릇을 했던 고대 에트루리아 문명의 후예로 마을 주민들은 신화 속의 존재로 승격된다. 하지만 직전까지만 해도 평범했던 주민들이 코스프레 쇼를 벌이듯 차려입은 고대인 복식은 우스꽝스러울 뿐이다.

전국적인 인기가 있는 (세계 최고의 미녀라 칭송되는 모니카 벨루치가 담당한) 프로그램 진행자는 신화 속 여신처럼 치장한다. 고증과는 담을 쌓은 출연자들의 의상은 그저 낯선 풍경에 끌리는 도시 시청자들의 시선을 끄는 데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마을 주민들이 처한 위기의 발원지라 할 대도시 위주의 자본주의 시장구조가 고스란히 시청률에만 눈이 가는 미디어 프로그램의 본질과 연결되는 셈이다.

전통과 지역 공동체의 초상
 
 영화 스틸 이미지
ⓒ 엠엔엠인터내셔널㈜
 
젤소미나 가족이 끝내 참가한 프로그램 경연은 복수의 욕망이 충돌하는 난장판이다. 젤소미나는 아빠와 대립하며 (아마 그로선 첫 번째 반항일 테다) 당장 농장이 처한 위기를 벗어나 숨돌리기를 원한다. 하지만 이웃들은 사생결단의 태도로 달려든다. 우승하면 뭘 할 거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이웃 아저씨는 "관광업에 뛰어들기 위해 호텔을 지을 것"이라고 말한다.

프로그램의 '그림'을 위해 좀 더 순수하고 소박한 소감을 기대하던 관계자들이 당혹스러워 한다. 젤소미나의 아빠가 버벅거리며 순수하게 답하는 모습도 이들이 바라던 모습은 아니다. 젤소미나와 마틴이 상황을 수습하며 진심을 전하기 위해 즉석에서 벌인 공연은 잔잔한 감동을 불러오지만, 관계자들은 좀 더 자극적이고 눈에 확 들어오는 댄스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젤소미나의 가족은 끝내 도태될 운명으로 보인다. 

그렇게 수천 년 이어진 토스카나 시골 마을의 전통적인 삶은 시한부 판정이 내려진다. 이는 이미 영화 내내 예감된 운명이다. 마을 장터에서 고단한 노동으로 완성된 젤소미나 농장의 전통 꿀은 품질을 인정받지만, 결국 시장이 판단하는 최우선 가치는 가격이다. 영화 속 배경이 되는 시기가 정확히 언급되지 않지만, 유로화가 통용되는 것으로 보아 21세기 초반으로 추정할 수 있다.

작은 유리병에 담긴 꿀의 가격을 묻는 손님에게 젤소미나는 5유로라고 답한다. 2023년 현재 유럽 마트에서 최저가 꿀은 3~4유로다. 물론 중국과 튀르키예에서 수입된, 첨가물로 양을 불리고 가격을 낮춘 상품이다. 젤소미나의 가족처럼 전통 방식으로 생산하려면 원가가 7~8유로는 되지 않을까. 현재 서유럽 대부분의 양봉 농가가 위기에 처했다고 한다. 가격경쟁력이 가능하지 않으니 양봉 농가가 폐업하고, 국내 생산 자급률이 떨어지고 수입품이 대체하는 것이다. 품질 관리나 생산과정 검수가 어려워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영화가 공개된 10년 전부터 이미 사회적인 문제였던 것이다.

감독은 고향인 토스카나의 농촌 공동체가 처한 위기, 북유럽 출신 부친과의 추억 등을 생생하게 재현한다. 실제 청소년 배우들까지 양봉 실습을 오랜 시간 해 사실적인 연기를 펼치게 했다. 덕분에 다큐멘터리 묘사처럼 세부적인 묘사가 구현된다. 영화를 보고 있자면 드라마의 전형적인 전개라기보다 툭툭 단절되긴 해도 화면 바깥의 실제 삶을 그대로 떠온 느낌이다.

이런 영화적 연출은 <자전거 도둑>과 <움베르토 디>, <흔들리는 대지>로 잘 알려진 비토리오 데 시카 같은 2차 세계대전 직후 '네오리얼리즘' 경향의 작가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계승적 태도다. 기승전결이 딱 맞아떨어져 '시나리오'라기 보다 툭 지나가다 엿보는 어느 가족의 일상으로 보인다. 화면만 흑백으로 바꾼다면 이 영화의 정확한 시기 구분은 무척 힘들어질 테다. 이는 알리체 로브바케르 감독의 극영화 전반에서 관측되는 특이점이다.

그렇게 젤소미나 가족은 네오리얼리즘 영화들의 공통된 특징처럼 거역할 수 없는 권력과 원하지 않는 변화의 광풍 앞에서 패배자의 운명으로 치닫는다. 몰락한 자리엔 주인이 떠나고 삭막하고 획일화된 회색빛 덩어리들만 남을 테다. 떠나야 할 운명의 주인공들에게 보장된 건 아무것도 없다. 그들이 애지중지 가꿔온 것들은 후려치기된 화폐 가치로 염가에 처분되고, 오랜 시간 동안 추억과 노동이 깃든 공간은 사람이 떠나면 머지않아 폐허로 사라질 테다. 이 동네의 유래가 된 고대 에트루리아 문명이 풍화되어 사라진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온갖 충돌과 갈등을 영화 내내 자아내던 젤소미나네 가족은 그들의 조상들이 온갖 세파에 시달리면서 서로 의지해 살아남은 것처럼, 견고한 그들만의 공동체를 사수하는 데에는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영화의 시작에서 어둠 속 손전등 희미한 빛 하나로 집 안에서 각자 자리에 흩어져 단잠을 자던 가족은 어느 순간 마당 풀밭에서 함께 매트리스에 의지해 마치 동굴 속 들짐승 가족처럼 한군데 포개어 잔다. 이후 감독의 후속작들 <행복한 라짜로>와 <키메라>에서 즐겨 사용되는 마술적 리얼리즘 효과가 두드러지진 않지만, 사실주의 풍경으로는 전달하기 어려운 상징 표현의 실증 격인 장면들이다. 영화가 마무리될 때쯤이면, 그런 무의미해 보이는 뜬금없던 장면이 비로소 관객의 머릿속에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감독의 메시지로 받아들여질 테다. 거기에 더해 후반부에 소년과 소녀가 함께 보내는 밤의 풍경은 마치 고대 신화 속 민족과 국가의 기원 설화처럼 초현실적 신비로움으로 등장한다. 무심코 보고 있자면 마치 신화 속 설정이 형상화된 것으로 보인다. 저렇게 시치미 뚝 떼고 그려낼 수 있다니.

젤소미나 가족의 초상을 통해 근대적인 국가주의나 자본주의 시장에 포섭된 소비자 집단이 아니라, 이탈리아의 오랜 향토의식과 지역사회에 뿌리내린 원초적인 공동체의 초상이 구현된다. 툭 지나가듯 파편적으로 보이던 영화의 장면들은 마침내 하나로 통합돼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거대한 역사 풍속화로 완결된다. 그렇게 알리체 로르바케르라는 미래의 거장이 탄생했다는 걸 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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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정보>

더 원더스
Le meraviglie, The Wonders
2014 | 이탈리아/스위스/독일 | 드라마
2024.07.31. 개봉 | 112분 | 12세 관람가
감독 알리체 로르바케르
출연 알렉산드라 마리아 룽구(젤소미나 역), 샘 루윅(볼프강 역),
알바 로르바케르(안젤리카 역), 안드레 헤니케(아드리앙 역),
모니카 벨루치(밀리 카테나 역), 사빈 티모테오(코코 역)
수입/배급 엠엔엠인터내셔널㈜

2014 67회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
2014 마르델플라타영화제 최우수 각본상
2014 뮌헨영화제 신인감독상
2014 아부다비영화제 '블랙 펄 어워드'
2014 영화 매거진 '빌리지 보이스' 미개봉 최우수 영화 2위
2014 세빌유럽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 여우주연상(마리아 알렉산드라 룽구)
2015 인터내셔널 시네필 소사이어티 어워드 '2014년 미개봉작' 최우수 작품상
2015 이탈리아 온라인 영화상(IOMA) 최우수 유럽영화상, 이탈리아영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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