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나아지지 않겠지만 마음이 있다면
[김성호 기자]
나이 지긋한, 그리하여 이제는 먼 길을 중간에 몇번이나 쉬어가는 스텔라 수녀(정은경 분)가 그녀를 돕는 젊은 수녀 라파엘라(장선 분)와 리사무소를 찾은 참이다. 할머니를 잃고 혼자된 소녀 예선(장해금 분)을 도울 방법을 찾기 위해서다.
리사무소 공무원(오혜림 분)은 난감한 기색이다.
"여기가 아니라 면사무소로 가셔야 해요."
▲ 영화 <샤인> 포스터 |
ⓒ 인디스토리 |
마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예선에겐 삼촌이 하나 있고, 그 삼촌은 제주도에 없다. 면사무소는 연락처를 줄 순 있지만 친권자가 아닌 수녀들이 아이의 복지 관련 정보를 얻을 순 없다는 말을 붙인다. 삼촌은 삼촌이고 마을에서 도와야 하지 않겠느냐는 스텔라 수녀의 간곡한 말에도 공무원은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다"고만 말할 뿐이다.
그때, 라파엘라 수녀의 눈이 번뜩인다. 공무원의 왼쪽 팔목에 천주교 묵주가 매여 있는 것이다. 라파엘라가 "성당 다니시네요" 하고 말하자 공무원이 움찔 물러난다. 때를 놓치지 않을 만큼 노련한 스텔라 수녀다. 공무원의 세례명을 묻고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세실리아 자매님, 법으로 안 돼도 마음으로 알아봐주세요. 마음으로."
▲ 영화 <샤인> 스틸컷 |
ⓒ 인디스토리 |
늦은 밤을 밝힌 한 가닥 가는 가로등 아래 뛰노는 아이들을 멀리서 바라보며 "나아지지 않겠지. 더 안 좋아지겠지" 하며 자조하듯 한숨을 쉬는 스텔라 수녀다. 그러나 그녀는 금세 활짝 웃으며 아이들에게 다가선다. 크게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샤인>을 어떤 영화라 말해야 좋을까. 129분, 요새 기준으론 꽤나 러닝타임이 긴 영화다. 이야기라고 해봐야 몇 문장이나 될까. 제주도 조천읍 북촌리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영화는 지역 교구 성당과 그에 딸린 호스피스 시설에서 일하는 수녀들, 또 그녀들의 도움이 필요한 이들의 이야기다.
▲ 영화 <샤인> 스틸컷 |
ⓒ 인디스토리 |
그 아이를 지키기 위해
악착같이 삶을 연장했던 늙은 할미가 지병으로 끝내 떠나가고, 그의 손녀는 제주라는 큰 섬에 홀로 남겨졌다. 돌봐주는 이 하나 없는 소녀가 외딴 집에 홀로 남아 지새는 밤은 텅 비어있다. 그 빈 시간을 어찌할지 몰라 소녀는 길바닥에 주저앉아 운다. 그 모습을 지나가던 수녀 라파엘라가 발견한다. 누구도 누구를 구할 수 없던 시간, 소녀 앞에 구원처럼 다가드는 무엇이 있다.
난 데 없이 나타난 아이는 이름이 새별(송지온 분)이라 했다. 소녀 예선과 그녀의 친구는 새별이가 예선의 삼촌이 두고 간 딸이라고 하기로 한다. 예선에겐 사람이 고팠고, 그 고픔이 너무 거세어 간절하기까지 했던 탓이다. 마침 새별의 주변엔 다른 어른이 없고, 새별 또한 언니들과 있는 것을 즐거워하였으므로 이것이 범죄가 되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지나가는 시간 동안 이들은 새별을 찾는 이가 끝끝내 나타나지 않기를 바란 건지도 모르겠다.
<샤인>은 소녀들이 제 앞에 나타난 아이를 돌보려 하는 과정을, 또 그럴 수 없는 상황을, 이 모두를 지켜보며 괴로워하는 수녀의 이야기를 담는다. 아주 천천히 감정이 감성을 건드릴 수 있도록 서서히 물들이는 시간이 이어진다.
▲ 영화 <샤인> 스틸컷 |
ⓒ 인디스토리 |
온 세상에 고루 내리쬐는 빛처럼
사람과 사람이 닿는 일터에선 법과 제도를 넘어 마음과 정신이 쓰이는 순간들이 있다. 영화 속 스텔라 수녀의 부탁이 절차대로는 얻을 수 없는 결실을 얻는 것처럼, 사람과 사람을 통해 전해진 마음이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때가 가끔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자주 그 반대의 경우 또한 있지는 아니한가. 마음과 정신이, 가치와 도덕이 법과 제도, 관행과 관례 앞에 무력하게 무너지는 순간이 정말이지 세상 가운데 수두룩하게 있는 것이다.
기자가, 경찰이, 근로감독관이며 사회복지사들이 각자의 한계와 맞닥뜨려 끝끝내 돌아서는 모습을 나는 수시로 목격했다. 가장 성실한 공직자들이 <샤인>의 리사무소 공무원처럼 '어쩔 수 없다'며 손을 내젓는 광경을 보았고, 또 때로는 눈앞에서 타인의 분투를 조롱하는 이들 또한 적잖이 만났다. '법대로 하라', '남들처럼 해'라는 말은 이 시대 법과 제도, 관례와 관행이 누구의 편인지를 알도록 하지 않는가.
어린양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 위해 법이 아닌 마음의 도움을 청하는 수녀의 모습이 안쓰럽다. 부서지고 무너지는 어린양들을 지켜보며 선하고 싶은 많은 이들이 <샤인> 속 라파엘라 수녀처럼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게 될지 모를 일이다. 믿지 않는 내가 현실의 장벽 앞에서 질서를, 법을, 정의를, 가치를 의심한 많은 순간들처럼, 영화 속 라파엘라 수녀가 제 믿음의 흔들림을 목도하는 순간처럼, 세상을 돌보는 이가 아무도 없다는 깨달음에 멈칫하게 될 때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바로 그럴 때, 이 영화가 쓰임이 있을 것이다. <샤인>은 말 그대로 햇살, 누구에게나 고루 내리쬐는 빛 같은 영화다. 신은, 또 의로움은 인간의 기대처럼 닥쳐오지 않는 것일까. 무심히, 그러나 따사롭게 비추는 빛처럼 돌보는 것일까. 이 또한 신의 뜻이 있으리란 수녀의 기대가 허황되지 않기를 바란다. 세상엔 지켜져야 하는 믿음이 분명히 있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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