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킵고잉”…‘충동’에서 비롯된 무대, 충동소극장 [공간을 기억하다]
문화의 축이 온라인으로 이동하면서 OTT로 영화와 드라마·공연까지 쉽게 접할 수 있고, 전자책 역시 이미 생활의 한 부분이 됐습니다. 디지털화의 편리함에 익숙해지는 사이 자연스럽게 오프라인 공간은 외면을 받습니다. 그럼에도 공간이 갖는 고유한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며,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면서 다시 주목을 받기도 합니다. 올해 문화팀은 ‘작은’ 공연장과 영화관·서점을 중심으로 ‘공간의 기억’을 되새기고자 합니다. <편집자주>
골목길 빨간 벽돌 건물 지하, 10년간 자리 지킨 '충동소극장'
뚝섬유원지를 끼고 있는 서울 광진구 자양역 인근은 주택단지가 빼곡히 조성되어 있다. 새로 들어선 아파트, 그 사이사이 오랜 시간 터를 지키고 있는 다가구 주택까지 다양한 삶의 형태 속에 의외의 간판도 보인다. 좁은 골목길, 붉은 벽돌 건물의 지하에 위치한 충동소극장이다.
머리가 닿을 듯한 낮은 천장에 붙은 포스터를 따라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면 작은 무대가 관객을 맞는다. 좌석은 최대 50명까지 수용가능한 이 극장의 특징은 무대가 객석보다 넓다는 점이다. 통상적으로 최대한 많은 관객을 받아 수익을 내려는 극장과는 확연히 다른 지점이다. 공연장 바닥은 넘어져도 다치지 않을 푹신한 매트가 깔려있고, 흔히 무대와 객석을 구분하는 ‘단상’도 없다. 인간과 관계로부터 이야기를 만드는, 충동소극장의 정체성이 묻어난 인테리어다.
공연장 옆엔 자그마한 또 다른 공간도 있다. 사무실 겸 휴게실로 활용되고 있는 이 공간의 반 이상은 긴 테이블이 차지하고 있다. 관객들은 이 공간에서 대기하면서 다른 관객들과 눈을 마주치고, 살을 맞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곳 역시 관객과 가깝게 소통하려는 의도가 녹아 있다. 배우와 장은정 극장장이 함께 포스터를 붙이면서 모객을 하기도 하지만, 주민들이 먼저 이 공간을 찾는 이유다.
충동소극장의 정체성은 휴게실 벽면에서도 볼 수 있다. 그간 이 공간에서 선보인 작품들의 포스터가 전시되어 있는데, ‘잘자요, 엄마’ ‘아무것도 아닌, 사람’ ‘늑대는 눈알부터 자란다’ 등 모두 배우 개개인의 고민을 통해 만들어진 극이다. 이 작품이 무대에 오르면서 배우들은 조금 더 인간다움을 찾아가고, 관객에겐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진다. 이것이 바로 충동소극장의 정체성이다.
인간의 '충동'이 만들어내는 작품들
“10년간 배우 활동을 하다가 올해로 연출로서 10년차가 됐네요. 아이를 키우면서 극단 생활을 했는데, 쉽지가 않더라고요. 현실적으로요. 오래된 연극 생활을 그만두려니까 우울감이 오더라고요. 그래서 남편의 권유로 극단을 만들었어요. 전 극단에 함께 있던 배우 1명을 데리고 시작했죠. 그러다 보니 공연을 하기 위해선 공연장이 필요했어요. 이곳이 층고가 낮아서 아쉽긴 하지만(웃음), 자유롭게 공연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편안한지...”
연출가로 활동 중인 장은정 극장장이 이곳을 ‘충동’이라고 이름 지은 건, 배우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여기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연기의 근간이 ‘충동’이라는 말이다. 충동소극장에서 만드는 작품들은 이 이름에 충실해 만들어졌다. 대본을 쓰고 그에 맞는 배우를 캐스팅하는 여타 작품과 달리, 충동소극장은 배우를 먼저 섭외하고 그들의 ‘충동’에서 비롯된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공동창작해 무대에 올리는 식이다. 말 그대로 ‘배우 맞춤형’ 작품이 탄생하게 된다.
“아시다시피 이 동네에 연극 인구가 많지 않아요. 관객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연극을 하고 싶은 사람을 가르치면서 참가비를 받고, 그 돈으로 공간을 운영하고 작품을 만드는 데 사용했어요. 사실 연출로서 페이를 받지 못하는 때가 많죠. 사실 연극을 하고 싶어도 그 루트가 매우 한정적이잖아요. 충동소극장은 연극에 대한 열정, 충동이 있는 배우들에게 새로운 루트가 되어주길 바랐습니다.”
이들이 선보이는 작품은 우리에게 친숙한 이야기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렇다고 뻔한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천천히 사람을 관찰하고 그들이 가진 고통을 바탕으로 연극을 만듦으로써 오는 긍정적인 효과를 끌어낸다. 연극치료사로(한국연극치료협회 소속)도 활동 중인 장은정 감독은 “연극은 치유의 힘이 가장 크다”고 말한다.
“결국 정해져 있는 주제는 없어요. 배우들이 각자 가지고 있는 이야기를 그 상황에 맞게 제시하고, 그것이 연극이 되는 겁니다. 사람들마다 저마다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매번 새로운 작품이 나올 수 있는 것 같아요. 말 그대로 ‘충동’적인 거죠. 과거 장애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이들에게 맞는 교육법을 찾기 위해 2년에 걸려 자격증을 딴 것에서 영향을 많이 받는 것 같아요. 쉬운 말로 하면 ‘하고 싶은 걸 다 하는’ 극장인 거죠. 저나 배우들이나 모두요. 예술가에게 ‘자유’만큼 중요한 건 없잖아요.”
이 곳에서 올려지는 작품이나, 운영하는 프로그램이 수익 창출을 위한 활동과는 거리가 멀다. 장 감독은 “수익이 목표가 아니라면 훨씬 더 자기 작업에 집중할 수 있다”는 말로 이 공간을 운영하는 자세를 보여줬다.
“수익에 연연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마음을 더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사업성도 물론 중요하지만, 저희 같은 사람도 필요하잖아요. 한 회사에 여러 분야의 팀이 있는 것처럼요. 기업들을 보면 대부분 연구소를 가지고 있잖아요. 연구소는 돈을 버는 집단이라기 보다, 오히려 돈을 먹는 집단이죠. 그런데 그 연구소가 없으면 그 기업의 미래는 없다고 봐요. 그런 면에서 예술은 사람을 연구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당장의 니즈에 맞춰 사업성을 추구하기 보단, 조금 더 근본적인 것을 고민할 수 있는 것을 만드는 게 예술가들의 일인 거죠.”
"그럼에도 충동소극장은 '킵고잉'합니다!"
2014년 시작해 벌써 이 자리에서 10년간 관객을 만나다 보니 ‘이제 어디로 가야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장 감독을 휘감았다. “지금보다 더 잘할 순 없었다”고 말할 정도로 장 감독은 지난 10년 이곳을 운영하고, 연극을 가르치는 것에 누구보다 열심이었다.
“한동안 발버둥을 쳤어요. 구덩이에 빠져있던 기간이 길었던 것 같은데 빠져나와서 보니까 이제 뭘 해야하는지에 대해 고민하게 되더라고요. 공간도, 사람도 권태기가 있는 느낌이랄까요?(웃음) 지금도 그 구덩이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곤 할 수 없을 것 같지만 새로운 극단에 들어가서 배우로서 활동을 준비하는 등 새로움을 찾기 위해 노력 중이에요. 리더로서 제가 발전하지 않으면 그 집단은 고이게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여전히 권태를 극복하는 과정 속에 있다는 장 감독에게 한 배우의 말은 그를 다시 설 수 있게 하는 동력이 됐다.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은 실패의 의미가 아니다. 한계까지 갔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거다’라는 말이었다.
“큰 힘이 되더라고요. 스스로 ‘이번 생은 망쳤네’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어요. 그런데 이젠 이 일을 제 소명으로 생각하게 됐어요.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10년 전에 만든 저의 신념 덕분이었는데, 그 신념을 다시 돌아보고 점검해보는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연극을 처음 시작할 때 ‘계속한다’가 저의 목표였어요. 가장 어려운 목표라고 생각해요. 그럼에도 저도, 충동소극장도 ‘킵 고잉’(keep going)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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